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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을 가르는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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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풍이 한림가문 저택의 높은 기와지붕을 사납게 할퀴며 울부짖는 깊은 밤.


사방을 삼킬 듯한 어둠 속에서, 신태경은 저택 서쪽 담장의 그늘 아래 납작 엎드려 있었다. 숨소리조차 숲의 바람 소리에 묻어버린 채, 그는 차가운 흙바닥에 이마를 대고 단전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지민 씨의 약방에서 감아준 하얀 붕대가 벌써 진흙에 젖는군.’


태경은 쓰라린 양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오므렸다. 가시넝쿨에 찢겼던 상처는 지민의 정성 어린 의술 덕분에 아물어가고 있었으나, 오른손 검지만큼은 여전히 기괴하게 꺾여 단단한 대나무 부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무진의 철혈강기 반동으로 파열된 손가락 기맥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뼛속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을 내뿜었다.


설상가상으로, 정화의 한 장을 흡수한 대가로 하얗게 죽어버린 우측 시야 탓에 거리감이 극도로 왜곡되어 있었다. 오직 왼쪽 눈과 영혼 깊은 곳에 깃든 ‘영혼의 안’만이 이 어둠 속에서 그의 유일한 등불이었다.


스으으.


태경의 가슴팍, 심장 주변에 새겨진 파란색 서리 흉터가 저택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삼엄한 살기에 반응하듯 찌르르하게 떨려왔다. 차가운 통증이 갈비뼈를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억눌렀다. 지금 흔들릴 여유는 없었다. 채원이가 지하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 순간, 1초의 지체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 정찬우가 현철 장검의 자루를 쥔 채 그림자처럼 버티고 있었다. 찬우의 영혼은 이제 흔들림 없는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신태경을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며 아가씨를 구하겠다는 피의 맹세가 그의 전신에 단단한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때, 저택 서쪽 담장 너머에서 희미한 새 울음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기다리던 백강의 신호였다.


웅—.


담장 전체를 붉은빛으로 휘감으며 침입자의 마력을 감지하는 즉시 태워 죽이려 일렁이던 ‘적양 결계 장치’의 열기가 한순간 맥없이 가라앉았다. 가문 내부에서 백강이 목숨을 걸고 결계의 핵심 동력원을 일시적으로 비활성화한 것이다.


“지금이다.”


태경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찬우가 먼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담장 위로 도약해 착지했다. 태경 역시 무형보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담장을 기어올랐다.


하지만 발끝이 담장 상단에 닿는 찰나, 부목을 댄 오른손 검지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단전에서 솟구치던 미미한 1성의 내력이 꺾인 손가락 기맥에 걸려 사납게 역류했다.


“윽……!”


뇌리를 직격하는 극심한 통증에 태경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신체 균형이 깨지며 딛고 있던 기와 틈새에서 아주 미세한 마찰음이 발생했다.


사락.


바람 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담장 아래 정원을 순찰하던 무인들에게는 치명적인 흔적이었다.


“누구냐!”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정원 수풀 너머에서 횃불 무리가 번개처럼 좁혀왔다. 횃불의 선두에 선 사내는 날카롭고 쥐새끼 같은 인상에 비열한 미소를 짓고 다니던 방계 사촌, 한서진이었다.


한서진은 검을 뽑아 들며 이류 초입의 기민한 감각으로 태경이 숨은 담장 아래 수풀을 노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 한림연기결의 푸른 마력 기류가 뿜어져 나오며 탐지 주술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경고: 적의 탐지 주술이 접근 중입니다. 영역 은폐가 필요합니다.]


시스템의 경고창이 흐릿한 오른쪽 눈앞에서 붉게 점멸했다. 서진의 탐지 주술이 수풀을 훑는 순간, 그들의 정체는 물론이고 침투 작전 전체가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1성 입문경의 태경으로서는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도망치는 건 늦었다. 그렇다면 기만하는 수밖에.’


태경은 침착하게 왼손을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손끝에 닿은 것은 최강현이 목숨 걸고 밀수해 준 ‘은하수 모래’ 주머니였다.


