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해빙, 불꽃의 요리
쿠구구구…… 콰아앙!
멀리서 눈사태가 설산을 쓸어내리는 잔향이 동굴의 입구를 흔들었다. 매서운 눈보라는 동굴 입구에 쳐놓은 가느다란 가죽 장막을 사정없이 찢어발기려 들었지만, 정찬우가 바위틈에 단단히 고정해 둔 덕분에 간신히 혹한의 칼바람을 막아내고 있었다.
동굴 안은 어둡고 축축했으며, 얼어붙은 석순들이 창날처럼 솟아나 있었다. 대지의 기맥을 타고 흐르는 북해의 원시 한기는 기어코 동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기어 다녔다.
“하아…… 윽, 하아……”
동굴 구석, 찬우가 깔아둔 낡은 모피 더미 위에 누운 신태경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전신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입술은 핏기가 가셔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숨을 쉴 때마다 허연 김이 아니라 얼음가루 같은 서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태경의 상태는 처참했다. 우측 시력은 이미 완전히 하얗게 멀어버려 오른쪽 시야는 암흑뿐이었고, 간신히 형체를 알아보던 왼쪽 눈마저 서리 기운에 짓눌려 초점이 흐릿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오른손 검지는 기맥 파열로 인해 나무 부목이 단단히 덧대어져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가슴팍에는 지하 감옥 결계 반동으로 타들어 간 검은 그을림 화상 흉터가 예리하게 욱신거렸고, 넓은 등 전체는 채원의 폭주 불꽃을 맨몸으로 막아내다 새겨진 대형 화상 흉터로 인해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불덩이를 얹은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심장이었다.
조대인의 살기에 반응했던 심장 주변의 파란색 서리 흉터가, 북해의 원시 한기를 받아들이며 푸른 빛으로 활성화되어 있었다. 단전의 미미한 1성 입문경 내력은 이미 남궁현과의 대치 속에서 빙황의 화로를 과부하 기동하느라 완벽히 바닥나 있었다. 기맥을 보호할 내력이 한 줌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심장 주변을 파고드는 서리 기운은 실시간으로 그의 생명력을 얼려가고 있었다.
[위험! 단전 내력 방전으로 인해 ‘빙정 동사 위험도’가 통제 불능 상태로 상승합니다!]
[현재 동사 위험도: 52% (경고: 60% 도달 시 전신 기혈 동결 시작)]
흐릿한 왼쪽 눈앞에서 시스템의 붉은 경고창이 깜빡였다. 태경은 손가락 끝이 마비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단전을 쥐어짜려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가슴을 찢는 듯한 기침과 차가운 한 웅큼의 피뿐이었다.
“오라버니! 피를…… 또 피를 흘리시잖아요! 안 돼요, 제발……!”
채원이 비명을 지르며 태경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가문에서 버림받고 괴물이라 불리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시력을 잃고, 손가락이 부러지고, 등에 지워지지 않을 화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 때문에 뒤틀린 인과율의 혹한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죽어가고 있었다.
채원은 손을 뻗어 태경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단전에서 피어오른 정화된 장미빛 신성 불꽃이 손끝을 통해 태경에게 온기를 전하려 했다. 하지만 태경의 단전이 완전히 비어 있는 탓에, 외부에서 주입되는 불꽃은 그의 얼어붙은 기맥을 녹이기는커녕 오히려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장기를 타격하려 했다.
“윽……!”
태경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틀자, 채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두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왜…… 왜 내 불꽃이 오라버니를 따뜻하게 해주지 못하는 거야? 내가 마성을 정화하고 이 힘을 얻었는데도…… 왜 오라버니의 상처 하나 고쳐주지 못하는 거냐고!”
채원은 자신의 무력함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그녀의 운명 정화도는 이미 100%에 달해 마성은 완전히 정화되었으나, 그로 인해 태경을 향한 집착과 소유욕은 광기에 가까운 형태로 그녀의 영혼에 고착되어 있었다. 태경이 없는 세상은 그녀에게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를 살려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때, 채원의 흐려진 시야에 동굴 구석에 놓인 낡은 목조 상자가 들어왔.
