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당가의 집착, 독과 열의 조화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뺨을 찢을 듯이 불어오는 북해의 대설원.
신태경은 성기사 론이 남기고 간 은빛 인장을 품속 깊이 밀어 넣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에 새겨진 대형 화상 흉터가 혹한의 한기에 노출될 때마다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가슴팍의 검은 그을림 화상 자국 역시 욱신거리며 그의 연약한 기맥을 압박했다.
설상가상으로, 론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가시넝쿨에 찢겼던 왼손 바닥의 붕대 틈새로 다시금 붉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른손 검지는 단단한 나무 부목에 묶여 있어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우측 시야는 하얗게 흐려져 있었고, 좌측 시야마저 왜곡되어 초점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만신창이의 상태.
입문경 1성이라는 초라한 무력으로 버텨내기에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육체였다.
“오라버니, 제발 조금만 쉬어 가요. 왼손의 상처가 다시 터졌잖아요…….”
한채원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태경의 허리를 꼭 움켜쥐었다. 그녀의 단전에서 피어오른 장미빛 신성 불꽃이 태경의 전신을 감싸 안았지만, 태경의 단전이 완전히 비어 있는 탓에 외부의 온기는 기맥에 침투하지 못하고 겉돌 뿐이었다.
“괜찮다, 채원아. 북해빙궁이 머지않았어. 여기서 멈추면 내 심장의 한기가…….”
태경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슈우우우—!
백색의 눈보라를 뚫고, 기괴한 보랏빛 파공음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수십 개의 가느다란 보라색 은침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흩어지며 태경과 채원의 사각지대를 완벽히 조여왔다.
“주군, 위험합니다!”
마차 전방에서 경비를 서던 정찬우가 현철 장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침들을 쳐내려 했으나, 침들의 궤적이 기이하게 휘어지며 아슬아슬하게 검날을 피했다. 사천당가 특유의 암기 투척술, 천녀산화(天女散花)였다.
“물러서라, 찬우!”
태경의 나지막한 경고와 동시에, 채원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실체화된 붉은 가시 채찍이 허공을 원형으로 휘감으며 태경의 전방을 철저히 차단했다.
깡! 까강!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수십 개의 보라색 만독침(萬毒침)이 채찍의 장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채찍에 깃든 신성 불꽃의 열기에 닿는 순간, 침 끝에 발려 있던 끈적한 독액이 기화되며 사방으로 보랏빛 안개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아하하!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그 불꽃, 단순한 정파의 내공이 아니네? 신성과 마성이 기이하게 뒤섞인 독특한 열독(熱毒)이야! 정말 아름답고 탐스러워!”
보랏빛 독 안개 너머에서 은방울 구르는 듯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보라색 무복을 펄럭이는 가녀린 체구의 소녀였다. 허리춤에는 은빛 암기 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고양이 같은 눈매에 잔인하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은 소녀. 사천당가의 방계이자 독과 암기의 광적인 천재, 당소혜였다.
소혜는 핏빛으로 빛나는 채원의 불꽃 채찍을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그 불꽃의 성분을 분석할 수만 있다면, 내 만독경의 경지를 한 단계 더 올릴 수 있을 텐데……. 저기, 아가씨? 나한테 단전을 순순히 넘겨주지 않을래? 아프지 않게 아주 예쁘게 해부해 줄게!”
소혜의 도덕 관념이 완전히 결여된 엽기적인 제안에 채원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사나운 살기로 물들었다.
“감히 오라버니의 앞길을 가로막고 나를 해부하겠다고 속삭여? 그 주둥이부터 찢어발겨 주마!”
채원의 전신에서 붉은 폭풍의 기세가 치솟았다. 마왕 각성도는 0%로 정화되었으나, 태경을 해치려는 자들을 향한 그녀의 집착과 살의는 오히려 신성 불꽃의 힘을 빌려 더욱 광포하게 타올랐다.
“채원아, 흥분하지 마라! 정면으로 맞서면 독기가 더 빠르게 퍼진다!”
태경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기화된 보랏빛 안개는 이미 그들의 주변을 촘촘히 에워싸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달콤하면서도 비릿한 향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신경을 마비시키고 기맥을 굳게 만드는 사천당가의 비전 신경독이었다.
‘만물 독 도해(萬物毒圖解)의 구결에 따르면…… 이 독은 흡입하는 즉시 폐부의 기혈을 동결시키고 단전을 부식시킨다. 내력으로 막으려 하면 독기가 내력을 타고 단전 깊숙이 기생해 들어간다.’
