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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을 향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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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아카데미 제3 도서관 별관의 아침은 쓸쓸하리만치 고요했다. 불과 몇 일 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음모와 학대 속에서 신음하던 한채원을 숨겨두고 따뜻한 국밥을 끓여주던 소박한 아지트였으나, 이제 이곳을 감싸고 있는 것은 계절을 잊은 혹한의 서리발이었다.


태경은 삐걱거리는 나무 침상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돌덩이라도 얹어놓은 듯 무거웠다.


“윽…….”


낮게 신음하며 가슴을 움켜쥐자, 심장 주변에 새겨진 파란색 서리 흉터가 찌릿하고 예리한 통증을 유발했다. 묵객의 경고대로였다. 한채원을 완벽히 정화하여 마왕의 궤도에서 이탈시킨 인과의 반동. 우주 전체의 마력 균형이 무너지며 북해빙궁의 백설아가 지닌 빙정이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녀와 영혼의 실타래가 얽힌 태경의 심장 역시 실시간으로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위험: '빙정 동사 위험도' 수치가 감지됩니다!]

[현재 동사 위험도: 17%]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시스템 경고창이 흐릿한 양안 시야 속에서 붉게 깜빡였다. 정화의 대가로 우측 시력은 완전히 하얗게 죽어버렸고, 기록관 병과의 사투로 인해 왼쪽 눈마저 미세한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변한 상태였다. 태경은 흐릿한 시야를 애써 바로잡으며 붕대가 칭칭 감긴 왼손으로 침상 머리맡을 짚었다. 오른손 검지는 여전히 기맥이 파열되어 딱딱한 대나무 부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몸뚱이였다.


“오라버니! 일어나시면 안 돼요. 등 뒤의 화상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방문이 열리며 채원이 다급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품에는 갓 끓여낸 소박한 보리죽 그릇이 들려 있었다. 한림가문의 집행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던 그녀의 등은 이제 태경의 헌신적인 정화 대법 덕분에 흔적도 없이 깨끗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핏빛 눈동자는 여전히 태경의 만신창이가 된 몸을 볼 때마다 깊은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광기에 가까운 독점욕으로 일렁였다.


채원은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태경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벌어진 사서 제복 깃을 조심스럽게 여며주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검은 그을림 화상 흉터와 등에 남은 대형 화상 자국을 바라보는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 상처들…… 전부 저 때문에 생긴 거잖아요. 제 불꽃은 왜 오라버니의 이 한기를 녹여주지 못하는 걸까요? 제 몸을 통째로 태워서라도 오라버니를 따뜻하게 해드리고 싶은데…….”


채원의 목소리에 깃든 집착은 달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벌했다. 그녀는 이제 태경을 위해서라면 세상 전체를 불태워버릴 수도 있는 완벽한 그의 수호천사로 각성해 있었다. 태경은 붕대 감긴 왼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네 불꽃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버티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라, 채원아. 우리는 북쪽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백설아라는 아가씨를 구원하면, 내 심장의 한기도 완전히 사라질 테니까.”


“오라버니가 가시는 곳이라면 지옥 끝이라도 따라갈 가예요. 평생 오라버니의 밥을 지어주고, 오라버니를 해치려는 자들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채원은 태경의 붕대 감긴 손을 제 두 손으로 꼭 쥐며 핏빛 눈동자를 빛냈다. 그녀의 맹세는 단순한 약속이 아닌, 영혼에 새겨진 절대적인 구속이었다.


그때, 별관 구석의 흔들의자에서 낡은 가죽 술병을 들이켜던 임노인이 끄응 하며 몸을 일으켰다. 평소처럼 술 냄새를 풍기며 낡은 삼베옷을 대충 걸친 탈모 노인의 모습이었으나, 그의 예리한 눈빛만큼은 태경의 심장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북해라…… 그곳은 중원과는 차원이 다른 척박한 땅이지. 그곳의 추위는 단순한 기후가 아니라 기맥 자체를 얼려 파괴하는 천계의 원시 한기다. 1성 입문경에 불과한 네 연약한 몸으로는 국경을 넘기도 전에 심장이 얼어 터질 게야.”


임노인은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품속으로 들어가더니, 붉은 비단에 싸인 작고 낡은 청동 화로 하나를 꺼내 태경의 무릎 위에 슬쩍 얹어주었다.


“가져가거라. 내 과거의 은원 관계를 청산하러 가기 전에 네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태경이 의아한 눈으로 청동 화로를 바라보자, 시스템의 푸른 알림창이 떠올랐.


