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종이의 워터마크와 내부의 쥐
조태성이 남기고 간 비싼 시가 향과 은은한 스킨 냄새는 병원 복도의 락스 소독약 냄새 뒤로 기괴하게 뒤섞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신우는 테이블 위에 남겨진 가상의 온기를 응시하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목숨줄인 신장 투석기. 그리고 일주일이라는 시한부 유예.
조태성이 던진 제안은 달콤한 구원의 밧줄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올가미였다. 그가 요구한 기말고사 시험지 유출을 실행하는 순간, 최신우라는 존재는 평생 대치동 사교육 카르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노예이자 공범이 될 터였다. 하지만 당장 거절한다면 내일 아침 어머니의 투석기는 차갑게 멈춰 설 것이다.
‘일주일.’
신우는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어머니의 병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어머니 한혜숙의 얼굴이 보였다.
‘일주일 안에 어머니를 살릴 합법적인 우회로를 찾고, 동시에 조태성과 이사회의 숨통을 끊을 물증을 확보해야 한다.’
신우는 병실 옆 대기실 의자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낡은 책가방을 짊어졌다. 가방 안에는 어젯밤 목숨을 걸고 행정실 서버실에서 복제해 온 백업 하드디스크가 묵직한 질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교복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는 대치동 학원가에서 은밀히 유통되던 고액 족집게 모의고사 시험지 사본 한 장이 고이 접혀 있었다.
그는 빗줄기가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는 병원 로비를 빠져나와 우성고등학교 인근의 낡은 주택가 골목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우성고 학생들의 부교재 제본과 인쇄를 도맡아 하는 낡은 인쇄소, ‘문화인쇄’였다.
***
도곡동의 화려한 빌딩 숲 이면에 숨겨진 낡은 재개발 구역.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잉크 냄새와 기름 냄새가 눅눅하게 뿜어져 나왔다. 문화인쇄의 미닫이문 틈새로 둔탁한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철컥, 철컥, 철컥.
구형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신우는 우산의 빗물을 털어내고 문을 열었다. 내부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 상자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고, 그 안쪽에서 잉크가 잔뜩 묻은 파란색 작업 앞치마를 입은 청년이 제본기 앞에 서 있었다. 우성고 인쇄 작업을 대행하는 청년 아르바이트생, 최민규였다.
"어? 신우 왔냐?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기말고사 기간이라 독서실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민규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성실하고 수수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신우는 과거 가난한 형편 때문에 자신이 직접 가공한 ‘내신 예상 문제집’의 은밀한 제본을 이 인쇄소에 소액으로 맡겼던 인연이 있었다. 민규는 신우가 가난 속에서도 전교 1등을 유지하는 것을 대견하게 여기며 늘 제본비를 깎아주던 몇 안 되는 따뜻한 형이었다.
"민규 형, 바쁘신데 죄송해요. 급하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신우는 주변을 슬쩍 살폈다. 인쇄소 사장은 자리를 비우고 안쪽 내실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신우는 교복 안주머니에서 대치동 학원가에서 입수한 고액 족집게 시험지 사본을 꺼내 작업대 위에 펼쳐놓았다.
"이 종이 질감 좀 봐주실 수 있어요?"
민규는 제본기 스위치를 끄고 신우가 내민 종이를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았다. 그의 눈빛이 인쇄 전문가 특유의 예리함으로 변했다.
"이거…… 일반 복사용지가 아닌데? 두께가 최소 80g은 되고, 미세하게 노란빛이 도는 미색 모조지야. 대치동 일반 학원가에서 쓰는 싸구려 75g 백색 용지랑은 결부터가 달라. 어디서 난 거야?"
"대치동 알파반에서 유포된 이번 기말고사 예상 시험지예요. 형, 혹시 이 종이가 우성고에서 사용하는 정기고사 시험지랑 동일한 규격인가요?"
신우의 질문에 민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구석의 철제 캐비닛을 열어 ‘우성고등학교’라고 적힌 라벨 상자에서 실제 우성고 기출 시험지 전용 보안 용지 샘플 한 장을 꺼내왔다. 그리고 두 종이를 나란히 겹쳐 작업대 조명 아래에 비추었다.
"규격과 평량은 완벽히 일치해. 둘 다 80g 미색 모조지니까. 하지만 진짜 시험지인지 확인하려면 결정적인 게 필요해. 우성학원 재단이 우리 인쇄소에 독점 발주할 때 고집하는 특수 가공이 있거든."
"위조 방지 워터마크 격자무늬 말씀이신가요?"
신우가 묻자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성고 시험지는 인쇄할 때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형광 워터마크가 격자 모양으로 삽입되어 있어. 학생들이 시험지를 스마트폰으로 무단 촬영해 외부로 유출하는 걸 막으려고 재단에서 특별 주문한 특수지거든. 우리 인쇄소에서도 이 종이는 금고에 보관하고 결재 대장까지 작성해."
민규는 작업대 아래에서 먼지 쌓인 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정밀 종이 분석용 휴대용 현미경과 휴대용 자외선(UV) 램프가 들어있었다.
"한번 확인해 보자. 만약 대치동 시험지에 그 워터마크가 나온다면……."
