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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몰락과 인과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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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추악한 탐욕이 찬란한 장미빛 불꽃에 휩쓸려 한 줌의 재로 화한 순간, 대연회장에는 기이할 정도의 정적이 찾아왔다. 한림가문의 가주 한태오와 늙은 마두 조대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단상 위. 신태경은 전신을 덮쳐오는 극심한 고통에 신음을 삼키며 한채원의 품으로 쓰러지듯 기댔다.


“오라버니! 정신 차리세요, 오라버니……!”


채원의 절박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녀의 손길이 태경의 뺨에 닿았다. 마왕의 숙명을 벗어던지고 신성한 수호의 천사로 각성한 그녀의 몸에서는, 이전의 불길하고 차가운 마기 대신 따뜻하고 맑은 신성적화(神聖赤火)의 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온기조차 태경의 등 뒤를 지배하는 끔찍한 통증을 완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채원의 폭주 불꽃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타들어 간 등 전체의 화상 흉터가 찢어지는 듯 비명을 질렀다. 오른손 검지는 파열되어 기괴하게 꺾인 채 부목에 고정되어 있었고, 왼손바닥 역시 붕대로 감겨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정화의 대가로 하얗게 흐려진 우측 시야 때문에 오른쪽 세상은 온통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했다.


“주군! 몸을 추스르셔야 합니다. 가문의 무사들은 가주의 소멸로 전의를 상실했으나, 지금 하늘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러진 검을 버리고 새로운 현철 장검을 쥔 정찬우가 단상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그의 말대로였다. 가문 파멸의 통쾌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연회장의 갈라진 천장 너머로 기이한 이변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구구구궁—!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한림가문 저택 전체를 옥죄었다. 저잣거리 방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과 노호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시각, 아카데미 정문 앞 저잣거리에서는 이진형과 아카데미 평민 학생 연대 학우들이 한림가문의 추악한 아동 학대와 비리 정황이 담긴 대자보를 사수하며 대규모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평민 학생들은 가주 한태오의 파멸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으며 귀족 세력의 횡포를 완전히 몰아세우고 있었다. 지상의 권력 구도는 완벽하게 평민들의 승리로 기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인간들의 승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의 색이 붉게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경고: 한채원의 운명 궤도 이탈로 인해 인과율 왜곡 수치가 임계점을 돌파했습니다!]

[현재 인과율 왜곡 수치: 120% (위험)]

[세계의 의지가 존재적 오류를 감지하고 정화 기작을 가동합니다!]


태경의 흐릿한 시야 너머로 시스템의 붉은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하늘의 찢어진 틈새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황금빛의 기하학적 문양. 그것은 거대한 인과의 눈(因果之眼)이었다. 그 중심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차가운 백색 광휘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대연회장 단상 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한 존재를 형상화했다.


백색 도포를 걸치고 얼굴은 눈부신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존재. 그의 품에는 지상의 모든 역사와 인과율이 실시간으로 기록된다는 황금빛 고서, ‘천명 기록서’가 들려 있었다.


하늘의 뜻인 천명을 수호하는 자. 바로 ‘기록관 병’이었다.


“존재의 흐름에 심각한 왜곡이 발생했다.”


기록관 병의 목소리가 대연회장 내부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감정이 전혀 배제된, 차갑고 무기질적인 기계의 작동음과 같은 음성이었다. 그의 얼굴을 가린 빛무리가 태경을 향해 고정되었다.


“마왕으로 각성하여 세상을 정화해야 할 그릇이 수호의 힘을 지녔다. 인과의 실타래가 끊어지고 우주의 법식이 오염되었다. 이 모든 오류의 근원은…… 회귀의 인과를 훔친 너로구나, 신태경.”


기록관 병이 천천히 천명 기록서를 펼쳤다. 그가 손가락으로 기록서의 한 페이지를 쓸어내리자, 태경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영혼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처절한 통증이 발생했다.


“아, 으아아악!”


태경은 단상 바닥을 짚으며 비명을 질렀다. 전신이 투명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시작된 투명화는 그의 존재 자체를 우주 밖으로 추방하려는 강제 소멸의 빛이었다.


‘존재를…… 지우려 하고 있어.’


태경은 이빨을 악물며 임노인에게 전수받은 회피 보법인 무형보(無影步)를 전개하려 했다. 기맥을 뒤틀어 공간의 궤적을 피하려 했으나, 딛고 선 대지 자체와 자신의 존재 기반이 지워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신묘한 신법도 통하지 않았다. 발끝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몸이 허물어졌다.


“오라버니! 안 돼요! 오라버니에게 손대지 마!”


태경의 몸이 투명해지는 것을 본 채원의 눈동자가 극도의 공포와 분노로 뒤집혔다. 그녀는 주저 없이 태경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화아아아악—!


