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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금고의 열쇠를 복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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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의 과학실은 시큼한 아세톤 냄새와 차가운 알코올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을빛조차 비치지 않는 북향의 창가에서 최신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책상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투명한 비커와 화학 실험용 실리콘 용액, 그리고 낮에 교무실에서 교무부장 김철수가 버린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어제 정아름과 도서관 멀티미디어실에서 맺은 검은 공조는 단순한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현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스스로를 파멸의 단두대로 밀어 넣는 계약이었다. 아름이 보여준 도현의 일기장 속 고백은 신우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동정해 비싼 돈을 주고 문제집을 사주었던 친구. 그 고결한 진심을 외면하고 돈 몇 푼에 시험지 소스를 팔아넘겼던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가 신우의 이성을 더욱 차갑게 벼려내고 있었다.


"도현아, 조금만 기다려."


신우는 낮게 읊조리며 핀셋으로 종이컵 표면을 고정했다. 교무부장 김철수가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던 부분이었다. 육안으로는 희미하게 땀과 유분이 엉겨 붙은 자국만 보였지만, 신우의 머릿속 칠판에는 이미 그 지문의 격자무늬가 3D 그래픽처럼 선명하게 복원되고 있었다.


그는 과학실 구석에서 가져온 닌히드린 용액을 종이컵 표면에 미세하게 분사했다. 열풍기로 조심스럽게 열을 가하자, 보라색의 선명한 지문 곡선이 종이 표면 위로 떠올랐다. 신우의 안경 렌즈에 그 보라색 격자가 차갑게 반사되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 지문을 물리적인 패드로 복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밀 주사기를 이용해 액상 실리콘과 경화제를 10대 1의 비율로 정확히 배합했다. 소수점 단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수리적 연산력이 발동했다. 실리콘의 두께가 너무 두꺼우면 도어락의 정전식 센서가 엄지손가락의 체온과 전류를 감지하지 못할 것이고, 너무 얇으면 지문 격자가 뭉개져 인식 오류가 발생할 터였다. 신우는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0.5밀리미터 두께의 미세한 실리콘 막을 보라색 지문 위에 도포했다.


화학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실리콘이 굳어가는 동안, 신우는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서강우 패거리에게 얻어맞은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토해냈다.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가 찌르는 듯 아팠지만, 신우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호흡을 골랐다. 이 고통은 도현이가 느꼈을 절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랍 속에서 완전히 경화된 투명한 실리콘 막을 떼어냈다. 신우는 그것을 자신의 오른쪽 엄지손가락 끝에 밀착시켰다. 육안으로는 거의 티가 나지 않는, 완벽한 교무부장 지문 복제 실리콘 패드였다.


***


밤 11시 15분. 야간 자율학습이 완전히 끝나고 우성고등학교 교정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사라진 복도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고, 비상구의 초록색 유도등만이 바닥에 길고 왜곡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신우는 본관 1층 행정실 뒤편의 어두운 복도 벽에 몸을 밀착시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학교 내부의 모든 CCTV 회전 주기와 감시 각도가 격자 지도로 펼쳐져 있었다.


‘복도 동쪽의 카메라는 12초 주기로 회전한다. 서쪽 카메라는 8초간 사각지대를 만든다. 지금이다.’


신우는 소리 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행정실 내신 서버실의 철문 앞에 도달했다. 이 방은 전교생의 3개년 성적 원본과 생활기록부 데이터베이스가 보관된 최고 보안 구역이었다. 문 옆에는 파란 불빛을 뿜어내는 최신형 지문 인식 도어락이 장착되어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신우는 엄지손가락에 밀착된 실리콘 패드를 조심스럽게 문지르고, 숨을 멈춘 채 인식기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삐빅-


[인식 오류. 다시 시도하십시오.]


붉은 경고등이 켜지는 순간, 신우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세 번 연속 오류가 발생하면 행정실 내부의 메인 경보기가 울리고 사설 보안업체인 ‘시큐어넷’에 즉각 비상 신호가 전송된다.


‘침착해. 실리콘의 두께가 미세하게 차가워져서 정전기 전도율이 떨어진 거야.’


