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숨겨진 안식처
어둠이 짙게 깔린 천성아카데미의 숲길은 차가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 아래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신태경은 품에 안은 소녀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채원은 너무나 가벼웠다. 명문 한림가문의 서녀라는 거창한 신분치고는, 품에 안긴 육체는 오랜 학대와 굶주림으로 인해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던 광폭한 붉은 마력은 임시로 진정되었지만, 전신에서는 여전히 미열이 나고 있었다.
“윽…….”
태경은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 채원의 대폭주를 막는 과정에서 왼팔에 새겨진 화상 흉터가 옷자락에 쓸릴 때마다 칼로 베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입문경 1성에 불과한 그의 미약한 내력으로는 이 통증을 억누르는 것조차 버거웠다. 머릿속은 영혼의 안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로 깨질 듯이 아파왔다.
멀리서 붉은 횃불 무리가 아카데미의 어둠을 가르는 것이 보였다. 규율부의 순찰대원들이 내뿜는 차가운 기세가 대기를 얼리고 있었다. 폭주의 원인을 찾기 위해 수색망을 좁혀오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잡히면 끝장이다.’
태경은 입술을 깨물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아카데미의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서였다. 감시의 사각지대를 귀신같이 찾아내며, 마침내 도서관 구석의 먼지 쌓인 제3 도서관 별관의 문을 밀어 열었다.
끼이익—.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한 목조 건물 내부. 태경은 채원을 안쪽 깊숙한 곳, 낡은 책장 뒤편에 마련된 작은 간이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숨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태경이 먹인 특제 한방 보혈탕의 온기가 기맥을 감싸 안아 최악의 붕괴는 면한 상태였다.
태경은 심호흡을 하며 단전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줌의 기운을 쥐어짜냈다.
우웅—.
그가 별관 벽면의 특정 목조 문양을 만지자, 희미한 영적 파동과 함께 보이지 않는 장막이 별관 전체를 감싸 안았다. 태경의 고유 권능인 ‘사서의 은신처’가 발동한 것이다. 이 영역 안에서는 7성 이하의 그 어떤 고수라도 그들의 기척을 감지할 수 없었다. 채원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미세한 붉은 마력의 잔여 기운이 허공 속으로 완벽히 녹아들며 사라졌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태경의 눈이 책상 한구석을 향했다.
‘앗…….’
채원을 침대에 눕히는 과정에서 그녀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붉은 마력의 잔여 열기가 낡은 목조 책상의 모퉁이를 까맣게 그을려 놓은 상태였다. 그을린 자국에서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탄내가 풍기고 있었다. 태경이 다급히 소매로 그을음을 문질러 지우려 했지만, 나무 깊숙이 박힌 검은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콰아앙!
그때, 별관의 두꺼운 목조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열렸다. 먼지 안개를 뚫고 들어온 것은 화려한 비단 도포를 걸친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한림가문의 후계자이자 채원의 이복 오빠, 한채민이었다.
그의 뒤로는 아카데미 규율부의 제복을 입은 무사 세 명이 차가운 은빛 쇠사슬을 손에 쥔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기세는 일류 초입의 강한 압박감을 담고 있어, 1성의 태경에게는 숨이 막힐 듯한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이런 구석진 쓰레기장에 숨어 있었군.”
한채민이 코를 찌르는 먼지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별관 내부를 오만하게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책상 뒤편에 서 있는 태경에게 닿았다.
“미천한 하급 사서 놈이 밤늦게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태경은 즉각 어깨를 웅크리고, 겁에 질린 평범한 사서의 표정을 지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채민 공자님……! 소인은 그저 내일 있을 서적 정리 작업을 미리 해두려 밤샘 작업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규율부 어른들까지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는지요?”
“시끄럽다.”
한채민이 차가운 걸음으로 태경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와 태경의 낡은 사서 제복 깃을 움켜쥐었다. 화경에 가까운 강력한 힘이 가해지자 태경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다. 목을 조르는 깃 때문에 숨이 막혀왔고, 채민의 손가락이 닿은 목덜미에는 이내 붉고 푸른 손자국 흉터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괴물 년은 어디로 숨겼지?”
채민의 눈동자에 잔혹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연무장에서 폭주한 그 천한 서녀 년이 도서관 방향으로 도망쳤다는 첩보가 있었다. 네놈이 숨겨준 것이냐?”
태경은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면서도, 철저히 무능하고 겁먹은 연기를 이어갔다. 지금 무공을 드러내거나 저항하는 순간, 일류 고수인 채민의 벽옥검에 목이 날아갈 것이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기만해야 했다.
“괴, 괴물 년이라니요……? 소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연무장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 무서워서 이곳 별관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을 뿐입니다! 살려주십시오, 공자님!”
채민은 태경의 비굴한 눈빛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무림의 고수들은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거짓을 간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경은 전생의 기억과 영혼의 안을 활용해 자신의 심장 박동과 시선 처리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채민의 눈에는 그저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릴 것 같은 나약한 평민 사서로만 보일 뿐이었다.
“쯧, 쓸모없는 놈.”
채민이 태경을 바닥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힌 태경은 욱신거리는 목을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수색해라.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채민의 명령에 규율부 무사들이 품에서 마력 탐지 부적을 꺼내 들었다. 그들은 별관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무사들의 발걸음이 채원이 누워 있는 책장 뒤편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태경의 손끝에 땀이 맺혔다. 사서의 은신처 결계가 작동하고 있어 물리적인 탐지 주술은 막아내고 있었지만, 만약 그들이 직접 책장을 젖히고 눈으로 확인한다면 채원의 은신은 탄로 날 것이었다.
