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대가와 흑화 방지 시스템
미간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는 따뜻한 정화의 온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연약한 내장과 뼈를 통째로 갈아엎는 피의 대가였다.
“으, 윽……!”
지하 망각의 서고 중심 제단. 신태경의 입술 사이로 밭은 신음과 함께 끈적한 선혈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미간에 닿은 ‘영혼 정화의 한 장’은 찬란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 빛이 품은 고대의 영력은 1성 입문경에 불과한 태경의 기맥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난폭했다.
마치 끓어오르는 쇳물을 얇은 진흙 그릇에 사정없이 부어 넣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마에서 시작된 고열이 미간을 찢고 들어가 뇌수를 직접 태우는 것처럼 뜨거웠다. 전신의 혈관이 터져 나갈 것처럼 팽창했고, 단전은 역류하는 기혈을 이기지 못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경고: 수신자의 영혼 그릇이 한계 용량을 초과했습니다.]
[기맥 융해 및 영혼 붕괴 위험도 상승 중! 영혼 융합 진행률 15%…….]
머릿속에서 만물 기록첩의 붉은 경고음이 이명처럼 울렸다. 의식이 하얗게 멀어지려 했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정화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사방으로 찢겨 먼지가 될 판이었다.
‘내력을…… 어떻게든 내력을 올려서 버텨야 해.’
태경은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품속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아까 지하 서고 구석의 낡은 상자에서 발견해 챙겨두었던 ‘백년 지하삼’이었다. 흙먼지가 뽀얗게 앉은 붉은 삼의 줄기를 꺼낸 태경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입에 밀어 넣고 씹었다.
쌉싸름하고 지독하게 매운 약즙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백 년의 세월 동안 지하의 영기를 빨아들인 영약답게, 순식간에 강력한 약력이 단전으로 휘몰아치며 메마른 기맥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독한 오판이었다.
화아아악!
“컥……! 쿨럭, 흑!”
단전에 가득 찬 지하삼의 날것 그대로의 영력은, 미간을 통해 침투하던 ‘영혼 정화의 한 장’의 신성한 마도 에너지와 공존하지 못했다. 두 기운은 태경의 단전을 전장 삼아 맹렬하게 충돌했다. 붉은 불꽃과 푸른 서리가 단전 내부에서 뒤엉켜 폭발하는 듯한 충격에, 태경은 코와 입으로 동시에 피를 뿜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경고: 이종(異種) 영력 간의 극렬한 충돌 발생!]
[단전 파열 위기! 영혼 그릇의 균열이 가속화됩니다!]
바닥을 짚은 태경의 양손이 바르르 떨렸다. 부러진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고, 한채민이 목에 남긴 손자국 흉터가 불덩이를 얹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왼팔의 화상 자국은 이미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재현하고 있었다.
완벽한 패배의 예감. 나약한 1성의 육체로는 이 위대한 태고의 기적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인과의 법칙이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아니,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태경은 진흙바닥을 손톱이 깨지도록 움켜쥐었다. 머릿속으로 전생의 마지막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괴물이라 불리며 세상의 칼날에 찢겨 죽어가던 한채원. 그녀의 붉은 눈물과 절규가 환청이 되어 귓가를 때렸다.
지금 자신이 여기서 쓰러지면, 별관 침대 위에서 앓고 있는 그 가녀린 소녀는 다시 한번 그 지옥 같은 운명의 궤도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세상이 정해놓은 비극의 희생양이 되어, 온 세상의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소멸할 것이다.
‘바꾸겠다고 맹세했어. 내 영혼이 부서지더라도, 그녀들을 그 비참한 결말에서 건져내겠다고……!’
태경은 차가운 이성을 극한으로 쥐어짜냈다. 육체적인 힘으로 이 거대한 정화의 영력을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인과율의 눈을 속이고, 이 성물에 합당한 ‘제물’을 바쳐 타협하는 것.
그는 자신의 영혼 그릇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미간으로 밀려드는 푸른 정화의 에너지를 향해 자신의 신체 감각 일부를 기꺼이 공여하겠다는 영적 의사를 전달했다.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과 감각을 제단에 바쳐 영혼 그릇의 틈새를 메우는 처절한 선택이었다.
‘가져가라. 내 눈이든, 수명이든…… 무엇이든 좋으니 이 정화의 힘을 내 영혼에 고정시켜라!’
그의 이타적인 결단에 공명하듯, 미간의 푸른 페이지가 찬란하게 요동쳤다.
치이이익—!
“아아아아악!”
태경의 입에서 마침내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측 안구 내부의 신경이 통째로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뇌리를 관통했다. 오른쪽 시야가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버릴 듯 하얀 광휘로 가득 차더니, 이내 서서히 빛이 바래며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게 가라앉았다.
우측 시력의 영구적인 저하.
정화의 한 장을 온전히 수용하기 위해, 태경이 우주의 인과율에 지불한 혹독한 육체적 대가였다. 오른쪽 눈의 초점이 완전히 흐려진 순간, 거짓말처럼 단전을 찢어발기던 고열과 충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백년 지하삼의 붉은 영력은 정화의 푸른 빛에 녹아들어 온화한 백색의 내력으로 정제되었고, 찢어질 것 같던 단전의 균열을 부드럽게 메우며 안착했다.