그 상자는 아카데미를 탈출하기 전, 대식당의 평민 주방장 박만세가 태경에게 밤마다 챙겨주었던 보양용 고기와 식재료들, 그리고 여의선 한지민이 태경의 부상을 염려해 챙겨준 특제 약재들이 담겨 있는 상자였다. 혹한의 북해로 떠나기 전, 최강현의 마차에 실어두었던 피난용 짐더미 중 일부였다.
채원의 머릿속에 찰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
천성아카데미 제3 도서관 별관 뒤편, 붉은 낙엽이 흩날리던 식당 뒷마당 평상.
가문에서 밥을 굶기고 골방에 가두어 뼈만 남았던 자신에게, 태경은 밤마다 이 보양 재료들과 약재들을 가마솥에 넣고 정성껏 끓여주었었다. 그 따뜻하고 구수한 국밥 한 그릇이, 그 안에 담긴 조건 없는 다정함이 자신의 얼어붙은 마음과 기맥을 녹여주었었다.
‘그래…… 오라버니가 그랬어. 기맥이 막히고 몸이 얼어붙었을 때는, 억지로 내력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영양을 보충하고 속에서부터 온기를 피워 올려야 한다고…….’
채원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빛났다. 역할의 반전. 늘 대접받기만 하던 자신이, 이제는 죽어가는 구원자를 위해 생명의 불씨를 지펴야 할 차례였다.
“찬우 오라버니! 당장 동굴 밖에서 깨끗한 눈을 긁어모아 솥에 담아와요! 빨리!”
동굴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정찬우는 채원의 날카로운 호령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철 장검을 허리에 찬 채 밖으로 나가 깨끗한 만년설을 솥 가득 담아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채원은 떨리는 손으로 목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박만세가 챙겨준 보양용 영수 고기 덩어리와, 한지민이 직접 조제해 준 혈기를 돋우는 특제 약재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단 한 번도 요리를 해본 적 없는 명문 가문의 영애였다. 가문에서는 늘 시녀들이 차려주는 밥상만을 받았고, 아카데미에서도 주는 대로 먹었을 뿐이었다. 솥을 걸고 불을 피우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채원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솥 아래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쌓아 올린 뒤, 자신의 오른손 끝을 겨누었다.
화아악!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장미빛 신성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평소라면 적의 목을 베고 기맥을 찢어발기던 파괴의 불꽃이었다. 채원은 이빨을 악물고 단전의 힘을 미세하게 제어했다. 불꽃의 크기를 줄이고, 온도를 낮추며, 오직 솥을 부드럽게 달굴 수 있는 ‘다정한 온기’로 불꽃의 성질을 변화시켜 나갔.
“흐윽…… 제발, 제발 내 말을 들어줘…… 오라버니를 살려야 해……”
채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눈밭을 적셨다. 파괴적인 마성의 불꽃을 요리용 미세한 온기로 조율하는 것은, 화경 고수와의 무력 대결보다 훨씬 더 정교한 기맥 제어력을 요구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태경의 흐려진 두 눈과 가슴팍의 흉터들이 그녀의 단전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솥 안의 눈더미가 따뜻한 열기에 녹아 맑은 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채원은 서툰 손길로 영수 고기를 찢어 넣었다. 칼을 쓸 줄 몰라 불꽃 채찍의 미세한 끝으로 고기를 잘게 다져 넣는 그녀의 손길은 미숙했지만, 그 안에는 오직 태경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만이 깃들어 있었다. 이어서 한지민의 특제 약재들을 차례로 투하했다.
