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선 어머니와 뱀의 회유
손전등의 차가운 백색 광선이 복도 벽면을 쓸어내렸다.
신우는 복도 벽에 바짝 밀착했다. 슬라이딩하며 강철 셔터 밑을 빠져나올 때 바닥에 쓸린 무릎과 옆구리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교복 셔츠 위로 붉은 피가 서서히 스며 나왔지만, 신우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완벽한 포커페이스 유지력’이 강제로 심박수를 분당 70회 이하로 묶어두고 있었다.
터벅, 터벅, 터벅.
경비원들의 군화 소리가 불과 5미터 앞 모퉁이까지 다가왔다. 랜턴 불빛이 신우가 서 있는 어둠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비추었다. 신우는 머릿속에 저장된 우성고 본관 1층의 격자 지도를 떠올렸다.
‘동쪽 카메라는 지금 반대편을 향해 있고, 서쪽 카메라는 사각지대 진입까지 3초 남았다. 그리고 내 바로 우측 1.2미터 지점에는 청소 도구함이 있다.’
신우는 소리 없이 청소 도구함 문을 열고 몸을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는 미세한 마찰음과 동시에 손전등 불빛이 도구함 문짝을 강하게 때리며 지나갔다.
"어이, 저쪽 서버실 경보 울린 거 확실해?"
"어, 시큐어넷에서 비상 트래픽 감지됐다고 연락 왔어. 근데 셔터는 내려가 있잖아?"
보안 요원들이 서버실 문 앞을 서성이며 무전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얇은 합판 문 너머로 생생하게 들렸다. 신우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행정실 서버 백업 하드디스크의 묵직한 촉감을 느끼며 호흡을 죽였다. 이 안에는 도현의 성적을 조작한 조영호 행정실장의 계정 로그와, 그 시간대에 접속한 교장 배종식의 전용 노트북 맥 주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것만 무사히 밖으로 반출하면 어른들의 위선적인 카르텔을 무너뜨릴 첫 번째 열쇠가 완성된다.
보안 요원들이 서버실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열쇠를 찾으러 행정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틈을 타, 신우는 도구함 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그는 미리 잠금장치를 풀어두었던 복도 끝 비상구 목재 도어를 밀고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우성고 교정을 가로질러 담장을 넘는 순간, 신우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
새벽 1시, 대치동 변두리의 한적한 PC방 구석 자리.
"성공이야, 신우야! 데이터 무결성 100%로 복구 완료했어!"
이윤석이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노트북 화면을 신우에게 돌려보였다. 화면에는 조영호 행정실장의 마스터 ID로 도현의 화학과 미적분 점수를 인위적으로 감점 처리한 상세 수정 로그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이걸 정아름의 개인 서버에 분산 백업해 둬. 학교 측이 서버실 침입 흔적을 감지하고 하드를 포맷하려 들 테니까."
신우가 차갑게 지시하는 순간, 그의 낡은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발신인은 도곡동 성모병원의 야간 원무과였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 최신우 보호자님이시죠? 한혜숙 환자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인공신장실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행정처 지시로 급하게 안내해 드립니다. 미납된 투석 치료비 2,450,000원이 내일 아침까지 완납되지 않으면, 장기 체납 환자 규정에 따라 투석 순번에서 강제 제외 및 퇴원 조치되실 예정입니다.
"무슨 소립니까? 분명 학교 장학재단에서 병원비를 전액 보증하겠다고……!"
- 재단 측에서 방금 전 보증 철회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저희도 규정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신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학교 이사회가 움직인 것이다. 자신이 도현의 사물함을 뒤지고 서버실을 해킹하려 한 행적을 눈치채고, 가장 취약한 고리인 어머니의 목숨줄을 죄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신우는 곧바로 교장 배종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늘게 이어졌지만, 이내 cold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세 번을 연이어 걸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철저한 외면이자 경고였다. 네가 진실을 쫓는다면 네 어머니의 생명 장치를 꺼버리겠다는, 어른들의 잔인한 침묵의 협박.
***
빗길을 뚫고 달려간 도곡동 성모병원 412호.
