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서고, 기적의 한 장
어둠이 내려앉은 천성아카데미 제3 도서관 별관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신태경은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바닥에 놓인 낡고 묵직한 황동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임노인이 툭 던져주고 간 ‘망각의 열쇠’였다. 손때와 녹이 슬어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열쇠는 기이할 정도로 차가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윽…….”
태경은 마른침을 삼키며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한채민에게 멱살을 잡혔던 부위가 붉고 푸르게 피멍이 들어 만질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뇌리를 찔렀다. 왼팔에 새겨진 화상 흉터 역시 채원의 폭주했던 열기를 증명하듯 아릿하게 타올랐다.
1성 입문경의 미약한 육체는 작은 충격에도 이토록 비명을 질러댄다. 전생의 비극을 기억하는 회귀자라 할지라도,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무력이 최하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지독한 현실이었다.
태경은 고개를 돌려 책장 뒤편을 바라보았다. ‘사서의 은신처’ 결계가 은은하게 작동하는 간이침대 위에서, 한채원은 깊은 혼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과 불규칙한 숨소리가 별관의 정적을 깨뜨렸다. 만물 기록첩이 보여주는 그녀의 마왕 각성도는 여전히 60% 선에서 위태롭게 요동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날이 밝으면 한채민과 규율부가 들이닥칠 것이다. 그전에 채원의 단전에 박힌 가문의 주술 닻을 끊어낼 비책을 찾아야 해.’
태경은 결연한 눈빛으로 황동 열쇠를 움켜쥐었다. 그는 낡은 사서 제복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별관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철제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기억 속 아카데미의 숨겨진 구조와 임노인의 조언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태경은 책장 하단의 특정 목조 문양을 힘주어 눌렀다.
쿠구구구—.
무거운 책장이 먼지를 뿜어내며 느리게 옆으로 밀려나자, 바닥에 숨겨져 있던 좁고 어두운 지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 아래에서는 수백 년 동안 갇혀 있던 stagnant한 마도적 한기와 퀴퀴한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태경은 망설임 없이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별관의 온기가 멀어지고, 뼛속까지 시려오는 음산한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계단의 끝에 도달하자, 거대한 쇠사슬로 칭칭 감긴 청동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문 표면에는 침입자의 정신을 파괴하는 고대 봉인 주술 부적들이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기혈이 뒤틀릴 금역의 장벽이었다.
태경은 떨리는 손으로 ‘망각의 열쇠’를 청동 문의 거대한 열쇠구멍에 밀어 넣었다.
철컥. 스으으으—.
기이한 마찰음과 함께 쇠사슬이 스스로 풀려나갔고, 청동 문이 무겁게 열렸다. 문 너머로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지옥의 서고였다.
‘망각의 서고(忘却之書庫).’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지하 공동벽을 따라 수만 권의 금서와 썩어가는 스크롤들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허공에는 자색과 흑색이 뒤섞인 기이한 안개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과거 정파의 탄압을 받아 이곳에 갇혀 미쳐버린 고대 마도사들의 영혼이 뿜어내는 ‘정신 오염 장벽’이었다.
“아아아아…….”
“왜 우리를 가두었는가…… 정파의 위선자들아…….”
귀를 찢는 듯한 환청과 원혼들의 비명이 태경의 뇌리를 직접 강타했다. 만성 두통이 폭발하듯 심해지며 태경의 눈앞이 일순간 흐려졌다. 원혼들의 원망과 살의가 그의 연약한 기맥을 타고 들어가 정신을 오염시키려 환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눈앞에 전생의 끔찍한 종말이 환영으로 나타났다. 네 명의 악녀들이 마왕으로 각성해 세상을 불태우고, 자신 역시 가문들과 성국의 칼날에 몸이 찢겨 소멸해가던 그 참혹한 밤의 기억.
“윽! 으아악!”
태경은 머리를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1성의 미약한 내력으로는 이 거대한 정신적 오염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영혼이 통째로 갉아먹히는 듯한 공포가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정신 차려라, 신태경. 이건 환각일 뿐이다. 미래는 아직 바뀌지 않았어.’
그는 혀를 깨물었다. 입안 가득 쇠 비린내가 퍼지며 흐려지던 의식이 번쩍 돌아왔다. 태경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영혼의 안’을 극대화하여 개방했다.
우웅—!
그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의 청색 빛을 발하자, 자색 안개 속을 채우고 있던 환각의 왜곡이 걷히고 진짜 마력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혼들의 오염 기류는 거대한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기이하게도 아무런 기운도 흐르지 않는 미세한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태경은 임노인에게 배웠던 회피 보법, ‘유운환영보’의 구결을 되새겼다.
‘바람처럼 흐르고, 구름처럼 실체를 흐트러뜨린다.’
태경은 몸을 기이한 각도로 꺾으며 자색 안개의 그물망 사이사이를 미끄러지듯 걸어 나갔다. 원혼들의 손길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며 차가운 한기를 남겼지만, 단 한 번도 그의 기맥 중심을 타격하지 못했다. 오직 영혼의 안이 보여주는 최적의 경로만을 밟으며, 태경은 서고 중앙의 고대 제단을 향해 전진했다.
마침내 자색 안개를 뚫고 도달한 서고의 중심부.
그곳에는 반쯤 부서진 푸른 빛의 고대 석판이 놓여 있었고, 그 위 허공에 찢어진 책의 한 페이지가 찬란한 영적 광휘를 내뿜으며 둥둥 떠 있었다.