태경은 흐릿한 양안의 시야를 억누르며 차가운 지략을 회전시켰다. 1성 입문경의 미약한 내력으로는 이 독기를 밀어낼 수 없었다. 실제로 그가 정화 대법의 기운을 아주 미세하게 끌어올리려 하자, 기맥에 기생하는 독기가 반응하며 단전이 뒤틀리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각혈이 터져 나왔.
“우욱……!”
“오라버니!”
채원이 비명을 지르며 채찍을 거두고 태경을 부축했다. 소혜는 그 모습을 보며 킥킥 웃었다.
“어라? 그 옆에 있는 사서 오빠는 무공이 겨우 입문경이네? 그런 몸으로 사천당가의 신경독을 들이마셨으니, 3분도 안 돼서 온몸이 마비되어 굳어버릴 거야.”
태경은 입가에 묻은 검붉은 피를 왼손 붕대로 거칠게 닦아냈다. 그의 뇌리는 고통 속에서도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독은 힘이 아닌 화학적 결합이다. 상쇄할 매개체만 있다면 무공 없이도 무력화할 수 있어.’
태경은 흐릿한 왼쪽 눈의 ‘영혼의 안’을 극대화하여 설원 바닥의 바위 틈새를 훑었다. 왜곡된 시야 너머로, 얼어붙은 바위 표면에 희미한 푸른빛의 영적 흐름이 비쳐 보였다.
‘눈꽃 이끼(雪花苔). 극지의 한기를 머금고 자라나 열독과 신경독의 활성화를 일시적으로 동결시키는 천연 상쇄제.’
태경은 붕대가 감긴 왼손을 뻗어 바위 틈새의 차가운 눈꽃 이끼를 한 움큼 긁어모았다. 상처가 재파열되어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끼의 차가운 영력과 뒤섞이며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그는 품속 깊은 곳의 비밀 안감으로 왼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촉감. 지난 결전에서 모두 소모한 줄 알았던 침통의 구석에, 대장장이 오씨가 비상용으로 심어두었던 단 세 개의 ‘마력 동조 은침(魔力同調銀針)’이 남아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태경은 오른손 검지의 부목 통증을 짓누르며, 오직 왼손의 감각만으로 세 개의 은침 끝에 눈꽃 이끼의 즙과 자신의 정화 피를 꼼꼼히 묻혔다. 양안 시야가 왜곡되어 정확한 혈자리를 잡기 힘들었지만, ‘영혼의 안’이 비추는 채원의 기맥 연결점은 선명한 붉은 실로 타오르고 있었다.
“채원아, 가만히 있거늘.”
태경은 왼손을 번개처럼 뻗어 채원의 인당혈(印堂穴)과 명문혈(命門穴)에 두 개의 은침을 정확히 꽂아 넣었다.
스으으으—!
은침에 묻은 눈꽃 이끼의 극지 한기와 태경의 정화 피가 채원의 체내로 흘러들어가 기화된 신경독의 독성을 급속도로 상쇄시키기 시작했다. 채원의 폐부를 짓누르던 보랏빛 독기가 하얗게 정화되어 입김으로 흘러나왔다.
“어……? 오라버니, 숨이 쉬어져요!”
채원이 경악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단전의 온기가 완벽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태경은 남은 한 개의 은침을 자신의 가슴팍, 기해혈(氣海穴)에 가차 없이 찔러 넣었다. 은침이 살점을 파고들자 단전을 옥죄던 마비 기운이 일시적으로 동결되며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1성의 연약한 육체에 독기가 이미 침투한 대가는 가혹했다.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극통과 함께 차가운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쿨럭……!”
“아니, 말도 안 돼……!”
소혜의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자신의 비전 독공이 한낱 1성의 사서가 길가에서 뜯은 잡초와 몇 개의 은침만으로 완벽하게 해체당한 것이다. 사천당가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굴욕이자 기적이었다.
“어떻게 내 신경독의 극성 배합을 그렇게 단숨에 분석한 거야? 게다가 침술로 독의 순환 기맥을 정확히 틀어막다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소혜의 눈빛이 흥분과 광적인 호기심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품속에서 기이한 연금술 문양이 새겨진 보라색 가스 구슬을 꺼내 들었다.
“좋아, 이건 어떨까? 남부 연금술 길드의 기술을 접목해서 만든 내 특제 독가스야! 공기 자체를 산성으로 바꿔서 뼈를 녹여버리지!”