하얀 커튼이 쳐진 침대 위, 어머니 한혜숙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산소호흡기를 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투석기 옆의 모니터에는 경고음이 간헐적으로 울렸고, 환자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에는 수많은 투석 주삿바늘 자국이 푸르게 멍들어 있었다.
"신우 왔니……?"
혜숙이 산소마스크 너머로 힘겹게 눈을 뜨며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아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늘 괜찮은 척하는 어머니의 그 마른 손을 잡는 순간, 신우의 이성적인 두뇌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해결할게요. 조금만 누워 계세요."
신우는 병실 밖 복도로 나와 벽에 머리를 찧었다. 돈이 필요했다. 당장 아침까지 245만 원을 구하지 못하면 어머니는 독소가 온몸에 퍼져 질식해 죽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은 매점 알바를 하는 민재에게 빌린 몇십만 원이 전부였다. 가난이라는 아득한 절벽이 다시 한번 그의 목을 졸라왔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규칙적이고 세련된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병원 복도의 살풍경한 조명 아래,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이탈리아제 맞춤 정장에 은색 실크 넥타이, 그리고 안경 너머로 뱀처럼 차갑고 영악한 눈빛을 번뜩이는 남자. 대치동 사교육 카르텔의 정점이자 '알파 에듀케이션'의 대표 원장, 조태성이었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신우야."
조태성은 혜숙의 병실 문틈으로 내부를 슬쩍 보더니, 신우의 앞에 멈춰 섰다. 그에게선 비싼 시가 향과 은은한 스킨 냄새가 풍겼다. 시궁창 같은 반지하 방과 투석실 냄새에 찌든 신우의 현실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향기였다.
"네가 전교 1등이라는 그 찬란한 타이틀을 가지고도, 고작 200여 만 원 때문에 어머니의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현실이 말이다. 이래서 가난은 무서운 법이지. 인간의 품위와 양심을 가장 먼저 갉아먹으니까."
"……원장님이 여기 왜 오신 겁니까."
신우는 이 악물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지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조태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신우의 젖은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 촉감은 마치 독사의 비늘이 살갗을 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서늘했다.
"우성고 이사회가 네 목줄을 쥐고 흔드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조언을 하러 왔단다. 배종식 교장이나 송민혁 이사장은 아주 탐욕스러운 노인네들이지. 자기들의 비리를 캐려는 어린아이 하나 밟아 죽이는 것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다르단다, 신우야. 난 네 그 비범한 두뇌의 가치를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조태성은 품 안에서 세련된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두툼한 서류 봉투와 VIP 차명 신용카드를 꺼내 병실 앞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봉투 안에는 현금 5천만 원이 들어있단다. 그리고 이 카드는 네 어머니의 향후 모든 투석 치료비와 신장 이식 수술비까지 무제한으로 완납할 수 있는 법인 카드지. 네가 원한다면 대치동의 깨끗한 아파트로 어머니를 이송해 최고급 의료진의 케어를 받게 해줄 수도 있어. 물론, 네가 서울대 의대에 합격할 수 있도록 완벽한 학생부 종합전형 스펙도 내가 직접 설계해 주마."
달콤하고 치명적인 제안이었다. 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제안만 수락하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살리고 평생 꿈꿔왔던 미래를 거머쥘 수 있었다.
"대가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조태성의 입꼬리가 기괴할 정도로 매끄럽게 올라갔다.
"아주 간단한 일이란다. 다가오는 우성고 2학년 기말고사 수학과 화학 시험지 원안을 사전에 입수해 나에게 넘겨다오. 출제 교사들의 출제 성향과 문제 은행 소스를 네가 조금만 가공해 주면, 대치동 알파반 아이들을 위한 '족집게 모의고사'로 완벽하게 세탁할 수 있거든. 서로 윈-윈(Win-Win)하는 아주 아름다운 거래지 않느냐?"
시험지 유출.
그 단어가 신우의 귓가에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도현의 마지막 목소리가 이명처럼 터져 나왔다.
'신우야, 네가 준 답이 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미안해.'