‘영혼 정화의 한 장(靈魂淨化之一頁).’
그것은 사악한 마성과 탁기를 순수한 영력으로 되돌려놓는 태고의 비법이었다. 페이지 표면에 새겨진 고대 마도 문자들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태경이 홀린 듯 손을 뻗어 그 한 장을 만지려던 찰나였다.
화아아악—!
석판 주변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수천 마리의 푸른 광 나비 형상으로 흩어졌다. 나비들은 허공에서 뭉치며 하나의 거대한 영체 사념을 형성했다. 그것은 서고의 오랜 수호자이자, 비법의 영혼 그 자체인 ‘정화의 서판 의지’였다.
[미천한 필멸자여, 감히 고대의 성역에 발을 들이고 정화의 비법을 탐하는가.]
지하 공동 전체를 뒤흔드는 웅장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태경의 영혼에 직접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서판의 의지가 태경의 자격을 시험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영압(靈壓)을 사방으로 방출했다.
쿠우우웅—!
공기가 고체처럼 굳어지며 태경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단숨에 바위산이 내려앉는 듯한 중압감에 태경의 무릎이 바닥의 돌판을 깨뜨리며 꺾였다.
“크윽……!”
태경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양손바닥을 짚었다. 1성에 불과한 그의 단전이 거대한 영압에 짓눌려 종이처럼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체내의 기혈이 미친 듯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네 영혼의 그릇은 한없이 작고 나약하구나. 이토록 미미한 내력으로 정화의 한 장을 품으려 하다니, 그 즉시 영혼이 타버려 먼지가 될 뿐이다. 물러서라. 그렇지 않으면 소멸하리라.]
서판의 의지가 방출하는 푸른 영압이 더욱 거세졌다. 태경의 전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목덜미의 피멍 흉터가 터져 나가듯 쓰라렸고, 왼팔의 화상 자국에서는 다시금 불길이 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태경은 단전에 남아 있는 한 줌의 내력을 쥐어짜 영압을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의 1성 내력은 거대한 해일 앞의 모래성처럼 단숨에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컥……!”
태경의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바닥의 차가운 돌판 위로 그의 피가 붉게 번져갔다. 의식이 급격히 멀어지며, 당장이라도 영혼이 바스라질 것 같은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하지만 태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억지로 고개를 들어 허공의 푸른 나비 무리를 노려보았다.
“내가…… 물러설 것 같으냐…….”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미약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서판의 의지조차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굳건했다.
“이 힘이 없으면…… 그 아이는 괴물로 각성해 비참하게 죽는다. 세상을 파멸시킬 악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온 세상의 적으로 몰려 찢겨 죽는단 말이다!”
태경은 부러진 손가락 끝으로 바닥을 움켜쥐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녀들을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세상이 그녀들을 버린다면, 내가 세상의 질서를 부수고서라도 그녀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주겠다고……!”
그것은 이기적인 탐욕도, 강해지겠다는 맹목적인 권력욕도 아니었다. 오직 상처받은 한 소녀를 구원하고, 나아가 세상을 파멸의 운명으로부터 바꾸겠다는 한없이 다정하고 헌신적인 영혼의 포효였다.
웅웅웅—!
그 순간, 태경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이타적인 구원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그의 가슴팍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하고 따뜻한 영혼의 광휘가 주변의 차가운 푸른 영압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석판 바닥에 흘러내린 태경의 붉은 피가 정화의 서판 문양을 타고 흐르며 은은한 붉은빛을 발했다. 정화의 서판 의지는 태경이 내뿜는 영혼의 빛깔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것은 추악한 욕망으로 가득 찬 무인들의 검은 영혼과 달리,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소멸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지극히 맑고 따뜻한 빛이었다.
[……기이하구나. 무력은 벌레보다 약한 자가, 어찌 이토록 거대하고 따뜻한 영혼의 그릇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정화의 본질은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닌, 상처를 품어 안는 치유인 것을.]
서판의 의지가 내뿜던 짓눌리는 듯한 거대한 영압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허공을 맴돌던 푸른 나비 무리가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태경의 주변을 감싸 안았다. 나비들이 그의 찢어진 상처와 목덜미의 피멍을 어루만질 때마다, 극심했던 통증이 가라앉고 시원한 영기가 체내로 스며들었다.
[네 자격을 인정하노라. 세상을 구원하려는 다정한 도전자여. 기적의 한 장을 네 영혼에 새겨주마.]
스으으으—.
허공에 떠 있던 ‘영혼 정화의 한 장’이 부드럽게 하강했다. 찬란한 푸른 광휘를 발산하는 고대의 한 페이지는 태경의 미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태경은 안도감에 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만물 기록첩의 경고 문구가 머릿속에서 경보음과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경고: 영혼 정화의 한 장 융합 단계 진입.]
[주의: 수신자의 무공 경지가 너무 낮아 융합 과정에서 극심한 육체적 역반응 및 신체 파열 위험이 감지됩니다. 버텨내야 합니다.]
“윽……!”
정화의 한 장이 태경의 미간에 닿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태고의 마도 에너지가 그의 연약한 기맥을 타고 폭포수처럼 밀려들어 왔다. 온몸의 혈관이 끓는 기름을 부은 듯 타들어 가기 시작했고, 뼈마디가 얼어붙는 듯한 극단적인 열독과 한기가 교차했다.
의식이 하얗게 멀어지려 했다. 1성의 육체가 이 거대한 기적의 대가를 버텨내기 위한 처절한 사투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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