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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의 귀인과 맹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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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의 폭우는 자비가 없었다. 하늘을 찢을 듯 흘러내리는 장대비는 석교촌 입구에 매달린 사옹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를 황토 바닥으로 사정없이 씻어내리고 있었다.


위천무는 차갑게 식어가는 여동생 위소희를 등에 업은 채 달렸다. 열두 살 소희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으나, 빗물에 젖은 어깨는 낙엽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부의 참수된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충격과 극심한 영양실조가 어린 동생의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린 탓이었다.


천무의 심장 역시 폭주하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요동쳤다. 사부의 죽음이 부른 극단의 분노와 슬픔이 단전의 거친 사기를 자극하자, 심장 속 혈고가 그 열기를 먹어 치우며 보랏빛 혈선을 가슴팍 전체로 뻗어 올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뇌풍의 목을 베어내고 싶었으나, 천무는 어금니가 깨져라 깨물며 달리기만 했다. 지금은 복수할 때가 아니었다. 동생을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진흙탕을 헤치며 한 시진을 달렸을까. 국경 지대의 황량한 황무지 한가운데, 매서운 빗줄기를 가로막고 서 있는 허름한 2층 목조 건물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옥매 객잔(옥매 객잔)이었다.


천무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객잔의 낡은 목조 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매캐한 담배 연기와 기름진 국밥 냄새가 천무의 코끝을 찔렀.


“누구여, 이 밤중에 문을 부술 듯이…….”


붉은 비단 저고리를 걸치고 곰방대를 물고 있던 객잔의 주모, 옥매가 걸걸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문가에 선 천무와 그의 등에 업힌 소희를 본 순간, 그녀의 화려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옥매는 물고 있던 곰방대를 서둘러 탁자에 내려놓고 단숨에 입구로 달려와 문을 걸어 잠갔다.


“천무 너……! 이 몸뚱이는 또 왜 이 모양이고, 소희는 왜 이리 뜨겁냐!”


“이모…… 사부님이…….”


천무의 목소리는 비바람에 젖어 물기가 가득했다. 옥매는 천무의 눈에 서린 보랏빛 안광과 그의 삼베옷 너머로 비치는 불길한 혈선을 흘긋 보고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과거 무경교의 교주이자 천무의 친부였던 위독성에게 목숨을 빚진 모성적 귀인이었다. 평생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국경에서 연락책을 자처해 온 그녀였기에, 망설임은 사치에 불과했다.


“말하지 마라. 대충 알겠으니 소희부터 눕히자. 따라와라.”


옥매는 천무의 손을 이끌고 주방 안쪽의 어두운 창고로 향했다. 그곳의 커다란 쌀독을 옆으로 밀어내자, 바닥에 교묘하게 숨겨진 이중 비밀 지하실의 통로가 드러났다.


지하 비밀실은 습했지만 외부의 비바람과 추격을 피하기에는 완벽한 요새였다. 천무는 소희를 푹신한 거적때기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옥매는 서둘러 위로 올라가 뚝배기에 뜨끈한 고기 국밥을 가득 담아 내려왔다. 매콤하고 구수한 고기 냄새가 좁은 지하실에 가득 찼다.


“이거라도 한 술 떠라. 그래야 버틴다.”


천무는 국밥을 소희의 입가에 조금씩 흘려 넣어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몸에 들어가자 소희의 거친 호흡이 미세하게 안정을 찾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생의 얼굴을 확인한 천무는 그제야 옥매가 건넨 국밥을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혈고의 발작으로 얼어붙었던 전신의 경맥이 미세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사부 사옹이…… 적양표국의 뇌풍에게 참수당했다.”


천무가 그릇을 내려놓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뼈를 깎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옥매는 담배 연기를 깊게 뿜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뇌풍 그 개잡놈이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석교촌 입구에 머리까지 걸어뒀다니, 너를 유인하려는 덫임이 분명해. 당분간은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생각 마라. 내 국경 표사들의 움직임을 살필 테니.”


천무는 품속에서 사옹이 남겨준 은침통(은침통)을 꽉 쥐었다. 침통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사부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으로서의 의협의 마음을 결코 잃지 말거라.’