스으으으—.
미간에 박혀 있던 정화의 한 장이 완전히 빛으로 분해되어 태경의 영혼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정적이 찾아온 지하 서고. 태경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단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온몸이 땀과 피로 젖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왼쪽 눈앞에는, 흐릿한 오른쪽 시야와 대비되는 선명한 푸른빛의 인터페이스가 반투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영혼 정화의 한 장 융합 완료.]
[고유 권능: '흑화 방지 시스템 가이드'가 공식 기동됩니다.]
[시스템 가이드가 체내의 불안정한 마력 흐름을 재조율하여 단전 붕괴를 방지했습니다.]
“하아…… 하아…… 성공, 했군.”
태경은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우측 시야는 절반 이상이 하얗게 흐려져 사물의 형체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왼쪽 눈에 비치는 푸른 시스템 창은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미래를 바꿀 진짜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하 계단을 기어오르듯 올라갔다. 부러진 손가락의 통증과 전신의 탈진감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별관에 홀로 누워 있을 채원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일념이 그를 움직였다.
쿠구구구—.
책장을 밀어내고 제3 도서관 별관의 차가운 정적 속으로 복귀한 태경은, 먼지 쌓인 바닥을 짚으며 간이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채원이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태경은 심호흡을 하며 새로 각성한 시스템 가이드를 향해 채원의 상태창을 요청했다. 왼쪽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미세하게 발광하며, 채원의 머리 위에 반투명한 정보창이 띄워졌다.
[대상: 한채원 (18세) - 첫 번째 타락 예정자]
[운명 정화도: 12%]
[붉은 마왕 각성도: 71% (상승 중!)]
[현재 상태: 가문 비공법 '붉은 마수 제어결'의 원격 공명 주술 작동 중. 단전 내부의 붉은 마력이 강제로 압박받아 기맥 역류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경고: 대상의 '붉은 마왕 각성도'가 폭주 임계점인 80%에 도달할 시, 기맥이 완전히 파열되며 자멸적인 대폭주가 시작됩니다. 예상 도달 시간: 12시간 이내.]
“뭐라고……?”
태경의 왼쪽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각성도가 벌써 71%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채원의 가녀린 이마에 돋아난 핏줄이 불길한 보랏빛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단전 부근에서는 미세하지만 뼈를 태울 듯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림가문의 가주 한태오와 집행 장로들이 아카데미 외부에서 가문의 비공법인 ‘붉은 마수 제어결’의 닻을 흔들어 대며, 채원의 단전에 갇힌 마력을 강제로 뽑아내려 원격 주술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채원의 몸을 도구 삼아 영혼을 쥐어짜내려는 가문의 비열한 음모가 벌써 시작된 것이다.
“으윽…… 아, 아파…… 주, 죽여줘…….”
채원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처절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작은 손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툇마루 침대의 이불깃을 찢어발길 듯 움켜쥐었다. 단전이 강제로 쥐어짜이는 영혼의 통증은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태경은 황급히 채원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채원의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지독한 열독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시스템 가이드 제안: 한채원의 각성도 급증을 억제하기 위해, 아카데미 흑림(黑林) 깊은 곳에 자생하는 희귀 약초 '심령안정초(心靈安定草)'가 필요합니다.]
[심령안정초를 정제하여 복용시킬 시, 가문의 원격 주술 공명을 차단하고 각성도를 안전선 이하로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심령안정초…….”
태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약초가 어디에 있는지는 회귀 전의 기억으로도 잘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동쪽 장벽 너머에 존재하는 금지된 구역, 강력한 마수들과 음독한 안개가 지배하는 ‘아카데미 흑림’의 절벽 틈새였다.
그곳은 일반적인 아카데미 학생들도 3성 이상의 무공을 익히기 전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 위험지였다. 하물며 지금의 태경은 단전이 반쯤 손상되고 우측 시력마저 흐려진 1성의 나약한 사서에 불과했다.
하지만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채원의 숨결이 점차 거칠어지며, 각성도 수치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붉은 마왕 각성도: 72%]
“태경…… 형, 님……?”
고통 속에서 채원이 희미하게 눈을 뜨며 태경을 바라보았다. 흐려진 그녀의 붉은 눈동자 속에, 온몸이 피와 땀으로 젖은 채 오른쪽 눈을 찡그리고 있는 태경의 처절한 모습이 비쳤다.
“나 때문에…… 또…….”
채원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려 태경의 손등에 떨어졌다. 자신 같은 괴물을 구하기 위해 온몸이 망가지면서도 곁을 지키고 있는 태경을 보며,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함께 그를 향한 광적인 집착의 불꽃이 소리 없이 타올랐다.
태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젖은 앞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채원아. 내가 반드시 널 살릴 테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릿한 오른쪽 시야를 무시한 채, 왼손으로 소매 속의 침통을 단단히 쥐었다.
채원의 붉은 마왕 각성도가 폭주 임계점인 80%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치닫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아카데미 흑림으로 침투해 억제용 약초를 구해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별관은 사흘이 채 되기도 전에 붉은 피빛 폭풍 속에서 영원히 소멸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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