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의 창과 방패
가슴팍을 찌르는 지독한 한기에 신태경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윽.”
단전에서부터 시작해 심장 주변을 타고 흐르는 파란 서리 흉터가 얼음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태경은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닿는 얇은 사서 제복 너머로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이성은 냉철하게 상황을 짚어내기 시작했다. 오른쪽 시야를 가린 하얗고 흐릿한 장막은 여전했고, 가시넝쿨에 찢겼던 양손 바닥의 붕대는 붉은 핏물과 함께 약간의 그슬린 자국이 추가되어 있었다. 채원의 마도 열독을 대신 받아내며 생긴 화상의 흔적이었다.
“오라버니! 정신이 드세요? 오라버니……!”
침상 옆에서 밤을 새운 한채원이 태경의 상체가 들리자마자 다급하게 매달렸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득 고여 있었다. 마왕의 파멸적인 각성도가 45%까지 내려앉은 덕에 그녀의 주변을 감돌던 살벌한 기운은 사라졌지만, 대신 태경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깊은 죄책감과 집착이 서려 있었다.
나를 위해 눈을 잃고, 수명을 깎고, 온몸에 흉터를 남긴 유일한 구원자.
채원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정서적 각인은 그녀의 운명 정화도를 폭발시켰고, 동시에 태경을 향한 독점욕을 걷잡을 수 없이 키워놓은 상태였다. 채원은 태경의 붕대 감긴 손을 소중하게 감싸 쥐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가 죽으면, 저도 그냥 세상을 다 태워버리고 죽을 거예요.”
“바보 같은 소리 마라. 내가 널 살렸는데 네가 왜 죽어.”
태경은 흐릿한 오른쪽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왼쪽 눈으로 채원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채원은 겨우 울음을 삼켰다.
그때, 별관의 낡은 나무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가난한 장학생 대표인 이진형이 급히 들어왔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태경 형님, 깨어나셨습니까! 다행입니다…… 하지만 지금 누워 계실 때가 아닙니다.”
이진형의 다급한 목소리에 태경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일이지, 진형아?”
“남궁현과 한채민 공자가 주도하여 도서관 문앞에 대형 벽보를 붙였습니다. 한채원 학우를 ‘아카데미의 안위를 위협하는 마도의 괴물’로 규정하고, 강제 퇴학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벌써 귀족 자제들 수십 명이 서명을 마쳤고, 오늘 오후에 학장 남궁민에게 정식 상소문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겨우 안정을 찾았던 그녀의 단전이 다시금 불안하게 요동치려 했다. 가문에서 버림받고, 아카데미에서도 괴물로 몰려 쫓겨나야 하는 불합리한 운명.
하지만 태경은 그녀의 차가운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붕대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온기에 채원은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걱정하지 마라, 채원아. 내가 해결한다고 했지.”
태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이 무거웠고 기맥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10년 후의 미래 지식과 현재의 자원들을 조합하여 정교한 반격의 수식을 그려내고 있었다.
무력으로 남궁현이나 학장의 규율부를 정면 대적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그들이 목숨처럼 아끼는 위선적인 ‘도덕적 정당성’을 대중의 눈앞에서 산산조각 내는 언론 정보전이었다.
태경은 이진형에게 나지막이 지시했다.
“진형아, 평민 장학생들을 은밀히 소집해라. 그들이 그동안 귀족들에게 받아온 차별과 억압의 분노를 자극해야 한다. 채원이의 비극이 오늘로 끝나지 않으면, 내일은 바로 그들의 차례가 될 것임을 깨닫게 해라.”
이진형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굳건한 결의로 가득 찼다.
“알겠습니다, 형님. 평민 자치회 장학생들은 이미 귀족들의 위선에 극도의 분노를 품고 있습니다. 형님의 뜻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이진형을 보낸 태경은 도서관 뒷문을 통해 아카데미 외곽 저잣거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평범한 삼베옷을 입고 깃털 부채를 만지작거리던 정보 상인 최강현과 접선했다.
“여어, 태경 형씨.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구만.”