소혜가 구슬을 바닥에 던지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황색의 짙은 독가스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와 결사대의 퇴로를 완벽히 포위했다. 가스가 닿는 설원의 눈들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검게 녹아내렸다. 가스의 팽창 속도가 너무 빨라 무형보로도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두리 장벽이었다.
‘산성 독가스는 상승 기류에 약하다. 공기를 급격히 가열시켜 하늘로 날려보내야 해.’
태경은 품속에서 차갑게 식어있던 ‘빙황의 화로(氷皇之火爐)’를 꺼내 들었다. 그의 단전은 텅 비어 있어 화로를 기동할 내력이 없었다. 태경은 채원의 손을 꽉 잡았다. 상처가 터진 왼손 바닥의 피가 채원의 따뜻한 손바닥에 묻어났다.
“채원아, 네 신성 불꽃을 이 화로의 주둥이에 집중시켜라! 온 힘을 다해!”
“네, 오라버니!”
채원이 태경의 지시에 따라 단전의 모든 영력을 끌어올려 화로 입구에 장미빛 불꽃을 주입했다.
화아아악—!
화로 표면의 고대 빙궁 각인들이 채원의 강력한 신성 불꽃과 반응하며 미친 듯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화로 내부의 고대 정화 장치가 가동되며, 뿜어져 나오던 차가운 한기가 한순간에 폭발적인 온기의 기류로 치환되어 하늘을 향해 거대한 불꽃 기둥으로 솟구쳤다.
화아아앙!
솟구친 불꽃 기둥이 강력한 상승 기류를 형성하며 주변의 황색 독가스를 통째로 공중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공중에서 신성 불꽃의 열기에 닿은 독 가스는 산성을 잃고 무해한 수증기가 되어 백색의 안개로 흩어졌다.
설원에 다시 한번 차갑고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사방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혜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필살의 독공들이, 평민 사서에 불과한 소년의 손짓 몇 번과 기묘한 은침술, 그리고 조그만 화로의 기믹에 의해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채원을 향했던 살육과 해부의 광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태경을 향한 미칠 듯한 학문적 경외감과 광적인 소유욕이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소혜가 비틀거리며 태경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비정상적인 집착의 빛으로 번뜩였다.
“저기, 사서 오빠. 나 결심했어. 저 아가씨는 이제 아무래도 좋아. 저 불꽃보다…… 오빠의 그 머릿속이 백 배는 더 탐나. 어떻게 그런 약리 배합을 알고 있는 거야? 사천당가에서도 모르는 고대의 독 해법을 어떻게 아는 거냐고!”
소혜는 자신의 은색 암기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침을 삼켰다.
“오빠를 내 개인 실험실에 가둬두고, 매일매일 침술의 비밀과 의학 지식을 전부 짜내고 싶어. 내 모든 독을 오빠의 몸에 주입하면서 어떻게 해독하는지 평생 관찰할 거야. 아하하! 생각만 해도 너무 짜릿해!”
소혜의 뒤틀린 집착 선언에 채원이 채찍을 움켜쥐며 이빨을 갈았다. 당장이라도 저 미친 년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하지만 소혜는 날랜 신법을 전개하며 보라색 안개 속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 줄게. 하지만 조심해, 오빠. 나 사천당가의 방계 당소혜야. 한 번 찍은 사냥감은 절대로 놓치지 않으니까. 북해빙궁으로 가는 내내 오빠의 뒤를 밟으며 기회를 노릴 거야. 언제 어디서 내 독침이 오빠의 목덜미를 찌를지 기대해 줘!”
소혜는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남긴 채, 눈보라 속으로 소리 없이 녹아들듯 사라졌다.
적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태경은 참아왔던 각혈을 다시 한번 쏟아내며 무릎을 꿇었다.
“우욱…… 콜록!”
사천당가의 신경독을 일시적으로 들이마신 대가는 가혹했다. 은침으로 기맥을 묶어두었으나, 이미 기혈 깊숙이 침투한 독소의 여파로 인해 향후 일주일 동안은 극심한 기침과 피를 토하는 신체적 중독 피해를 감당해야 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제발……!”
채원이 울부짖으며 쓰러지는 태경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그녀의 손끝에 묻은 태경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설원의 눈빛 위로 붉게 번져나갔다.
채원의 장미빛 눈동자는 자신 때문에 또다시 만신창이가 된 태경의 모습을 보며, 이 세상을 통째로 불태워버려서라도 그를 영원히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 지키겠다는 어둡고 광적인 집착의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눈보라가 다시금 매섭게 몰아치는 황량한 설원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소혜의 서늘한 시선이 어둠 속에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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