괴물의 힘을 품었을지언정 협(俠)을 잃지 말라던 사부의 유언. 그러나 가슴속 혈고는 끊임없이 적들의 뜨거운 양기를 사냥하라며 그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 모순된 운명 앞에서 천무는 가슴을 쥐어짜는 고독을 느꼈다.


쿵! 쿵! 쿵!


그때, 지하실 천장 너머 객잔 1층 마당에서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거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주모! 문 열어! 관청의 수색령이다!”


적양표국 무사들이었다. 천무는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철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가만히 있거라. 내가 해결하마.”


옥매는 천무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뒤,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지하실 문을 닫고 위로 올라갔. 천무는 지하실 벽 틈새의 미세한 구멍에 귀를 대고 객잔 내부의 상황을 살폈다. 그의 기공 기술인 혈맥탐지술(血脈探知術)이 본능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귀가 미세하게 떨리며, 벽 너머 무사들의 거친 심장 박동 소리와 혈류의 흐름이 천무의 머릿속에 붉은 선으로 그려졌다.


객잔 1층으로 들이닥친 무사들은 적양표국의 붉은 문양이 새겨진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탁자를 대도로 내려치며 횡포를 부렸다.


“무경교의 잔당 놈들이 이 근방으로 도망쳤다는 첩보가 있다. 늙은 약사 놈의 목을 쳤으니, 그 제자 놈들도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있겠지.”


“에이구, 나으리들. 이 비바람 치는 밤에 무슨 잔당 타령이랍니까. 여기는 오가는 거친 광부놈들 말고는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입니다요.”


옥매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아양을 떨며 무사들에게 술을 따랐다.


그때, 무사들의 뒤편에서 쇠사슬이 바닥을 끄는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천무는 혈맥탐지술을 통해 그 소리의 진원지를 짚어냈다.


그곳에는 두 눈이 깊게 함몰되어 안대를 찬 깡마른 소년이 무사들의 무거운 짐 궤짝을 등에 지고 서 있었다. 소년의 발목에는 굵은 무쇠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온몸은 매질로 인한 핏자국과 진흙으로 엉망이었다.


아철(아철)이었다.


아철은 적양표국에서 노예처럼 부려지는 맹인 소년이었다. 비틀거리며 무사들의 탁자 옆을 지나던 아철이, 빗물에 미끄러져 그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을 건드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술병이 산산조각 나며 독한 술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


“이 눈먼 개새끼가 어디서 감히 술을 엎지르고 난리야!”


적양표국의 삼류 표사 한 명이 격노하여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철의 마른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철의 작은 몸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나, 나으리…… 죄송합니다. 소인이 눈이 멀어 그만…….”


아철이 바닥을 기며 용서를 구했으나, 술에 취한 표사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허리의 대도를 스릉 하고 뽑아 들었다.


“쓸모없는 눈먼 노예 놈, 오늘 여기서 손목 하나를 잘라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대도의 날카로운 칼날이 아철의 가느다란 손목을 향해 내리꽂히려는 찰나였다.


지하실 벽 틈새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위천무의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부의 유언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눈앞에서 무고한 소년이 도륙당하는 것을 사파의 소주로서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협(俠)이 아니었다.


천무는 지하실 통로를 소리 없이 빠져나와 주방 벽그늘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매끄러웠다.


천무는 품속에서 사옹의 은침통을 열어 가느다란 삼릉 은침 한 개를 손가락 사이에 장전했다. 그의 예민한 혈맥탐지술이 표사의 오른쪽 무릎 관절 내부의 미세한 혈류 흐름을 정확히 조준했다.


‘백보천은술(百步千銀術).’


쉬익!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은빛 선이 허공을 갈랐다. 탁자 밑의 어둠을 뚫고 날아간 은침이 표사의 오른쪽 무릎 요혈인 위중혈(委中穴)에 소리 없이 박혔다.


“어억!”


칼을 내리치려던 표사가 비틀거리며 무릎의 힘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대도는 아철의 손목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 탁자 모서리를 깊숙이 찍었다.