자신이 돈 때문에 유출했던 그 시험지 때문에 도현은 서강우에게 협박당했고, 결국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자신이 또다시 시험지를 유출한다면, 그것은 도현을 두 번 죽이는 짓이자 스스로 지은 죄를 영원히 속죄할 기회를 잃는 파멸의 길이었다.
"저는…… 더 이상 시험지를 팔지 않습니다."
신우는 주먹을 쥔 손을 바르르 떨며 조태성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현이의 죽음을 그렇게 덮어두고, 다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조태성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그의 눈빛에서 부드러운 가면이 벗겨지고, 대치동 사교육 시장에서 수많은 경쟁자를 짓밟고 올라온 포식자의 차갑고 잔혹한 살기가 드러났다.
"도덕적 결벽증은 배부른 자들의 사치란다, 최신우 학생."
조태성은 천천히 신우에게 다가와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것처럼 무겁고 위압적이었다.
"네가 여기서 고고한 척 양심을 지키면 세상이 널 알아줄 것 같니? 아니, 당장 내일 아침 네 어머니는 투석을 받지 못해 독소가 폐에 차올라 숨을 쉬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가난이라는 쇠사슬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고 잔인해. 네 어머니의 목숨값과 네 그 하찮은 자존심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운지, 네 그 뛰어난 수학적 두뇌로 계산해 보아라."
신우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조태성의 말은 단 한 마디도 틀린 곳이 없었다. 가난은 현실이었고, 어머니의 생명은 초단위로 꺼져가고 있었다. 도덕과 양심을 지키는 대가가 어머니의 죽음이라면, 그 정의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머릿속 톱니바퀴가 미친 듯이 회전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이명이 머릿속을 찌르고 시야가 흐려졌다.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신우의 머릿속에 정아름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룰을 지키면서 싸우는 게 아니야. 적들의 룰을 역이용하는 거지.'
신우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조태성의 제안을 즉각 거절하면 어머니는 당장 죽는다. 하지만 제안을 수락하고 시험지를 넘기면 자신은 영원히 카르텔의 노예가 되어 파멸한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이 포식자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
그는 병실 구석에 상주하는 사회복지사 차은희를 떠올렸다. 차은희 복지사를 통해 국가 긴급 의료비 지원 제도를 신청하면, 이사회의 사적 자금 동결 압박을 우회하여 임시로 투석 치료를 재개할 법적 우회로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신청서가 수리되고 승인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최소 일주일.
신우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의 검은색 가죽 장갑을 쥔 조태성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다시 한번 차갑고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주일만 주십시오."
"일주일?"
조태성이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말고사 출제 기간이라 교무실의 보안이 극도로 강화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시험지를 반출하려 들면 100% 적발됩니다. 교무부장 김철수의 동선과 인쇄실 보안 취약 시간대를 정밀 분석해 유출 경로를 설계하려면 최소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머니의 투석 치료를 일주일만 연기해 주신다면, 확실한 원안을 들고 원장실로 찾아가겠습니다."
조태성은 신우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까지 잡아내려는 포식자의 눈빛이었지만, 신우가 일생을 걸고 유지한 포커페이스는 단 하나의 균열도 허용하지 않았다.
마침내 조태성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전교 1등답게 계산이 빠르구나. 좋다, 일주일의 유예를 주마. 성모병원 원무과에는 내가 손을 써두지. 하지만 명심해라, 신우야."
조태성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차명 신용카드와 현금 봉투를 거두어 품에 넣으며, 신우의 뺨을 살짝 톡톡 쳤다.
"일주일 뒤에도 네 손에 시험지 원안이 들려있지 않다면…… 네 어머니의 투석기는 영원히 멈출 것이고, 네가 과거에 대치동 독서실에서 시험지 소스를 가공해 판매했던 그 금융 거래 내역서 원본이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정식 접수될 것이다. 횡령과 업무방해죄로 소년원에 수감된 전교 1등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기대되는구나."
조태성은 우아하게 돌아서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의 비싼 구두 굽 소리가 병원 복도의 정적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신우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탁, 탁, 탁.
마지막 구두 소리가 끊기는 순간, 신우의 손이 침대 철제 난간을 잡고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이성적인 두뇌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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