채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장미빛 신성 불꽃이 태경의 영혼 주변을 겹겹이 감싸 안으며 단단한 붉은 은막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마왕의 숙명을 정화하여 얻은 신성한 수호의 권능이, 존재 소멸의 빛을 정면으로 가로막은 것이다. 황금빛 빛무리와 장미빛 불꽃 장막이 부딪히며 연회장 바닥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무모하도다.”


기록관 병이 차갑게 읊조렸다.


“운명이 정해놓은 비극을 거스른 대가는 오직 소멸뿐이다. 오류를 품은 자는 사라져야 하며, 흐트러진 인과는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병이 천명 기록서의 황금빛 실타래를 허공으로 뿌렸다. 실타래들이 날카로운 인과의 가위질이 되어 채원의 장미빛 은막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은막의 두께가 얇아질 때마다 태경의 단전 기맥에 균열이 가며 각혈이 터져 나왔다.


[위험! 영혼 그릇의 균열 진행률 80% 돌파!]

[좌측 시력에 미세한 왜곡이 발생합니다!]


태경의 왼쪽 눈앞마저 미세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에 이어 왼쪽 눈마저 빛을 잃어간다면, 더 이상 아가씨들의 트라우마를 볼 수 없게 된다. 이대로 소멸당할 수는 없었다.


태경은 타들어 가는 가슴을 움켜쥐며 차가운 이성을 극한으로 쥐어짜냈다. 저 기록관 병은 단순한 무인이 아니다. 우주의 법칙 그 자체를 다루는 대행자다. 그렇다면 정면의 무공이 아닌, 그가 다루는 ‘수식’ 자체를 기만하고 오염시켜야 했다.


태경은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된 고대 성물, ‘영혼 정화의 한 장’의 남은 영력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정화의 힘은 사악한 마기만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다. 고정된 인과의 사슬마저 맑게 정화하여 무력화할 수 있다.’


태경은 왼손 끝으로 허공을 향해 정화의 영력을 방출했다. 백색의 맑은 광휘가 채원의 붉은 불꽃과 융합되며 기록관 병의 황금빛 실타래를 향해 뻗어 나갔.


스으으으—!


태경의 정화 영력이 천명 기록서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 수식에 닿는 순간, 굳건하던 인과의 공식들이 일순간 흐트러지며 방향성을 잃었다. 기록서의 페이지가 거칠게 펄럭이며 황금빛 실타래들이 공중에서 맥없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인과의 수식이…… 오염되었다고?”


기록관 병의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최초로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지금이야, 채원아! 쳐라!”


태경이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도 소리쳤다.


“하아아앗—!”


태경의 외침에 채원이 단상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녀의 등 뒤로 장미빛 불꽃 날개가 활짝 펼쳐졌고, 오른손에 쥐어진 붉은 가시 채찍이 신성한 불꽃을 머금은 채 거대하게 팽창했다.


채원은 자신을 위해 온몸을 바쳐 아파해 준 태경의 등에 새겨진 화상 흉터를 떠올렸다. 오직 태경만을 지키겠다는 극도의 집착과 수호의 의지가 그녀의 무위에 실렸다.


촤아아아악—!


붉은 가시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기록관 병의 환영을 향해 내리꽂혔다. 신성한 불꽃의 궤적이 하늘의 찢어진 균열을 가로지르며 폭발적인 위력을 방출했다.


콰아앙! 콰드득—!


채찍 끝에 실린 신성적화가 기록관 병의 백색 장막을 산산조각 냈다. 병이 들고 있던 천명 기록서의 환영이 불꽃에 그을리며 반으로 쩍 갈라졌다.


“인과를 뒤흔든 오류여…… 오늘의 퇴거가 끝이 아님을 기억하라.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기록관 병의 형체가 흐릿해지며 허공 속으로 녹아들듯 소멸했다. 하늘의 인과의 눈 역시 서서히 감기며 균열의 틈새가 아물어갔다.


“하아, 하아…….”


채원이 단상 위로 착지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급히 태경의 상태를 살폈다. 태경은 간신히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영혼 그릇에 깊은 균열이 생겨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왼쪽 눈의 시야마저 미세하게 흐릿해져 세상을 온전히 보기 힘들었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제발 눈 좀 떠보세요…….”


채원이 눈물을 흘리며 태경을 품에 안았다. 태경은 흐릿해진 왼쪽 눈으로 채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단다, 채원아…… 지켜내지 않았느냐.”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하늘의 인과의 눈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한림가문 저택의 쩍쩍 갈라진 마당 한가운데가 기이한 진동과 함께 갈라지기 시작했다. 인과율의 균열이 완전히 아물지 않고 지상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스으으으—.


갈라진 대지의 틈새 너머, 아카데미 북쪽 외곽 절벽 방향에서 계절을 잊은 기이한 기류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범한 겨울 바람이 아니었다. 피부를 베어낼 듯이 차갑고 날카로운, 절대 영도(絕對零度)의 서리 기운이었다. 온 누리를 뒤덮기 시작한 서리발이 대연회장의 타버린 재 위로 하얗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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