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분담의 밤
새벽녘의 짙은 안개를 뚫고, 신태경은 간신히 한채원을 부축한 채 천성아카데미 제3 도서관 별관의 뒷문을 열었다.
정보 상인 최강현이 주선해 준 저잣거리의 비밀 하수 통로는 지독한 악취와 습기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약방 외곽을 촘촘히 에워싸고 있던 한무진의 감시 밀정들을 따돌리기에는 최적의 경로였다.
“하아…… 하아……”
태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별관의 낡은 나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신을 엄습하는 피로와 함께 미간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만성 두통이 밀려왔다.
의선 한지민이 약방에서 하얀 붕대로 정성껏 치료해 주었음에도, 가시넝쿨에 찢겼던 양손 바닥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욱신거리며 붉은 핏방울을 배어 물었다. 무엇보다 우주의 인과율에 대가로 지불한 우측 시력의 영구 저하로 인해, 그의 오른쪽 시야는 여전히 장막을 쳐놓은 듯 하얗고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오라버니…….”
침상에 눕혀진 한채원이 힘겹게 눈을 뜨며 태경의 붕대 감긴 손을 바라보았다. 심령안정초 환약을 복용하여 단전의 광포한 열독은 임시로 안정되었으나,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슬픔과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나 때문에…… 또 나 때문에 오라버니가 다쳤어…….”
“괜찮아, 채원아.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약방에서 지민 씨가 지어준 약도 먹었으니 금방 나을 거다.”
태경은 애써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왼쪽 눈으로 그녀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채원은 고양이가 온기를 탐하듯 그의 붕대 감긴 손바닥에 뺨을 비벼왔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침이 밝아오고 아카데미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별관의 얇은 문 너머로 불길하고 오만한 발자국 소리들이 무겁게 들려왔다.
쿵!
별관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화려한 보석 비단 옷을 걸친 한채민이 오만한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눈가에는 방계 서출인 채원을 향한 노골적인 열등감과 배척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푸른색 남궁가문 무복을 입고 은빛 장검 청강검을 찬 아카데미 최고의 천재, 남궁현이 싸늘한 안광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결국 여기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군, 괴물 년.”
한채민이 침상에 누워 있는 채원을 내려다보며 침을 뱉듯 멸시를 내뱉었다.
“가문의 수치이자 아버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오물 같은 서녀 년이 감히 아카데미의 신성한 도서관을 더럽히고 있다니. 당장 가문으로 끌고 가 지하 감옥에 처박아 두어야 하거늘.”
남궁현 역시 청강검의 손잡이를 쥔 채 차가운 목소리로 거들었다.
“한림가문의 이단적인 마성이 아카데미 내부에서 다시 흘러나온다면, 내 손으로 직접 그 마도의 싹을 잘라버릴 것이다. 정파의 율법은 이 따위 괴물 오물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들의 가혹한 정서적 가해와 차가운 멸시는 채원이 지닌 가장 깊은 트라우마를 직격했다. 가문에서 당했던 모진 채찍질, 괴물이라 불리며 골방에 갇혀 굶주려야 했던 어두운 기억들이 그녀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다.
우웅—!
채원의 단전에서 잠들어 있던 광폭한 붉은 마력이 다시 한번 통제력을 잃고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고, 몸 밖으로 날카로운 붉은 가시들이 바늘처럼 돋아나며 주변의 책장과 바닥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단전 파열의 위기이자, 자멸적인 대폭주의 전조였다.
[경고: 한채원의 붉은 마왕 각성도가 급상승합니다! 현재 78%!]
[임계점 80% 도달 시 영혼 그릇이 완전히 파괴되어 사망에 이릅니다!]
태경의 눈앞에 시스템의 붉은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비켜라, 이 위선자들아!”
태경은 양손의 붕대가 찢어지는 고통을 무시하고 채원을 향해 뛰어들었다.
“태경 형님! 미쳤습니까? 저 괴물의 폭풍에 휘말리면 일류 무인이라도 기맥이 타들어 갑니다!”
뒤늦게 별관으로 달려온 이진형이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태경은 멈추지 않았다.
태경은 즉각 ‘영혼의 안 개방 단계’를 1단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왼쪽 눈이 푸른 심연의 광휘를 발하며 채원의 단전 뒤편, 기해혈과 명문혈의 흐름이 완전히 뒤틀려 찢어지기 일보 직전임을 정밀하게 포착했다.