[아이템 식별: 고대 성물 '빙황의 화로(氷皇之火爐)']

[효능: 주변의 원시 한기를 강제로 흡수하여 아군에게 이로운 온기로 치환합니다. 일시적인 한기 장벽 형성 가능.]


“이 귀한 성물을 제게 주시는 겁니까?”


태경의 물음에 임노인은 삿갓을 깊게 눌러쓰며 등을 돌렸다.


“시끄럽다. 술값 대신이라 해두지. 내 제자가 길바닥에서 얼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내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서 가거라. 저잣거리에 최강현 놈이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으니.”


츤데레 같은 스승의 배려에 태경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붕대 감긴 손으로 빙황의 화로를 품속 깊숙이 소중하게 밀어 넣었다. 이것이야말로 북해의 혹한을 버텨내고 백설아를 구원할 가장 핵심적인 보루가 될 터였다.


별관 문을 나서자, 아카데미 도서관의 겁 많은 신입 사서 김윤아와 평민 연대의 대표 이진형이 눈물을 글썽이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림가문을 무너뜨리고 평민들의 영웅이 된 태경이 갑작스럽게 떠난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태경 선배님…… 꼭 몸 건강히 돌아오셔야 해요. 도서관 장부는 제가 완벽하게 정리해 둘게요.”


윤아가 동그란 안경을 치켜올리며 눈물을 훔쳤고, 이진형은 굳건하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형님, 아카데미의 평민 학우들은 영원히 형님의 뜻을 지킬 것입니다. 가시는 길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동료들의 정겨운 배웅을 받으며, 태경과 채원은 저잣거리 외곽에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마부석에는 한림가문에서 완전히 이탈해 태경의 충직한 수하가 된 일류 무사 정찬우가 고삐를 쥔 채 대기하고 있었다.


“주군,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북해의 국경, 서리 요새 관문으로 향하겠습니다.”


“출발해라, 찬우야.”


태경의 명령과 함께 마차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든 천성아카데미와 제3 도서관 별관의 풍경이 흐릿한 양안 시야 너머로 천천히 멀어져 갔다. 이제 그들의 눈앞에 펼쳐질 것은 끝없는 설원과 냉혹한 음모가 도사리는 북해의 대지였다.


***


마차가 북쪽으로 달릴수록 차창 밖의 풍경은 급격하게 변해갔다. 푸르던 들판은 사라지고, 사방이 끝없는 백색의 설원과 험준한 빙하 절벽으로 뒤덮였다. 하늘에서는 계절을 무시한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마차의 목조 벽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경고: 주변 환경의 온도가 급격히 하락합니다!]

[빙정 동사 위험도: 22%... 25%...]


심장 주변의 서리 흉터가 옥죄어오는 통증에 태경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채원은 그런 태경의 상반신을 제 품에 꽉 끌어안은 채, 자신의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장미빛 신성 불꽃의 온기를 끊임없이 나누어주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오라버니. 제가 어떻게든 온기를 유지해 드릴게요.”


그녀의 절박한 목소리와 따뜻한 체온 덕분에 태경은 간신히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수일간의 혹독한 행군 끝에, 마차는 마침내 중원과 북해의 경계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에 도달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아오른 거대한 얼음 요새.


‘서리 요새 관문(霜雪要塞關門)’이었다.


관문 전체는 투명하고 푸른빛을 띠는 고대의 혹한 결계로 겹겹이 에워싸여 있었으며, 그 틈새로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찬우가 마차를 멈춰 세우며 다급하게 외쳤.


“주군! 관문 입구에 도달했습니다만, 상황이 이상합니다. 경비병들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태경은 채원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매서운 눈보라가 그의 흐릿한 시야를 가로막았다. 왼쪽 눈의 ‘영혼의 안’을 개방하자, 관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결계의 푸른 마력 궤적이 기괴하게 뒤틀려 요동치는 모습이 투시되었다.


“오라버니, 저기를 보세요.”


채원이 가리킨 곳에는 얼음 조각상처럼 굳어버린 관문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동사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이미 인과의 균열로 인해 북해의 한기가 폭주하면서 관문 전체의 방어 체계가 마비되고 경비병들이 손쓸 새도 없이 동사해 버린 것이다.


태경은 품속에서 아카데미 사서 통행 패를 꺼내 보려 했으나, 이내 헛된 짓임을 깨달았다. 행정적인 통과나 평화적인 타협은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우우웅—!