그것은 태경이 평상에서 끓여주던 방식 그대로의 ‘특제 한방 보혈탕’이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동굴 안의 퀴퀴하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구수하고 은은한 한방 약재의 향기가 퍼져나갔다. 채원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자신의 입술에 대어 온도를 확인했다. 뜨거운 국물이 입안을 데웠지만, 그녀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한 채 태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라버니…… 조금만, 조금만 참으세요. 제발 눈을 떠보세요……”
채원은 태경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허벅지 위에 눕혔다. 태경의 전신은 얼음상자처럼 차가웠고, 심장 주변의 파란 서리 흉터는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짙푸른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경고! 빙정 동사 위험도 58% 돌파! 심장 기맥 동결 임박!]
붉은 경보가 뇌리를 때리는 와중에, 태경은 자신을 부르는 채원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흐릿한 왼쪽 눈을 간신히 뜨자, 눈물로 범벅이 된 채원의 얼굴이 일그러진 시야 너머로 들어왔.
“채원…… 아……”
“오라버니, 말씀하지 마세요. 어서 이걸 드셔야 해요. 오라버니가 제게 끓여주셨던 국밥이에요…… 이번엔 제가 끓였어요. 그러니까 제발 드셔주세요……”
채원은 뜨거운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태경의 입술 사이에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따뜻하고 깊은 맛의 보혈탕 국물이 태경의 메마른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박만세가 엄선한 영수의 고기에서 우러나온 풍부한 영양과, 한지민의 약재가 지닌 기혈 순환의 약력이 태경의 텅 빈 단전으로 스며들었다.
스으으으—.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해빙의 시작이었다.
외부에서 주입되는 무력적인 불꽃은 거부하던 태경의 기맥이,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따뜻한 음식의 온기에는 기꺼이 문을 열어젖혔다. 단전 중심부에서부터 미미하지만 분명한 주황빛 온기가 피어오르며, 기맥을 옥죄던 원시 한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아……!”
태경의 가슴에서 깊은 숨이 터져 나왔다. 몸을 지배하던 극심한 오한이 걷히며 전신에 따뜻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심장 주변의 파란 서리 흉터가 내뿜던 불길한 푸른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며 본래의 반투명한 색으로 돌아갔다.
[안정: ‘특제 한방 보혈탕’의 약력이 단전에 흡수되었습니다.]
[빙정 동사 위험도가 급격히 하락합니다! 현재 동사 위험도: 22% (안정)]
시야를 가리던 붉은 경고창이 사라지고, 태경의 왼쪽 눈에 초점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비록 오른쪽 눈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눈물을 쏟아내는 채원의 아름다운 얼굴만큼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살았다…… 오라버니가 살았어……!”
채원은 숟가락을 떨어뜨린 채 태경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다. 태경은 감각이 돌아온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등에 새겨진 화상 흉터가 욱신거렸지만, 품 안에서 느껴지는 채원의 따뜻한 온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맙다, 채원아. 네가 끓여준 국밥 덕분에…… 살았구나.”
태경의 다정한 목소리에 채원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에는 눈물 너머로, 그동안 숨겨왔던 깊고 어두운 독점욕이 완전히 개방되어 흐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다시는, 다시는 제 곁을 떠나지 마세요. 절 두고 다치지도 마세요.”
채원은 태경의 붕대 감긴 왼손을 제 뺨에 밀착하며, 웅얼거리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달콤했지만, 그 안에 담긴 영혼의 무게는 소름 끼치도록 무거웠다.
“만약 다음에도 오라버니가 저 때문에 이렇게 다치신다면…… 저는 온 세상을 불태워버릴지도 몰라요. 오라버니를 다치게 하는 정파도, 마도도, 하늘의 뜻이라는 천명까지 전부 다…… 잿더미로 만들어서라도 오라버니를 제 곁에 묶어둘 거예요.”
그것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다. 운명 정화도 100%에 도달한 아내가 바치는, 오직 구원자만을 향한 절대적이고 광적인 충성이자 집착의 맹세였다.
태경은 그녀의 살벌하면서도 애틋한 고백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그녀를 더욱 품에 꼭 끌어안았다. 세상이 그들을 악녀와 오류라 부르며 멸하려 할지라도, 자신은 이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 안, 오직 붉은 화로의 온기만이 일렁이는 가운데, 채원의 핏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어두운 집착의 광휘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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