그때, 한 무사의 시선이 태경의 책상 모퉁이에 머물렀다.
“공자님, 이것 보십시오. 최근에 그을린 듯한 흔적이 있습니다. 탄내도 미세하게 풍깁니다.”
무사의 말에 한채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그을린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채원의 붉은 마력이 남긴 잔여 열기의 흔적. 일류 무인의 통찰력이라면 이것이 평범한 등불 그을음이 아님을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태경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영혼의 안을 통해 무사들의 기맥 흐름이 책상 주변으로 집중되는 것이 보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 냄새는 분명히…….”
채민이 책상에 손가락을 대려는 찰나였다.
“어기야디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별관 밖에서 귀를 찢는 듯한 괴상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시큼하고 지독한 곡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별관 내부로 가득 밀려들어 왔다.
쾅! 문틀을 붙잡고 비틀거리며 들어온 것은 헝클어진 은발에 낡아 빠진 삼베 사서복을 대충 걸친 늙은이였다. 아카데미 도서관의 천덕꾸러기이자 알코올 중독자인 임노인이었다.
“어라아? 우리 이쁜 별관에 웬 손님들이 이렇게 많아? 헤헤, 채민 도련님 아니셔? 여기 술 한 잔 받으시게!”
임노인은 눈이 반쯤 풀린 채 술병을 흔들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영락없는 만취자의 그것이었지만, 태경의 눈에는 보였다. 임노인의 발끝이 기이한 각도로 바닥의 기맥을 밟으며, 규율부 무사들이 펼쳐놓았던 마력 탐지 부적의 흐름을 소리 없이 흩뜨려놓고 있었다.
“비켜라, 더러운 늙은이!”
채민이 혐오감을 드러내며 임노인을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임노인은 제멋대로 흐느적거리며 채민의 손길을 기묘하게 피하더니, 발이 꼬인 척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이쿠!”
철퍼덕!
임노인이 들고 있던 술병이 한채민의 가슴팍에 그대로 부딪혔다. 끈적거리고 구린내가 나는 누런 곡주가 채민의 값비싼 백색 비단 도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아악! 내 도포가!”
한채민이 비명을 질렀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평생 결벽증에 가까운 단정함을 유지해 온 그에게, 만취한 늙은이의 시큼한 술벼락은 죽음보다 더한 모욕이었다.
“죽여버리겠다! 이 미친 늙은이가 감히!”
채민이 분노로 이성을 잃고 벽옥검의 자루를 쥐었다. 일류 초입의 강력한 검기가 검신에서 푸르게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임노인의 목을 벨 기세였다.
규율부 무사들이 다급히 채민의 팔을 가로막았다.
“공자님, 진정하십시오! 아카데미 내부에서 무단으로 사서를 살해하면 정파 연맹의 법도에 저촉됩니다! 학장님께도 누를 끼치게 됩니다!”
“이 늙은이와 사서 놈을 당장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채민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지만, 임노인은 바닥에 누워 코까지 골며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끈적한 술 냄새와 더러운 먼지가 채민의 옷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일 초도 머물 수 없다는 듯 몸을 떨었다.
“더러운 쓰레기장 같으니라고……! 사서 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규율부에서 네놈들을 정식으로 조사할 테니 그리 알아라!”
채민은 소매로 옷을 닦으며 별관 밖으로 폭풍처럼 걸어 나갔다. 규율부 무사들도 혀를 차며 그의 뒤를 따랐다.
쾅!
문이 닫히고 사방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태경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목덜미에 새겨진 채민의 손자국 흉터가 쓰라리게 타올랐다. 임시로 위기를 넘겼지만, 도서관 주변에 상시 감시 무사들이 배치되어 채원을 밖으로 대피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진 최악의 대치 상태였다.
스윽.
그때, 바닥에서 코를 골며 자는 척하던 임노인이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에서 만취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밤하늘의 심연처럼 깊고 예리한 현경 고수의 광휘가 그의 눈동자에서 번쩍였다.
“녀석, 제법 대범하구나. 일류 고수의 칼날 앞에서도 심장 박동 하나 흐트러지지 않다니.”
임노인은 태경의 상처 입은 목덜미와 책장 뒤편을 슬쩍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 쓸모없는 가문의 서녀를 위해 목숨을 걸다니, 참으로 미련한 짓이로다.”
태경은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들켰을 겁니다. 감사드립니다.”
“흥, 내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구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다.”
임노인은 츤데레처럼 툴툴거리며 품속을 뒤적였다. 그리고 낡고 녹이 슬어 푸른 빛을 띠는 무거운 황동 열쇠 하나를 꺼내 태경의 앞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그 아이의 체내에 흐르는 붉은 마력은 평범한 침술이나 약초로는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 가문의 사악한 주술이 단전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으니까.”
태경은 바닥의 열쇠를 집어 들었다. 묵직하고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만물 기록첩의 페이지가 자동으로 넘어가며 새로운 정보가 기록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템 획득: 망각의 열쇠. 고대 지하 금역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이건…….”
“제3 도서관 별관 지하 가장 깊은 곳, 망각의 서고로 통하는 열쇠다.”
임노인은 다시 술병을 입에 물며 차가운 목소리로 조언을 남겼다.
“그곳에 세상에서 잊힌 고대의 정화 비법이 잠들어 있다. 그 아이를 평범한 인간으로 살려두고 싶다면, 날이 밝기 전에 그 어두운 심연으로 들어가 자격을 증명해 보거라.”
태경은 황동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 너머로, 채원을 완전히 치료하고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비책이 저 어두운 지하 금역 속에 숨겨져 있음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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