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의 몰락과 빙황의 온기
쿠구구구구구—!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쩍쩍 갈라지는 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남궁현이 가문의 명예에 눈이 멀어 해방한 금기 무공, ‘제왕검기 적멸’의 서슬 퍼런 검기가 북녘의 불안정한 원시 한기와 충돌한 순간, 백색의 설산 전체가 거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산꼭대기에서부터 하늘을 집어삼킬 듯한 백색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백만 톤의 눈더미와 얼음 바위가 뒤섞인 거대한 눈사태였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대지의 기맥이 뒤틀리며 뿜어져 나오는, 모든 생명체를 얼려 죽이려는 혹한의 파괴적 에너지였다.
“공자님! 눈사태입니다! 피해야 합니다!”
남궁가문 파견대의 엘리트 무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사방은 이미 거대한 눈보라의 장막에 가로막혀 탈출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머리 위를 짓누르는 백색의 절망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 이딴 자연재해 따위가……!”
남궁현의 오만한 얼굴이 극도의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황급히 검을 휘두르며 남궁가문의 비전 내공인 창궁신공(蒼穹神功)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일류 극성의 굳건한 내력이 청강검의 검신을 타고 흐르며 푸르스름한 검기 장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내력을 폭증시킨 반동으로 그의 기혈이 사납게 꼬이기 시작했다.
태경은 그 광경을 흐릿한 두 눈으로 응시했다.
정화의 대가로 하얗게 멀어버린 오른쪽 눈은 암흑뿐이었고, 왼쪽 눈마저 서리 기운에 짓눌려 초점이 자꾸만 흔들렸다. 부목으로 단단히 고정해 둔 오른손 검지는 바늘로 찌르는 듯 욱신거렸고, 쇠사슬 반동으로 타버린 가슴팍과 등에 새겨진 대형 화상 흉터가 혹한 속에서 굳어가며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위험! 원시 한기의 직격으로 ‘빙정 동사 위험도’가 급상승합니다!]
[현재 동사 위험도: 45%]
심장 주변의 파란 서리 흉터가 맥박을 칠 때마다 파르르 떨리며 태경의 숨통을 조여왔다. 입가로 다시 한번 차가운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1성 입문경에 불과한 그의 연약한 기맥으로는 이 압도적인 자연의 힘을 맨몸으로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정면으로 맞서는 것도 자살행위야.’
태경은 차가운 이성을 극한으로 쥐어짜냈다. 남궁현은 무공의 힘으로 눈사태를 쪼개려 하겠지만, 대지의 한기는 자극할수록 더욱 사납게 역류하는 법이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힘의 대결이 아닌, 한기의 흐름을 다스리는 성물의 규칙뿐이었다.
태경은 감각이 죽어가는 왼손을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임노인에게 받았던 낡은 청동 화로, ‘빙황의 화로’를 움켜쥐었다.
“채원아, 내 뒤로 와라. 찬우도 내 주변 기맥을 방어해!”
“오라버니!”
채원이 핏빛 눈동자를 크게 뜨며 태경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장미빛 신성 불꽃이 태경의 차가운 전신을 감싸 안았지만, 사방에서 밀려드는 영하 백 도의 한기를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태경은 이를 악물고 단전에 남아있는 미미한 1성의 마력을 빙황의 화로에 주입했다.
스으으으—.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품속에서 꺼내 든 낡은 청동 화로 표면의 고대 각인들이 푸른빛으로 찬란하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시 한기가 화로의 기운과 반응하며, 일시적으로 주황빛이 아닌 차갑고도 성스러운 ‘푸른 불꽃’이 화로 입구에서 세차게 솟구쳤다.
[고대 성물 ‘빙황의 화로’가 주변의 원시 한기와 공명합니다!]
[특수 효과: ‘푸른 한기 흡수’ 가동.]
화로는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혹한의 기류와 눈더미의 에너지를 무서운 속도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태경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거대한 얼음 바위와 눈더미가 푸른 불꽃의 흡수력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하얀 증기로 변하며 증발해 버렸다.
치이이이익—!
하얀 수증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며 태경과 채원의 주변을 둥글게 감싸 안았다.
하지만 화경 고수의 내력조차 짓누르는 눈사태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화로의 흡수력만으로는 낙하하는 눈더미의 물리적인 충격까지 완전히 상쇄할 수 없었다. 화로를 쥔 태경의 왼손 손가락 끝이 한기를 이기지 못해 파랗게 얼어붙으며 동상 흉터가 더욱 짙어졌다. 전신 기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태경의 무릎이 꺾이려 했다.
그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태경의 등을 감싸 안았다.
“오라버니, 제게 기대세요! 제 영혼을 다 바쳐서라도 오라버니를 지킬 거예요!”
