경맥의 반발, 찢어지는 육체
남만의 밤은 잔인하리만치 축축했고, 위천무의 단전은 미친 듯이 불타고 있었다.
“컥……! 쿨럭!”
검붉은 피가 진흙 바닥 위로 왈칵 쏟아졌다. 빗물에 희석되는 피 사이로 기괴한 보랏빛 기포가 부글거리며 솟구치다 사라졌다. 단순한 피가 아니었다. 기경팔맥을 타고 역류하는 사파의 탁기와 방금 전 적양표국의 삼류 표사에게서 빼앗은 날것 그대로의 화양성 진기가 단전 내부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며 뿜어내는 비명이었다.
“나으리! 나으리,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안대를 찬 맹인 소년 아철이 천무의 깡마른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소년의 손끝바닥에 닿는 천무의 체온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옷자락 너머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피어올랐고, 피부 아래에서는 보랏빛 혈선들이 마치 살아 있는 거머리 떼처럼 요동치며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경맥 오염 단계(經脈 汚染)의 시작이었다.
타인의 내력을 강제로 빼앗아 연명하는 혈고진경(血蠱眞經)의 가혹한 대가. 정순하게 정제되지 않은 이종(異種)의 기운은 천무의 넓은 경맥 속에서 무질서한 폭풍이 되어 날뛰었고, 심장 속의 혈고는 그 불순한 양기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숙주의 육체를 안쪽에서부터 찢어발기고 있었다.
“의…… 의선당으로…… 가야 한다.”
천무는 이를 악물었다. 턱끝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뜨겁다 못해 살을 태울 듯이 뜨거웠다. 지금 당장 이 뒤틀린 기류를 봉합하지 못하면, 독고진의 목을 베기도 전에 자신의 단전이 먼저 폭사할 터였다. 천무는 아철의 어깨에 무거운 몸을 의지한 채, 어둠이 짙게 깔린 남만 변방의 진흙길을 기어가듯 전진했다.
***
남만 국경 변방의 외진 대나무 숲길 구석, 겉보기에는 허름한 민가와 다를 바 없는 약방이 하나 있었다. 밤안개 속에 묻힌 그곳의 이름은 의선당(의선당).
“문 열어라! 담 의원! 담 의원!”
옥매가 의선당의 나무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그녀는 객잔에서 천무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자신의 붉은 비단 저고리가 흙먼지에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무를 마차에 실어 이곳으로 데려온 참이었다. 아철이 천무의 다른 한쪽을 부축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스르륵.
문이 열리며 흰 염소수염을 기르고 단정한 청색 도포를 입은 늙은 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하삼대 의선 중 하나이자, 황실의 눈을 피해 남만에 숨어 살고 있는 기인, 담백현(담백현)이었다.
“밤중에 이 무슨 소란…… 헉!”
담백현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옥매와 아철 사이에 늘어져 있는 천무의 몰골을 본 순간, 그의 자상하던 눈빛이 단숨에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천무의 전신 피부 아래로 검붉은 혈관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기괴한 보랏빛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여라! 어서 지하실로!”
담백현은 주저 없이 진료실 뒤편의 이중 벽을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지하 비밀 치료실로 통하는 은밀한 통로가 드러났다.
차가운 돌침대 위에 천무가 눕혀졌다. 그의 몸이 닿자마자 얼어붙어 있던 돌침대 표면에서 치직 소리와 함께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천무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양성 진기의 열기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이런 미친 짓을…… 대체 무슨 내공을 흡수한 게냐!”
담백현이 천무의 손목을 낚아채 맥을 짚었다. 그러나 손가락 끝이 천무의 손목에 닿는 순간, 담백현은 본능적으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천무의 기경팔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력의 파동이 마치 성난 파도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품고 그의 손끝을 찔러왔기 때문이다.
“맥이 완전히 뒤틀렸다. 사파의 탁기와 정파의 거친 양기가 단전 안에서 서로를 찢어발기고 있어! 이건 인간의 맥이 아니다. 마치 심장 속에 굶주린 괴물이 들어앉아 온몸의 피를 쥐어짜는 것 같구나!”
담백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는 천무의 심장에 이식된 혈고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의학적 멘토였지만, 이 정도로 비정상적인 경맥 오염은 처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은지야! 은지야, 어서 한기 약재를 가져오너라!”
담백현의 외침에 약방 구석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단정한 처자, 은지(은지)가 움직였다. 그녀는 무경교 생존 신도의 딸로, 약초 가공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은지는 서둘러 약초 절구에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남만의 빙한성 약초들을 넣고 짓이겼다.
“나으리, 조금만 참으십시오.”
은지가 짓이긴 푸른 약초 진액을 천무의 가슴팍과 이마에 넓게 도포했다. 차가운 약재가 살에 닿는 순간, 천무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뜨거운 열기와 차가운 한기가 피부 표면에서 부딪치며 누런 진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단전 내부에서 꼬여버린 기류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금침을 써야겠다. 천무야,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담백현이 황금 침통에서 손가락 길이만 한 미세한 금침들을 꺼내 들었다. 금침 끝이 지하실의 촛불을 받아 불길하게 번뜩였다.