최강현은 태경의 양손 붕대와 흐릿한 오른쪽 눈을 보며 혀를 찼지만, 이내 품속에서 두꺼운 가죽 가방을 꺼내 놓았다. 그 안에는 한림가문 내부에서 극비리에 작성된 한채원의 학대 일지와 그녀의 생모 설향의 의문사 정황이 담긴 비밀 문서들이 들어있었다.
“형씨가 말한 대로 한림가문 지하 서재를 뒤져 확보한 진짜배기 정보들이야. 가문 가주 한태오와 집행 장로 한무진이 그동안 이 아가씨에게 가한 가혹한 채찍질과 독물 주입 실험 기록들이 상세히 적혀 있지. 정파의 명문가라는 자들이 뒤편에서 저지른 추악한 만행의 결정적 증거야.”
태경은 문서를 받아 펼쳤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기록들을 왼쪽 눈으로 꼼꼼히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맙다, 강현아. 이 정보의 가치는 하급 영석 몇 백 개로도 바꿀 수 없다.”
“형씨의 미래 예지 덕분에 내 상단도 무섭게 크고 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투자지. 자, 이제 이 날카로운 창을 어떻게 휘두를 생각인가?”
태경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법과 규율이라는 방패를 들고 나오기 전에, 대중의 눈과 귀를 분노의 불꽃으로 채울 것이다.”
그날 밤, 천성아카데미 제3 도서관 별관 지하에서는 은밀한 인쇄 작업이 진행되었다. 최강현이 지원해 준 특수 인쇄 장비와 이진형이 이끄는 아카데미 평민 학생 연대의 정예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태경은 한림가문의 만행과 학대 기록, 그리고 남궁현과 한채민이 개인적인 이익과 가문의 치부를 덮기 위해 채원을 마녀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위선적인 정황을 조목조목 분석한 대자보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태경 형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진형이 어둠 속에서 대자보 뭉치를 들고 속삭였다. 태경은 양손의 붕대를 고쳐 매며 나지막이 명령했다.
“살포해라. 아카데미 중앙 광장, 식당 벽면, 대연무장 게시판…… 귀족들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한 장도 빠짐없이 부착해라.”
새벽의 정적 속에서 평민 학생들이 어둠의 파수꾼처럼 움직였다.
아침이 밝아오고 아카데미의 대종이 울리자, 천성아카데미는 그야말로 거대한 폭풍 속으로 빠져들었다.
식당으로 향하던 수백 명의 평민 장학생들과 일반 학우들이 중앙 광장에 부착된 거대한 대자보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자보에 적힌 한림가문의 잔혹한 아동 학대 일지와 독물 실험의 진실, 그리고 귀족 자제들이 이를 묵인하고 채원을 억울한 제물로 삼으려 했다는 폭로 글을 읽은 학생들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이게 정파의 명문가라는 자들이 할 짓인가?”
“한채원 학우가 마도의 괴물이 아니라, 가문의 잔혹한 실험 희생자였다니!”
“귀족 놈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우리 같은 평민과 서출들을 소모품으로 보고 있었던 거다!”
분노의 파도는 순식간에 아카데미 전체를 휩쓸었다. 당황한 한채민과 귀족 학생들이 대자보를 찢어발기려 다가왔지만, 이미 이진형과 아카데미 평민 학생 연대의 단원 수십 명이 스크럼을 짜고 대자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손대지 마라! 위선자들아! 진실이 두려운 거냐!”
이진형이 청풍검을 비스듬히 쥔 채 오만하게 소리쳤고, 평민 학생들의 단결된 머릿수와 분노 어린 기세에 귀족 자제들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여론은 완벽하게 반전되었다. 귀족들이 치켜들었던 ‘이단 낙인’이라는 창은, 태경이 설계한 ‘진실의 방패’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도서관 별관 창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태경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아카데미 본당 방향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의 진동이 대기를 흔들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론이 평민 학생들을 중심으로 가문을 규탄하는 최악의 방향으로 돌아서자, 당황한 학장 남궁민이 마침내 비정상적인 공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본당 광장 너머로 규율부의 검은 제복을 입은 무사들이 삼엄한 쇠사슬을 쥔 채 도서관 방향으로 행진하는 모습이 왼쪽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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