신우는 포커페이스를 가동하며 심박수를 강제로 가라앉혔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교복 바지에 빠르게 문질러 마찰열을 발생시켰다. 실리콘 패드가 체온을 흡수해 미세하게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인식기 정중앙에 손가락을 밀착시켰다. 체중을 실어 지문의 격자가 완벽히 밀착되도록 압력을 조절했다.


띠리링-


가벼운 비프음과 함께 도어락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둔탁한 기계음이 들렸다. 신우는 신속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서버실 내부는 항온항습기가 뿜어내는 차가운 냉기와 윙윙거리는 기계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 개의 파란색, 초록색 LED 불빛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깜빡이며 신우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인간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데이터와 전류만이 흐르는 차가운 무덤 같았다.


신우는 가방에서 이윤석이 직접 제작해 준 고성능 외장 하드디스크를 꺼냈다. 윤석은 이 하드디스크에 행정망의 방화벽을 우회하고 관리자 권한을 강제로 탈취하는 특수 스크립트를 심어두었다.


그는 메인 서버 본체의 USB 포트에 케이블을 연결했다. 하드디스크의 작동 표시등이 파랗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모니터 화면에 까만 콘솔 창이 열리며 하얀 코드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Bypass Firewall: SUCCESS]

[Accessing Database Log: ACTIVE]


신우의 눈동자가 화면의 텍스트를 실시간으로 스캔했다. ‘완전 기억 능력’이 발동했다. 화면에 표시되는 수많은 접속 로그 중, 도현이가 자살하기 직전인 중간고사 종료일 밤의 기록을 찾아냈다.


‘찾았다.’


[Access Time: 04/15 23:14:02]

[User ID: Admin_Chief (조영호)]

[Target: 임도현 (화학1, 미적분 성적 수정)]

[Action: 수행평가 감점 반영 및 지필평가 서술형 3번 오답 처리]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도현의 화학과 미적분 성적은 해킹이나 오류가 아니었다. 행정실장 조영호의 계정으로 직접 접속해 수작업으로 수정된 것이었다. 완벽한 인위적 조작의 물증이었다.


신우는 떨리는 손으로 다운로드 명령어를 실행했다. 백업 하드디스크의 용량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10%, 30%, 50%...


그때, 서버실 천장의 붉은색 경보등이 기괴한 소리 없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모니터 화면에 붉은색 경고 창이 점멸했다.


[Warning: Abnormal Traffic Detected by SecureNet]

[Initiating Automated Lockdown Protocol: 30 Seconds Remaining]


"젠장!"


외주 보안업체인 시큐어넷의 엔지니어 박형준이 구축해 둔 실시간 트래픽 감지 방화벽이 작동한 것이었다. 비정상적인 대용량 데이터 전송을 감지한 시스템이 자동으로 서버실 전체를 폐쇄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락다운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철컥, 철컥.


서버실의 무거운 강철 셔터가 위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복도 저편에서 야간 경비원과 사설 보안 요원들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윙윙거리는 기계 소음 너머로 들려왔다.


‘시간이 없다.’


다운로드 진행률은 이제 겨우 88%였다. 신우는 ‘초고속 수리적 연산력’을 작동시켰다.


셔터가 완전히 바닥에 닿기까지 남은 시간은 14초. 발자국 소리의 데시벨과 속도로 보아 보안팀이 이 문 앞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18초. 지금 하드디스크를 강제로 분리하면 데이터가 손상되어 증거 능력을 잃을 확률이 74%였다. 하지만 100%가 될 때까지 기다리면 이 방에 갇혀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92%... 95%...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안경테를 적셨다. 강철 셔터는 이제 신우의 허리 높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기계실 내부의 냉기가 차단되며 숨이 막혀왔다.


99%...


[Download Complete. System Log Saved.]


"지금이야!"


신우는 데이터 전송 완료 메시지가 뜨자마자 케이블을 거칠게 뽑아 외장 하드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바닥을 기어 내려오는 강철 셔터의 좁은 틈새를 향해 온몸을 날렸다. 옆구리의 통증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지만, 그는 이 악물고 셔터 밑의 30센티미터 틈새를 슬라이딩하며 빠져나갔다.


쿵! 하고 강철 셔터가 바닥에 완전히 닿으며 서버실이 완전히 폐쇄되었다.


복도 바닥에 엎드린 신우의 귓가로,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는 보안 요원들의 다급한 군화 소리가 벼락처럼 꽂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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