동시에 천무는 혈맥탐지술로 아철의 신체 흐름을 읽어냈다. 소년의 청각 신경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어,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미세한 진동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음을 간파한 것이다. 천무는 주방 구석에서 밧줄 끝을 가볍게 튕겨 아철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아철은 마치 바람에 밀리듯 자연스럽게 칼날의 궤적을 완전히 피해 쓰러졌다.


“이런, 나으리! 술 기운이 과하셨나 봅니다요!”


상황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옥매가 노련하게 끼어들었다. 그녀는 쓰러진 표사를 부축하며 품속에서 사은자(沙銀子) 수십 냥을 그의 소매 속에 슬쩍 밀어 넣었다.


“우리 객잔의 최고급 죽엽청을 한 항아리 내올 테니, 이 눈먼 놈의 피로 좋은 술자리 잡치지 마시고 노여움을 푸십시오.”


은자의 묵직한 감촉과 옥매의 싹싹한 대처에 표사는 침을 뱉으며 대도를 거두었다.


“쳇, 재수 없는 맹인 놈 같으니라고. 주모, 술이나 가져와!”


무사들이 다시 술판을 벌이는 사이, 아철은 무사들의 발길질을 받으며 객잔 뒤편의 마구간으로 거칠게 끌려가 기둥에 쇠사슬로 묶였다.


천무는 다시 주방의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의 심장 속 혈고가 아철의 신체에서 느껴졌던 기이한 진동에 반응해 작게 고동치고 있었다.


‘저 소년의 귀……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다.’


밤이 깊어 폭우가 점차 잦아들 무렵, 객잔의 무사들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


천무는 옥매에게 소희를 부탁한 뒤, 묵묵히 객잔 뒤편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축축한 흙냄새와 말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한 마구간 구석, 아철은 짚더미 위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사각, 사각.


천무가 발소리를 극한으로 죽이며 다가갔다. 일류 무사조차 알아채지 못할 완벽한 기척 차단이었다.


그러나 천무가 아철의 앞 오 십 보 거리에 도달했을 때, 짚더미 위에 누워 있던 아철의 귀가 미세하게 쫑긋거렸다. 소년은 안대를 찬 얼굴을 정확히 천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누구…… 신가요?”


아철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천무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태청폐기결(太淸閉氣結)마저 뚫고 들어온 소년의 예민한 청력에 전율이 일었다. 천무는 말없이 다가가 아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리 내지 마라. 너를 구하러 왔다.”


천무는 품속에서 사옹의 은침통을 꺼내 가느다란 침 하나로 아철의 무쇠 쇠사슬 자물쇠 구멍을 정교하게 쑤셨다. 철컥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힘없이 풀려나갔다.


아철은 자신의 발목을 자유롭게 해 준 이 정체불명의 사내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아까 낮에 나를 도와준 분이군요. 침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그리고 내 옷자락을 당겨준 기류의 흐름을 기억해요.”


천무는 아철의 뺨에 손을 얹고 혈맥탐지술을 가동했다. 기공의 파동이 소년의 관자놀이와 귀 주변의 신경망을 훑었다. 머릿속에 그려진 아철의 청각 신경은 기괴할 정도로 비정상적이게 부풀어 오르고 변이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인 체질이 아니었다. 주술적이고 인위적인 마성(魔性)의 흔적—황실 현철위의 미완성 혈고 실험의 잔재였다.


‘이 아이 역시 가문의 원수, 제갈경의 음모에 희생당한 제물이었단 말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적양표국과 황실을 향한 분노가 다시금 치솟았다. 천무는 아철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더 이상 놈들의 사냥개로 살지 않아도 된다.”


아철은 맹목적인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제 귀는 세상의 모든 숨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당신의 심장 속에서 꿈틀거리는 기괴한 고동 소리까지도요.”


그 순간, 아철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짚더미 바닥에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안대 아래의 눈썹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


“왜 그러느냐?”


천무가 묻자, 아철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발소리가 들려요. 묵직하고 거친 발소리…… 한 명이에요. 대도를 진흙 바닥에 끌며 오고 있어요. 뇌풍의 정찰조 무사예요. 홀로 객잔 뒤편 숲길로 다가오고 있어요.”


천무의 보랏빛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사부의 원수, 뇌풍의 사냥개가 스스로 덫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복수의 첫 사냥을 시작할 기회가 마침내 눈앞에 다가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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