그는 소매 속에서 마력 동조 은침을 꺼내 들었다. 무형 기맥 조율술을 전개하여 그녀의 기맥 폭주를 강제로 차단하려 한 것이다.
치이이익—!
그러나 채원의 감정적 폭주 에너지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뜨거웠다. 은침이 그녀의 피부에 닿기도 전에, 광폭한 붉은 열독에 의해 은침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태경의 붕대 감긴 손가락에 시커먼 화상을 입혔다.
실패였다. 일반적인 침술이나 미약한 내력으로는 이 거대한 마성의 폭풍을 잠재울 수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고대 정화의 한 장에 새겨진 금기 공법을 가동하는 것.
‘영혼 분할 동조식(靈魂 分割 同調式).’
태경은 붉은 가시들이 살을 찢고 들어오는 고통을 감내하며, 채원의 타오르는 신체를 품에 힘껏 껴안았다. 뜨거운 열풍이 그의 제복을 태우고 피부를 그슬렸지만, 그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채원아,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네 곁에는 내가 있으니까, 제발 정신 차려라.”
태경은 머릿속으로 영혼 분할 동조식의 난해한 구결을 외웠다. 그의 영혼 그릇이 열리며, 채원의 단전과 그의 단전을 잇는 보이지 않는 기맥의 다리가 강제로 연결되었다.
그것은 구원이자, 동시에 지옥의 시작이었다.
쿠우웅—!
채원의 단전을 찢어발기던 광폭한 붉은 열독과 장기 파열의 고통이, 동조식을 매개로 태경의 연약한 1성 육체로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으아아아악!”
태경의 입에서 뼛속까지 시려오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혈관마다 끓어오르는 쇳물을 들이부은 듯한 극통이 전신 기맥을 타고 흐르며 장기를 사정없이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영혼 그릇의 틈새가 삐걱거리며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심장 부근의 기맥이 타들어 가는 화상 통증이 극에 달했다.
“커헉……!”
태경은 참지 못하고 한 줌의 핏빛 선혈을 토해냈다. 붉은 피가 채원의 어깨와 옷자락을 붉게 적셨다.
하지만 태경은 품 안의 채원을 절대 놓지 않았다. 전신이 사르르 떨리고 의식이 하얗게 멀어지는 속에서도, 그는 떨리는 붕대 감긴 손으로 채원의 땀에 젖은 은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아픈 건 내가 다 가져갈 테니까…… 너는 울지 마라…….”
태경이 피를 토하며 자신을 대신해 장기가 끊어지는 아픔을 짊어지는 모습을 목격한 한채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늘 자신을 도구로만 보던 가문, 자신을 괴물이라 멸시하던 세상 속에서, 오직 이 한 남자만이 자신의 더러운 고통을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을 지배하던 깊은 어둠과 불신, 그리고 자멸적인 흑화의 불꽃이 태경의 헌신적인 사랑과 다정함 앞에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채원의 운명 정화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현재 85%!]
[붉은 마왕 각성도가 급감합니다! 현재 45%!]
채원의 단전을 옥죄던 붉은 폭풍이 기적적으로 가라앉으며 온화한 온기로 변해갔다. 그녀의 눈에서 붉은 마성이 걷히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려 태경의 뺨을 적셨다.
“오라버니…… 왜 나 같은 괴물 때문에 이렇게까지…… 으앙!”
채원은 굳게 닫혔던 마음을 완전히 열고 태경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소리 높여 우물지어 울었다. 그녀의 슬픔이 정화되는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그러나 채원의 폭주를 안정시킨 대가는 너무나도 혹독했다.
태경은 전신의 기맥이 타버린 듯한 탈진 상태에 빠지며 침상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의 호흡은 극도로 미약했고, 심장 부근의 기맥에는 영구히 지워지지 않을 파란 서리빛의 화상 흉터가 새겨지며 날카로운 통증이 박히기 시작했다. 우주의 인과율이 요동치며 다음 비극의 나비효과를 예고하는 불길한 통증이었다.
“태경 오라버니! 정신 차려보세요! 오라버니!”
채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태경을 붙잡고 흔들었지만, 태경의 의식은 하얗게 바래져 갔다.
멀어지는 의식 너머로, 별관 문밖에서 남궁현과 귀족 학생들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채원을 ‘마도의 괴물’로 고발하는 아카데미 퇴학 상소를 준비하라는 살벌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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