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의 소집과 추적의 실타래
어스름한 새벽빛이 창살 틈새로 비쳐 드는 한지민의 약방 치료실.
신태경은 침상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내상의 통증과 함께,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서 뼈가 어긋나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한무진의 철혈강기 반동으로 파열된 오른손 검지는 기괴하게 부어오른 채 고정되어 있었다. 침술을 펼쳐야 할 사서의 생명과도 같은 손가락이 꺾여 버린 것이다.
우측 시력마저 흐릿하게 번져 오른쪽 시야가 하얗게 죽어 버린 상태였지만, 태경은 단전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웅, 웅.
단전 깊은 곳에서 아주 미세하고 규칙적인 진동이 느껴졌다. 삐걱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한무진의 도포 안감에 심어두었던 ‘마력 추적용 은침’의 공명이었다. 그 신호는 태경의 뇌리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입체 지도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붉은 선으로 얽힌 길, 순찰 무사들의 기맥이 뿜어내는 열기, 그리고 지하 가장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박동하는 한채원의 붉은 마력의 궤적까지.
한림가문 저택의 내부 구조가 그의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태경 씨, 제발 가만히 계세요. 기맥이 이 정도로 뒤틀렸는데 억지로 내력을 쥐어짜면 영구히 폐인이 될 수도 있어요.”
의선 한지민이 단아하게 묶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초조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는 백색 의복 소매를 걷어붙인 채, 태경의 파열된 오른손 검지에 부목을 대고 하얀 붕대를 정성스럽게 감아올렸다. 약방 내부를 가득 채운 은은한 약초 향이 태경의 뇌리를 조금은 맑게 해주었지만, 가슴팍에 새겨진 파란색 서리 흉터는 살기가 느껴질 때마다 여전히 찌르르한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사흘입니다, 지민 씨.”
태경이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채원이가 지하 감옥에 갇혀 조대인과의 피의 혼례식 제물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사흘뿐입니다. 내 손가락이 굳어 문드러지더라도 지금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지민은 그의 단호한 눈빛에 압도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태경이 지닌 1성 입문경의 미미한 무력으로는 한림가문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절대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이 다정한 사서의 헌신에,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그때, 약방의 뒷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삼베옷 차림의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정보 상인 최강현이었다.
“여어, 형씨. 꼴이 정말 말이 아니구만.”
최강현은 부채를 가볍게 접으며 태경의 붕대 감긴 손과 흐릿한 오른쪽 눈을 보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정보 상인다운 기민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현은 품속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와 은빛으로 빛나는 고운 모래 주머니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형씨가 부탁한 대로 상단의 자금을 융통해 왔어. 그리고 이건 암시장에서 어렵게 밀수해 온 ‘은하수 모래’야. 마력의 흐름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데 이만한 물건이 없지. 침투할 때 요긴하게 쓰일 거야.”
“고맙다, 강현아. 가문의 동태는 어떠냐?”
“가주 한태오가 완전히 독이 올랐어. 조대인과의 혼례를 서두르기 위해 가문 내부의 경비를 평소보다 세 배는 강화했더군. 게다가 혈영대의 살수들까지 저택 곳곳에 배치해 뒀어. 형씨가 심어둔 은침 신호가 아니었다면 접근조차 불가능했을 거야.”
태경은 최강현이 가져온 정보를 들으며 머릿속의 지도를 갱신했다. 가문의 정예 무사들과 혈영대의 살수들이 겹겹이 에워싼 요새. 1성의 무력으로는 일대일로 마주치는 즉시 목이 달아날 터였다. 힘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문 내부를 꿰뚫고 있는 강력한 우군이 필요했다.
태경은 고개를 들어 최강현을 바라보았다.
“정찬우를 불러다오.”
“정찬우? 채원 아가씨의 전담 호위 무사였던 그 외골수 놈 말인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녀석이라 형씨를 보자마자 칼을 뽑아 들지도 모른다고.”
“그의 영혼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그를 포섭하지 못하면 지하 감옥으로 가는 문은 열리지 않아.”
한 시간 뒤, 약방의 은밀한 밀실 안으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단하게 다져진 체구에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 정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빛은 굳건했으나, 그 이면에는 채원을 지키지 못하고 가문의 비정함에 방관자가 되어야 했던 깊은 자책감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태경은 ‘영혼의 안’을 개방하여 그를 응시했다. 찬우의 전신을 감싼 영혼의 색은 어두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덕적 죄책감에 짓눌려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 영혼의 상태였다.
“나를 왜 부른 거지, 하급 사서.”
정찬우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경은 온전한 왼손으로 찻잔을 짚으며 조용히 말했다.