채원이 태경의 등을 완전히 밀착하며 그의 몸을 껴안았다. 그녀의 단전에서 피어오른 정화된 신성 불꽃이 태경의 등에 새겨진 대형 화상 흉터의 통증을 어루만지듯 붉은 광휘를 내뿜었다.
채원의 신성 불꽃이 빙황의 화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온기와 공명했다. 주황빛과 붉은빛, 그리고 푸른빛이 한데 뒤엉키며 그들의 사방 반경 수 미터 안에 완벽한 열막(熱幕)의 방어구를 완성했다. 머리 위를 덮치던 수만 톤의 눈더미가 그 열막에 닿자마자 녹아내려 좌우로 비껴 흘러갔다.
반면, 저편의 남궁현 일행은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크아아악! 내력이…… 내공이 얼어붙는다!”
남궁현은 제왕검기를 휘둘러 눈사태를 베어내려 했지만, 그것은 최악의 악수였다. 그가 검기를 방출할 때마다 주변의 원시 한기가 그의 내력을 촉매 삼아 더욱 맹렬하게 역류했다.
검기 장벽은 눈더미의 물리적인 무게와 한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유리창처럼 쩍쩍 갈라지더니, 이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다. 내력이 완전히 고갈된 남궁현은 단전의 기혈이 뒤틀려 한 움큼의 피를 토하며 눈바람 속으로 쓰러졌다.
“공자님—!”
무사들의 비명은 순식간에 덮쳐온 백색의 파도 속으로 파묻혔다. 무방비 상태로 눈사태를 맞이한 남궁가문의 정예 무사들과 남궁현은, 순식간에 수 미터 두께의 얼어붙은 눈더미 속에 파묻혀 처참하게 몰락해 갔다.
쿠구궁…… 쿵.
기나긴 진동 끝에 사방에 지독한 정적이 찾아왔.
태경과 채원은 화로와 신성 불꽃이 만들어낸 하얀 증기 돔 내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주변은 온통 단단하게 얼어붙은 눈의 장벽이었지만, 그들이 서 있는 아주 작은 공간만큼은 봄날처럼 따뜻한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하아, 하아…….”
태경은 안도감과 함께 빙황의 화로를 거두었다. 무리하게 화로를 기동하며 단전의 미미한 내력을 쥐어짜낸 대가로, 전신에 극심한 탈진 상태가 찾아왔다. 심장 주변의 서리 흉터가 예리하게 찌르며 기침이 터져 나왔고, 붉은 피가 하얀 눈바닥을 적셨다.
“오라버니! 피를…… 또 피를 흘리시잖아요!”
채원이 눈물을 흘리며 붕대 감긴 손으로 태경의 입가를 닦아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태경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함께, 그를 평생 자신만의 온기로 가두고 지키겠다는 집착 어린 슬픔이 짙게 서려 있었다.
“괜찮다, 채원아. 잠시 내력이 고갈된 것뿐이다. 남궁현 일행의 추격은…… 이것으로 완전히 떨쳐냈구나.”
태경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단단하게 굳은 눈 장벽의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찬우가 현철 장검을 휘둘러 단단한 눈더미를 부수며 탈출구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주군! 이쪽입니다! 눈더미가 얇아 지상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찬우의 인도에 따라 눈더미의 파헤쳐진 틈새를 통해 지상으로 기어 나온 태경은, 차가운 북녘의 밤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궁가문의 무사들이 서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오만하던 천재 남궁현 역시 차가운 눈 더미 깊은 곳에 파묻혀 생사를 알 수 없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때, 태경의 왼쪽 눈에 포착된 ‘영혼의 안’의 기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남궁현이 파묻힌 눈더미 한구석에서, 차가운 백색의 눈빛을 뚫고 기이한 푸른빛의 광채가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경은 부목을 댄 오른손을 짓누르며, 왼손 붕대로 눈을 헤치고 그 광채의 근원을 파내었다.
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투명하고 푸른빛을 내뿜는 기이한 보석이었다.
[아이템 획득: 고대 보명 도구 ‘서리 수호석(霜雪守護石)’]
[효능: 착용자가 치명상을 입을 때, 주변의 한기를 강제로 응축하여 단 한 번 목숨을 구해주는 절대 방어막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남궁가문의 무사들이 흘리고 간 기이한 푸른 보석을 손에 쥐는 순간, 태경의 심장 흉터가 파르르 공명하며 손끝을 타고 차가운 전율이 흘러들었다. 그것은 향후 그가 마주해야 할 북해빙궁의 차가운 심연 속에서, 그의 목숨을 지켜줄 가장 확실한 보명의 방패가 될 터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욱 매섭게 거세지기 시작했다. 태경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동사 위험도가 다시 꿈틀거렸고, 채원은 얼어붙어 가는 태경을 살리기 위해 다급하게 그의 몸을 껴안으며 주변의 안전한 대피소를 찾아 설원 너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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