민규는 자외선 램프의 전원을 켜고 푸르스름한 광선을 대치동 유출 시험지 사본 위로 비추었다. 인쇄소의 어두운 구석 자리, 보라색 광선이 노란빛 종이 표면을 쓸어내리는 순간, 신우의 숨이 멎었다.
종이 표면의 하얀 여백 위로, 미세한 보라색 격자무늬가 홀로그램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격자무늬의 중심에는 우성학원의 공식 문장인 방패와 뱀 모양의 심볼이 형광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민규가 입을 벌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건 우리 인쇄소 금고에 보관된 우성학원 전용 보안 용지가 확실해. 대치동 학원가에서 쓰는 복사지가 아니야. 학교 내부 인쇄실에서 보관 중이던 실물 보안 용지가 통째로 반출되어서 인쇄되었다는 뜻이야."
신우의 뇌내 칠판 위에 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기하학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학교 측은 도현이의 자살 직후 시험지 유출 사건을 외부 해커에 의한 서버 침입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하려 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고 나를 주범으로 몰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실물 보안 용지에 인쇄된 이 시험지는 디지털 해킹이 불가능한 물리적 유출의 확실한 증거다.’
즉, 내부의 누군가가 본관 1층 시험지 인쇄실의 이중 잠금장치를 열고, 실물 보안 용지와 인쇄 플레이트를 직접 밖으로 빼돌려 대치동 알파 에듀케이션의 조태성 원장에게 넘겼다는 뜻이었다.
"형, 한 가지만 더 확인해 주세요."
신우는 책가방 깊숙한 필통 안쪽에서 작은 지퍼백을 꺼냈다. 그 안에는 도현의 사물함 이중 바닥 구석에서 발견했던, 3화에서 입수한 찢어진 종이 조각(행정실장의 결재 도장 흔적)이 들어있었다. 종이 조각의 모서리에는 붉은색 인영의 일부분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신우는 종이 조각을 정밀 현미경 플레이트 위에 올려놓았다.
"이 붉은 인영의 마모 상태와 서체를 감정할 수 있을까요?"
민규는 현미경 렌즈에 눈을 밀착시키고 초점 다이얼을 미세하게 조정했다. 렌즈 너머로 확대된 붉은 인영의 픽셀 단위 격자가 모니터 화면에 출력되었다. 민규는 자신의 컴퓨터를 켜고, 우성고 행정실로부터 정기적으로 수령하는 부교재 인쇄 의뢰서 결재 도장 데이터베이스를 열어 실시간 겹쳐보기(Overlay) 분석을 실행했다.
컴퓨터 화면 위에서 두 개의 붉은 인영이 포개어졌다. 마모된 도장 모서리의 미세한 균열과 잉크의 번짐 정도가 완벽하게 일치하며 녹색의 '일치율 100%' 메시지가 깜빡였다.
"이건…… 우성고 행정실장 조영호의 공식 직인이야."
민규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조영호 행정실장의 결재 도장이 찍힌 종이 조각이 왜 도현이의 사물함에 있었던 거지? 게이지가 안 맞잖아. 행정실장이 결재한 보안 용지 반출증의 일부분이었던 것 같아."
신우는 차갑게 독백했다.
‘도현이는 자살하기 직전, 학교 내부에서 시험지가 반출되는 결정적 단서인 조영호의 결재증 조각을 입수했던 거야. 그리고 그걸 빌미로 서강우 패거리에게 협박을 당해 대리 시험을 강요받았고…….’
모든 인과 관계가 명확해졌다.
우성고 내부에서 실물 시험지를 빼돌리는 물리적 유출의 총괄 실무자는 교무부장 김철수였고, 이를 행정적으로 은폐하고 보안 용지 반출을 결재해 준 공범은 행정실장 조영호였다. 그리고 이 둘을 배후에서 조종해 대치동 알파반으로 시험지를 납품받은 포식자가 바로 조태성 원장이었다.
학교 측이 내세운 '외부 해킹설'은 이 모든 물리적 유출 흔적을 은폐하기 위한 추악한 가짜 알리바이였다.
"민규 형, 이 분석 데이터와 자외선 반응 촬영본을 제 USB에 담아주실 수 있나요?"
"어…… 어, 당연하지. 근데 신우야, 이거 정말 위험한 일에 연루된 거 아니지? 너 전교 1등이잖아. 곧 수능인데……."
민규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신우의 어깨를 잡았다. 신우는 아픈 옆구리의 통증을 참아내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형. 전 제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뿐이에요."
민규가 건네준 분석 자료가 담긴 USB를 가방에 깊숙이 넣는 순간, 신우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묵직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드디어 어른들이 설계한 거대 장벽의 아킬레스건을 아날로그적 팩트 체크로 완벽하게 찔러 넣은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지이이잉-.
신우의 교복 바지 주머니 속에서 구형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표시된 발신인의 이름에 신우의 심박수가 급격히 치솟았다.
[교무부장 김철수]
신우는 숨을 멈추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우며, 규칙적인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 최신우. 지금 당장 본관 1층 교무실로 내려와라. 네 가방 속 소지품 검사를 다시 해야겠다.
김철수의 차가운 호출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신우는 머릿속의 톱니바퀴가 급정거하는 듯한 서늘한 전율을 느꼈다. 그가 내 신 서버실에 침투했던 흔적을 눈치챈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신우는 굳게 닫힌 인쇄소 문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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