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서리 사념의 시험
채원의 품에 안겨 가쁜 숨을 가라앉히던 태경은, 동굴 안쪽 깊은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영적 파동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채원이 끓여준 특제 한방 보혈탕 덕분에 빙정 동사 위험도는 22%까지 떨어지며 안정을 찾았으나, 온몸의 감각은 여전히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흐릿한 왼쪽 눈을 가늘게 뜨자,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서 푸른빛의 미세한 입자들이 나비처럼 일렁이며 허공을 부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평범한 냉기가 아니었다. 태경의 단전 깊은 곳에 깃든 ‘영혼 정화의 한 장’이 그 푸른 입자들과 공명하듯 찌르르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태경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채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태경을 잃을 뻔했다는 공포와, 그를 영원히 제 품안에 가두어 지키고 싶다는 집착의 광휘가 끈적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태경은 부목을 댄 오른손 검지의 통증을 누르며, 왼손으로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동굴 안쪽에 무언가가 있다. 채원아, 나를 좀 부축해 주겠니.”
“안 돼요!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움직이시면 안 돼요. 제가 다녀올게요.”
채원이 다급하게 태경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말렸다.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거역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 단전에 깃든 정화의 한 장이 저 기운을 부르고 있어. 내가 직접 가야만 한다. 나를 믿어다오, 채원아.”
태경의 다정한 눈빛에 채원은 결국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태경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부축했다. 혹여 태경의 등 뒤에 새겨진 대형 화상 흉터에 닿아 아플까 봐 극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동굴 입구에서 장검을 쥔 채 경비를 서던 정찬우 역시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공기는 급격히 차가워졌다. 입김이 허옇게 얼어붙어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의 혹한이었다. 마침내 도달한 동굴의 가장 깊은 막다른 곳에는, 거대한 빙하 벽면 앞에 부서진 고대 서판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서판의 중심에서, 푸른빛의 서리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거대하고 웅장한 무기질적인 거인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경고: 고대 신격 사념 ‘서리 거인의 의지’가 강림합니다!]
[경고: 침입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정신 오염 장벽이 가동됩니다!]
숨이 막힐 듯한 압도적인 영압이 동굴 전체를 가득 채웠다. 동굴 바닥의 고드름들이 그 기세에 떨며 파르르 소리를 냈다. 거인의 푸른 안광이 태경의 미간을 향해 고정되었다.
“필멸자여…… 네놈의 빈약한 영혼 그릇 속에 어찌하여 태고의 정화 권능이 깃들어 있는 것이냐.”
거인의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태경의 뇌리를 직접 강타했다. 극심한 두통이 몰려오며 태경의 왼쪽 눈마저 흐릿해지려 했다.
“주군을 다치게 두지 않는다!”
정찬우가 포효하며 현철 장검을 휘둘러 전방을 막아섰고, 채원은 분노로 눈을 뒤집으며 손끝을 겨누었다.
“감히 오라버니를 위협해? 죽어!”
채원의 단전에서 장미빛 신성 불꽃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불꽃 채찍을 휘둘러 서리 거인의 몸통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콰아아앙!
그러나 실체가 없는 영체 사념인 거인에게 물리적인 불꽃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빗나간 채찍의 여파가 동굴 천장을 강타하여 거대한 고드름들과 바위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채원아, 멈춰라! 저 존재는 힘으로 벨 수 있는 실체가 없다!”
태경이 다급히 외치며 채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서리 거인의 사념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절대 영도의 푸른 안개가 태경의 전신을 휘감으며 그의 정신을 강제로 잠식해 들어갔.
“천명이 정해놓은 비극의 역사(天命)를 비틀어 첫 번째 그릇을 정화한 대가로, 우주의 인과율 왜곡 수치는 이미 임계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거인의 목소리와 함께 태경의 뇌리에 끔찍한 환각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북해빙궁의 깊은 심연, 얼음 감옥 속에 갇힌 채 온몸이 파랗게 얼어붙어 울부짖고 있는 은발의 소녀—백설아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단전에 박힌 천계의 쐐기가 폭주하며 내뿜는 원시 한기가 대륙 북쪽 전체를 하얗게 얼려 죽이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평민들이 동사하여 얼음 동상이 된 채 쓰러져 있는 참혹한 미래의 환영.
“만약 네놈이 북해빙궁의 두 번째 악녀마저 정화하려 든다면, 우주의 억제 기작이 발동하여 대륙 전체가 영원한 겨울 속에서 소멸할 것이다. 네놈의 나약한 영혼 그릇 또한 그 인과의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날 터. 그래도 나아가겠느냐.”
“아아윽……!”
태경은 머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영혼 그릇에 미세한 균열이 추가로 발생하며 좌측 시야마저 일시적으로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입가로 다시 한번 차가운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하지만 태경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붕대가 감긴 왼손으로 품속의 ‘만물 기록첩’을 꺼내 들었다. 부러진 오른손가락의 통증을 짓누르며, 기록첩에 새겨진 고대 인과의 순환 수식들을 왼쪽 눈으로 매섭게 읽어 내렸다.
‘거인의 사념이 보여주는 파멸의 미래는…… 천명이 강요하는 위선적인 공포일 뿐이다. 기록첩의 수식에 따르면, 정화는 파괴가 아니라 조율이다. 백설아의 한기를 내 영혼 그릇에 나누어 담아 무해하게 정화한다면, 인과의 붕괴 없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어.’
태경은 흐려진 두 눈을 부릅뜨며 거대한 서리 거인의 사념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 정화의 한 장이 내뿜는 순백의 광휘가 흘러나와 푸른 안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운명은…… 정해진 고서가 아니다.”
태경의 목소리는 비록 가냘팠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세상이 그녀를 악녀라 부르며 제물로 삼으려 한다면, 나는 우주의 법칙을 개조해서라도 그녀를 살려낼 것이다. 내 영혼 그릇이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명의 슬픔도 외면하지 않겠다!”
순간, 태경의 영혼 깊은 곳에 깃든 정화의 한 장이 그의 이타적이고 다정한 의지와 공명하며 폭발적인 정화 에너지를 사방으로 방출했다.
화아아아악—!
순백의 빛이 동굴 내부를 가득 채우며 거인의 오만한 안개 장벽을 단숨에 정화해 나갔다. 거인의 사념은 태경의 굳건한 영혼의 광휘에 압도되어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리석은 필멸자여……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는구나. 그러나 그 다정한 고집이 어디까지 통할지 지켜보겠다.”
거인의 사념은 태경의 영혼 앞에 무릎을 꿇듯 서서히 사그라들며, 설아의 한기를 제어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빙궁 서쪽 별채의 온돌 기맥 위치를 태경의 머릿속에 각인시켜 주었다.
[알림: 고대 서리 사념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인과율 왜곡 수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현재 왜곡 수치: 125%]
[백설아의 위치 단서 ‘차가운 별채’ 정보를 획득했습니다.]
거인의 사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동굴 안에는 다시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태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지려 했으나, 채원이 울면서 그를 품에 꼭 안아 채어 올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괜찮다, 채원아…… 단서를 얻었어. 이제 설아를 구하러 갈 수 있다.”
태경은 흐려진 왼쪽 눈으로 채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투가 끝난 기쁨도 잠시였다.
동굴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정찬우가 사색이 된 얼굴로 안쪽을 향해 급박하게 소리쳤다.
“주군! 큰일입니다! 동굴 밖 눈밭 위에…… 누군가가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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