서진이 수풀 바로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나뭇가지를 검 끝으로 헤치려던 바로 그 찰나.


태경은 왼손으로 은하수 모래 주머니를 터뜨려 공중에 거칠게 뿌렸다.


화아아악—!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터져 나간 고운 은빛 모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신비로운 은하수 같은 안개를 형성했다. 은하수 모래가 공기 중에 닿는 순간, 주변의 마력 흐름이 기하학적으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서진이 시전한 한림연기결의 탐지 파동이 은빛 안개 장벽에 부딪히는 순간, 파동의 궤적이 엉뚱한 방향으로 완전히 굴절되어 버렸다.


“음? 탐지 주술이 저쪽 동쪽 담장을 가리키는군. 잘못 들었나?”


서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동쪽 정원을 바라보았다. 은하수 모래의 기만 결계가 그의 감각을 완벽히 속여넘긴 것이다.


하지만 비열하고 의심 많은 한서진은 쉽게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횃불을 높이 든 채, 태경과 찬우가 숨어 있는 수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태경의 코앞까지 드리워졌다.


서진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이상하군…… 은은한 약초 향과 탄내가 풍기는데…….”


서진의 검 끝이 태경의 왼쪽 눈앞 수 센티미터 거리까지 다가왔다. 나뭇가지를 걷어내는 서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태경은 등 뒤의 찬우에게 은밀한 수신호를 보냈다.


스스스.


찬우가 그림자 속에서 소리 없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일류 무인의 기척 없는 낙하 신법이었다.


찬우는 서진의 뒤편에서 경계를 서던 두 명의 정예 무사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착지하더니, 현철 장검의 묵직한 손잡이로 그들의 뒷목 기맥을 동시에 내리쳤다.


퍽, 퍽!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두 무사가 낙엽 위로 부드럽게 쓰러졌다.


“무슨 소……!”


이상함을 감지한 한서진이 다급히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가 목청을 높여 경보를 울리려던 찰나, 태경의 왼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태경은 부목을 댄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은침 통에서 ‘마력 동조 은침’ 한 대를 뽑아냈다. 오른손 검지가 파열되어 정밀도가 소폭 저하되었지만, 그의 왼쪽 눈은 서진의 목덜미에 흐르는 기맥의 중심, 아문혈(啞門穴)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여기를 막으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태경은 부러진 손가락에서 밀려오는 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왼손 끝에 미미한 마력을 실어 서진의 목덜미를 향해 은침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치익.


“윽……! 으윽……?”


서진의 눈동자가 거대하게 흔들렸다. 그의 목에서 나오려던 경보의 목소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로 변해 사라졌고, 전신의 기맥이 순식간에 동결되며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렸다.


태경은 쓰러지는 서진의 몸을 왼팔로 단단히 받아내며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찬우가 신속하게 세 명의 무사를 수풀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그들의 무기와 옷가지를 은닉했다.


“후우…… 후우…….”


태경은 붕대가 감긴 손으로 벽을 짚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은하수 모래 한 주머니를 완전히 소모했고, 무리하게 침술을 시전하느라 오른손의 파열된 기맥이 욱신거리며 심각한 통증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슴의 서리 흉터 역시 얼음 가시로 찌르는 듯 차가웠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찬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부축했다. 태경은 고개를 흔들며 흐릿한 오른쪽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괜찮네. 외곽 경비와 서진이를 소리 없이 무력화했으니, 이제 정원 내부로 진입해야 하네.”


그들이 무사히 장벽 내부로 발을 들여놓으며 침투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안도감은 채 1초도 가지 못했다.


쿵————.


갑자기 태경의 발바닥을 통해, 저택 지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기이하고 무거운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것은 평범한 지진이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살기와 함께, 심장을 찢어발길 듯 광폭하게 소용돌이치는 한채원의 ‘붉은 마력’의 진동이었다. 채원의 영혼이 지하 깊은 곳에서 비명을 지르며 대폭주하기 직전의 파동이 대지를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경의 왼쪽 눈동자가 붉은 진동의 기운을 감지하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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