그때, 관문 전체를 휘감고 있던 혹한의 결계가 외부인의 접근을 감지하고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대기를 영하 백 도로 얼려버릴 듯한 절대 영도의 한기 폭풍이 마차와 태경 일행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윽……!”


그 강력한 원시 한기의 습격에 태경의 심장 서리 흉터가 미친 듯이 발광했다. 전신의 기혈이 한순간에 동결되는 듯한 극심한 마비 증세가 찾아왔다. 호흡이 멈추고, 손끝의 감각이 사라져 갔다.


[경고! 빙정 동사 위험도가 급상승합니다! 현재 45%!]

[심장 기맥 동결 임계점 도달 중! 즉각적인 한기 제어가 필요합니다!]


“오라버니! 정신 차리세요!”


채원이 비명을 지르며 불꽃 장막을 전개하려 했으나, 천계의 쐐기에서 비롯된 원시 한기는 그녀의 불꽃마저 얼려버릴 기세로 포위망을 좁혔다.


‘이대로 얼어 죽을 수는 없다……!’


태경은 이빨을 악물고 굳어가는 왼손을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임노인에게 받았던 고대 성물, ‘빙황의 화로’를 꺼내 들었다.


화아아악!


태경이 단전의 미미한 1성 내력을 쥐어짜 화로에 주입하는 순간, 녹슬고 초라해 보이던 청동 화로 표면의 고대 각인들이 주황빛 광채를 내뿜으며 깨어났다.


빙황의 화로는 사방에서 밀려오던 푸른 혹한의 결계 기류를 강한 흡수력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관문을 뒤덮고 있던 살인적인 냉기가 화로의 아궁이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갔고, 이내 화로는 그 차가운 한기를 은은하고 따뜻한 주황빛 온기로 치환하여 사방으로 방출했다.


“하아…… 후우…….”


따뜻한 온기가 전신을 감싸자 태경의 막혔던 호흡이 터져 나왔다. 동사 위험도 수치 역시 서서히 내려가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임노인의 선물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관문 너머의 설원 전체가 거대한 진동과 함께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뿜어져 나온 푸른 안개들이 허공에서 거대한 형상으로 뭉쳐졌다.


그것은 서리가 내린 듯한 백발에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온몸에서 혹한의 위압감을 뿜어내는 노인의 환영이었다. 북해빙궁의 절대적인 권력자이자 대장로, ‘백무진’의 정신 사념체였다.


“인과의 흐름을 어지럽히고 감히 북해의 금역을 침범하려는 벌레 같은 놈들이 누구냐!”


백무진의 사념체가 내지르는 거대한 현경(玄境) 고수의 영압이 혹한을 타고 관문 전체를 짓눌렀다. 1성의 태경은 그 위압감만으로도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입가로 피를 흘렸다. 찬우 역시 검을 쥔 채 무릎을 꿇으며 신음했다.


“내 주군에게…… 그 더러운 눈빛을 거두어라!”


태경의 흘러내리는 피를 본 채원의 눈동자가 완전히 뒤집혔다. 그녀의 단전에서 정화된 장미빛 신성 불꽃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채원은 허리춤에서 붉은 가시 채찍을 뽑아 들었다. 채찍 표면에 신성적화의 불꽃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화염의 뱀 형상을 만들어냈다.


파아아앙!


채원이 대지를 박차고 도약하며 붉은 가시 채찍을 백무진의 사념체가 깃든 얼음 결계를 향해 내리쳤다. 화경(化境)의 경지를 초월한 신성한 불꽃의 파괴력이 혹한의 대기를 가르고 결계를 직격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백무진의 사념체가 깃들어 있던 푸른 얼음 결계 장벽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휘날렸다. 대장로의 환영은 분노 서린 노호를 지르며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가자, 찬우야! 결계가 무너진 틈을 타 관문을 돌파한다!”


태경은 붕대가 감긴 왼손으로 빙황의 화로를 꼭 쥔 채 찬우에게 명령했다.


“존명!”


찬우가 마차의 채찍을 세차게 내리쳤고, 신마 두 마리가 울부짖으며 부서진 얼음 장벽의 파편들을 뚫고 질주했다.


혹독한 서리 요새 관문의 칼바람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태경의 왼손 손가락 끝 기맥에 차가운 서리가 스쳐 지나가며 가벼운 동상 흉터가 새겨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부서진 관문 장벽을 완전히 넘어서는 순간,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웅장하고 냉혹한 북해의 대설원이 그들의 앞길을 맞이했다.


멀리 설원 너머, 얼어붙은 성채의 그림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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