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그림자, 갈라진 대지
쿠구구구구—!
발밑의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쩍쩍 갈라졌다. 북해의 초입, 끝없는 설산의 절벽 지대가 거대한 거인의 손길에 찢기듯 두 동강 나기 시작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인과율 왜곡 수치가 임계점을 돌파하며 우주가 보내는 경고, '대지의 상처'가 현실로 화한 대재앙이었다.
갈라진 심연의 틈새 너머로, 피처럼 붉은 인과의 안개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 안개는 차가운 눈바람과 뒤엉키며 기이하고 불길한 붉은 안개를 형성했다.
"오라버니!"
한채원이 비명을 지르며 신태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 안은 장미빛 신성 불꽃이 사방으로 번지는 붉은 안개를 밀쳐냈지만, 대지의 붕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태경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정화의 한 장을 흡수한 대가로 우측 시력은 하얗게 먼지 낀 것처럼 멀어버렸고, 방금 전 서리 거인의 사념과 부딪힌 탓에 겨우 살아남은 왼쪽 눈마저 초점이 어지럽게 왜곡되어 있었다. 게다가 한무진의 강기 반동으로 파열된 오른손 검지는 단단한 나무 부목에 묶여 있어 가벼운 떨림조차 통증을 유발했다. 등 뒤의 화상 흉터는 칼날로 긋는 듯 타올랐다.
"론 경!"
태경의 시선이 절벽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태경을 이단이라 규정하며 성광의 장벽을 펼치던 성기사 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뇌물 장부를 손에 쥔 채, 신앙심이 송두리째 무너진 충격으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발밑, 절벽의 가장자리가 통째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으으으— 콰아아앙!
"단장님! 피하십시오!"
성기사단원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론이 디디고 있던 거대한 얼음 바위가 균열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기울어졌다. 론의 거구와 그를 감싼 무거운 은빛 갑옷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붉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심연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금 저자가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태경의 머릿속에 회귀 전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성기사 론. 그는 성국의 위선에 이용당해 결국 파멸할 운명이었으나, 그의 본성은 올곧은 무인이었다. 무엇보다 향후 3단계에서 구원해야 할 성녀 연지우의 비극적 운명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성국 내부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이 강직한 성기사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여기서 그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태경은 주저 없이 발을 내디뎠다.
"오라버니! 안 돼요! 몸도 성치 않으시면서!"
채원이 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도포 자락을 잡으려 했으나, 태경의 신형은 이미 설원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스으으—!
임노인에게 배운 극의의 신법, '무형보(無影步)'.
발소리도, 바람의 저항도 내지 않는 기이한 보법이 붕괴하는 대지 위에서 펼쳐졌다. 태경은 흐릿한 왼쪽 눈으로 무너져 내리는 돌덩이들의 궤적을 읽었다. 양안의 시력이 왜곡되어 거리감이 엉망이었지만, '영혼의 안'이 비추는 영혼의 기맥 흐름이 그 사각지대를 메워주었다.
태경은 찰나의 순간마다 무너지는 얼음 기둥을 딛고 허공을 도약했다. 부러진 손가락과 등에 새겨진 화상 흉터가 비명을 질렀지만, 이빨이 깨질 정도로 악물며 고통을 짓눌렀다.
"론!"
태경이 절벽 가장자리에 몸을 던지며 왼손을 뻗었다.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론의 눈동자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만신창이의 몸으로 허공에 상체를 내민 평민 소년의 모습이 담겼다. 그 왜곡된 시야 속에서도 소년의 왼쪽 눈은 흔들림 없는 다정함과 단호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콰직!
태경의 왼손이 론의 은빛 갑옷 손목을 잡아챘다.
"으윽……!"
무거운 철갑을 두른 거한의 무게가 고스란히 태경의 왼팔과 어깨 기맥으로 쏟아져 내렸다. 왼손 바닥은 가시넝쿨에 찢겨 겨우 붕대로 감싸둔 상태였다. 압도적인 인장력에 붕대 틈새로 붉은 피가 순식간에 배어 나오며 절벽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팔꿈치 관절이 빠질 듯한 극통이 밀려왔고, 등 뒤의 화상 흉터가 다시금 찢어지는 듯 뜨겁게 타올랐다.
"이…… 미련한 자가…… 어찌하여……!"
론이 허공에 매달린 채 경악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신은 방금 전까지 이 소년을 사악한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려 했던 적이었다. 그런데 왜 목숨을 걸고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인가.
"입 다물고…… 꽉 잡기나 하십시오!"