“지금 네 단전에 쌓인 화독과 탁기를 강제로 배출시키지 않으면, 네 경맥은 밀가루죽처럼 녹아내릴 것이다. 내가 침술로 기맥을 일시 폐쇄하고 독기를 뽑아내겠지만, 그 고통은 뼈를 깎는 것보다 가혹할 것이다. 버텨낼 수 있겠느냐?”
천무는 대답 대신 옥매가 건넨 두꺼운 가죽 끈을 입에 물었다. 그의 두 눈은 이미 보랏빛 살기로 가득 차 있었고, 턱 근육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시작하겠다.”
담백현의 손끝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슈욱! 슈욱!
금침이 천무의 단전 주변의 관원(關元)과 기해(氣海), 그리고 기경팔맥의 요혈들을 차례로 관통했다. 침 끝이 요혈을 찌를 때마다 천무의 전신이 활처럼 팽팽하게 꺾였다.
“으으으읍……!”
가죽 끈을 문 천무의 입새로 짐승의 울음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전신의 경맥이 갈가리 찢어지고, 그 틈새로 불달궈진 쇳물이 흘러 들어가는 듯한 극통이었다. 피부 아래의 보랏빛 혈선들이 금침의 침로를 따라 요동치며 검은 탁기를 침 끝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침 끝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며 바닥의 대야를 검게 물들였다.
천무는 스스로 혈고진경을 운기하려 애썼다. 하지만 내공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심장 속 혈고가 거칠게 반발하며 금침의 제어를 깨뜨리려 했다.
‘버텨야 한다. 사부님의 원수를 갚기 전까진……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
천무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아를 붙잡았다. 담백현의 이마에서도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조금만 침로가 어긋나도 천무의 기경팔맥은 영구히 폐쇄되어 폐인이 될 판이었다. 의선당 지하실은 오직 천무의 거친 숨소리와 침 끝에서 떨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소리만이 가득한 지옥도로 변해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의선당 지상 앞방의 나무 문이 부서질 듯이 흔들리는 굉음이 지하까지 울려 퍼졌다. 거칠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문 열어라! 적양표국 남만분타(赤陽鏢局 南蠻分舵)의 무사들이다! 도망친 사파 잔당을 수색하고 있으니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
지하실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아철이 안대 너머로 고개를 번쩍 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으리…… 마당에 표사들 열두 명이 들어왔습니다. 대도를 뽑아 들고 주위를 수색하고 있어요. 한 놈이 이쪽 지하실 입구 벽 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천무의 가슴에는 아직 수십 개의 금침이 꽂혀 있었고, 지금 침을 뽑으면 기혈이 역류해 즉사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나가마.”
옥매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의 비단 장포를 고쳐 입었다. 그녀는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능청스러운 걸음걸이로 지상 앞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
지상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옥매의 괄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표두 나으리들! 이 깊은 밤중에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랍니까? 이 늙은 의원 방구석에 무슨 사파 잔당이 있다고 이 난리들이셔요?”
“시끄럽다! 방금 전 독무 계곡 초입에서 우리 표국 무사 한 명이 내공을 전부 빼앗기고 폐인이 된 채 발견되었다! 범인은 무경교의 생존자 놈이 분명하다. 당장 안을 수색하겠다!”
“에이, 나으리들도 참. 여기 은자 몇 푼 받으시고 술값이나 하셔요. 담 의원은 하루 종일 가난한 백성들 침 놓느라 골병이 든 노인네인데, 무슨 잔당을 숨겨주겠습니까?”
지상에서 들려오는 옥매의 능청스러운 대화 소리 너머로, 철갑 가죽 장화가 바닥을 쿵쿵 울리며 수색하는 소리가 지하실 천장을 흔들었다.
지하실 내부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천무는 입에 문 가죽 끈이 이빨에 잘려 나갈 정도로 강하게 깨물며,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열의 신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의 가슴팍에서 금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탁기가 바닥의 대야를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담백현은 마지막 금침을 천무의 심장 바로 위, 거궐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치이익!
마지막 탁기가 빠져나가며 천무의 보랏빛 혈선들이 서서히 피부 아래로 가라앉았다. 터질 듯 요동치던 단전의 기류가 가까스로 기맥의 통로를 찾아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상에서도 옥매의 끈질긴 회유와 은자 뇌물 덕분에 적양표국 무사들이 투덜거리며 의선당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지하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담백현은 떨리는 손으로 천무의 가슴에 꽂힌 금침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침 끝은 이미 불길한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담백현은 수건으로 손의 피를 닦아내며, 침통하게 천무를 내려다보았다.
천무가 입에서 잘려 나간 가죽 끈을 뱉어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해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단전의 파열은 막았으나, 그의 경맥 깊은 곳에는 이미 사파의 탁기와 화독의 흔적이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새겨진 후였다.
담백현이 천무의 손목 기맥을 다시 한번 짚어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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