태경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오른손 검지는 부목에 묶여 쓸 수 없었기에, 오직 왼손 하나의 힘으로 일류 극성 무인의 무게를 버텨내야 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태경의 귓가를 맴돌았다.
"오라버니! 비켜서세요! 제가 끌어올리겠어요!"
뒤따라온 채원이 붉은 눈물을 흘리며 태경의 허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단전에서 피어오른 장미빛 신성 불꽃이 태경의 전신을 감싸 안으며 힘을 보탰다. 채원의 정화된 무력이 더해지자, 태경의 왼팔에 걸리던 살인적인 무게가 일순간 가벼워졌다.
"하아아압!"
찬우 역시 무너지는 돌더미를 장검으로 쳐내며 가세했다. 그들의 연합된 힘으로, 마침내 론의 거구가 절벽 위 단단한 지면 위로 거칠게 끌어올려졌다.
쿠구구…… 쿵!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밭 위로 쓰러졌다. 대지의 상처는 론을 구출해 낸 직후, 거짓말처럼 진동을 멈추고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붉은 인과의 안개도 바람에 흩날리며 가라앉았다.
사방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론은 눈밭에 누워 헐떡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손에는 여전히 남궁민 학장의 추악한 비리가 적힌 뇌물 장부가 꽉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자신을 구하느라 왼손 붕대가 온통 피로 물든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태경이 있었다.
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을 지배하던 광신적인 안광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거대한 정신적 충격과 깊은 자책감만이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었다.
"……왜 나를 구했나."
론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대들을 사냥하려 했던 사냥개다. 성국의 이름으로 너희를 멸하려 했던 적이란 말이다."
태경은 채원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흐릿한 왼쪽 눈으로 론을 바라보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론 경. 당신은 성국의 위선에 눈이 멀었을 뿐, 본성은 올곧은 무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단지 세상의 부조리한 천명이 정해놓은 비극을 바꾸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처럼 의로운 무인이 위선자들의 도구로 쓰이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 또한, 내가 바꾸고자 하는 비극 중 하나이니까요."
"천명이 정한 비극……."
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태경이 폭로한 성국의 추악한 민낯과, 방금 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진 소년의 다정함이 교차했다.
진정한 사악함은 누구인가.
신의 이름을 빌려 평민 학생들을 납치해 생체 실험을 자행한 교황청인가, 아니면 상처받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온몸을 내던진 이 나약한 사서 소년인가.
답은 이미 론의 마음속에 명확히 내려져 있었다. 그의 굳건했던 신앙심은 이제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론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태경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졌다. 무력이 아닌, 그대의 대의와 다정함에 내 신념이 완전히 패배했군."
론은 품속에서 성기사의 신분을 증명하는 은빛 인장을 꺼내 태경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성국은 더 이상 그대들을 이단으로 쫓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끄는 수사대는 그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에게 진 생명의 빚을 갚기 위해, 한 가지 극비 정보를 건네지."
론의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교황 요한 3세는 지상의 마력을 제어하고 천명을 완성하기 위해 '허무의 서판'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서판을 채울 네 번째 그릇으로…… 성역의 성녀 연지우를 제물로 삼을 계획을 이미 마쳤다. 아카데미 지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성국의 지하 제단에서 영혼 추출 의식이 거행될 것이다."
태경의 왼쪽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성국의 성녀 제물 계획. 그것은 3단계에서 마주할 연지우의 비극적 운명의 핵심 실타래였다. 론이 건넨 이 정보는 향후 성국에 침투할 때 결정적인 나침반이 될 터였다.
"이 정보를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태경이 묻자, 론은 씁쓸하게 웃었다.
"성국의 위선을 밝히고, 그 가녀린 성녀를 나와 같은 비극에서 구해달라는 이기적인 부탁이네. 그대라면…… 천명이 정한 잔혹한 궤도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기사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더 이상 결사대를 향해 검을 겨누지 않았다. 론은 마지막으로 태경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인 뒤, 설원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디 살아남게, 신태경. 언젠가 성국의 성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네."
은빛 갑옷의 무리들이 눈보라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갈 때, 대지에는 차가운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태경은 론이 남긴 은빛 인장과 정보를 가슴 깊이 새기며, 품속의 만물 기록첩을 소중히 여몄다. 비록 온몸이 만신창이였고 심장의 서리 통증이 간헐적으로 밀려왔지만, 그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옆에서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채원의 손을 꼭 잡았다.
"가자, 채원아. 북해빙궁이 머지않았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혹한의 바람 속에서도, 두 사람의 온기는 서로를 향해 굳건하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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