“채원이를 구하고 싶지 않나, 찬우 씨.”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가씨는 가문의 규율에 따라 혼례를 치르러 가신 것이다. 나는 가문의 무사로서 가주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찬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태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최강현이 준 자금 주머니를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 자금과 탈출 후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겠네. 가문을 등지고 우리와 함께 채원이를 구출하세.”
그 순간, 정찬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스릉—!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찬우의 현철 장검이 칼집에서 뽑혀 나왔다. 검 끝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태경의 목덜미를 정확히 겨누었다. 날카로운 검기가 태경의 목 피부를 스치며 미세한 자상을 냈고, 붉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목덜미에 새겨진 피멍 흉터가 검기의 살기에 반응해 욱신거렸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신태경.”
정찬우가 이를 악물며 검을 바짝 들이밀었다.
“내가 가문의 불합리함에 고뇌한다고 해서, 한낱 평민 사서 놈의 금전적 매수에 넘어가 가문을 배신할 것 같으냐! 내 검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 존재한다. 당장 네놈의 목을 베어 가주님께 바쳐도 내게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다.”
일류 무인의 압도적인 기세가 밀실을 가득 채웠다. 1성의 태경으로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중압감이었다. 하지만 태경은 칼날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흐릿한 오른쪽 눈 대신, 맑게 빛나는 왼쪽 눈으로 찬우의 흔들리는 영혼을 똑똑히 응시했다.
“가문의 명예라고 했나?”
태경의 목소리는 칼날보다 더 차갑고 단호했다.
“한태오 가주가 채원이를 조대인에게 시집보내는 진짜 이유를 정말 모르는 건가, 정찬우?”
“……무슨 뜻이지?”
“그건 혼례가 아니다. 제사지. 가주 한태오는 지하 제단에서 채원이의 단전을 쥐어짜 그녀가 타고난 붉은 마력을 강제로 추출하려 하고 있네. 영혼이 통째로 뽑혀 나간 채원이는 혼례식이 끝나는 순간, 자아를 잃은 차가운 인형이 되어 서서히 죽어갈 걸세. 가문의 성물인 ‘적양염옥’을 채우기 위한 일회용 소모품으로 쓰이는 거지.”
찬우의 눈동자가 거대하게 흔들렸다. 검 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가주님이 아무리 비정하시기로소니 친딸의 영혼을 가공하는 금기 마도를 펼치실 리가…….”
“위선적인 정파의 명문가라는 탈 뒤에서 그들이 저질러온 만행을 그동안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장본인이 바로 자네가 아닌가!”
태경은 붕대가 감긴 피투성이 오른손을 들어 찬우의 검날을 스스럼없이 밀어냈다. 파열된 손가락의 통증이 뼛속까지 찔러왔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채원이가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릴 때 자네는 무엇을 했지? 골방에 갇혀 굶주릴 때 자네는 가문의 법도라는 핑계 뒤에 숨어 방관하지 않았나? 이제 그녀의 영혼마저 찢겨 소멸하려 하는데, 여전히 그 추악한 가문의 충견으로 남을 셈인가!”
태경의 진심 어린 포효가 찬우의 도덕적 죄책감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자네의 검은 명예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약자를 짓밟는 기득권의 사슬을 지키기 위한 것인가! 대답해라, 정찬우!”
찬우의 전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지켜보았던 채원의 눈물과 학대의 흔적들, 그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면서도 자신을 지키려 애쓰던 다정한 사서의 모습이 교차했다.
철그렁.
현철 장검이 찬우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무겁게 떨어졌다. 찬우는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는…… 나는 그저 아가씨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가문의 명을 거역할 용기가 없었어…….”
태경은 무릎 꿇은 찬우의 어깨에 온전한 왼손을 얹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묵직한 온기가 찬우의 차갑게 얼어붙은 어깨를 감쌌다.
“용기는 지금 내면 된다. 내게 힘을 보태다오. 채원이를 그 지옥에서 함께 건져내세.”
찬우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태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두운 회색빛 영혼이, 태경의 온기와 결의에 감화되어 점차 푸른빛의 충성심으로 변화해 가고 있었다. 찬우는 바닥의 검을 주워 번개처럼 검집에 꽂아 넣으며, 태경을 향해 단단히 포권을 취했다.
“……이 정찬우, 지금 이 순간부터 신 형씨를 나의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어도, 아가씨를 구출하고 주군의 방패가 되겠습니다.”
첫 번째 충신이 완벽하게 포섭되는 순간이었다.
안도감도 잠시, 약방의 뒷문으로 가문의 하급 무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기어 들어왔다. 정찬우가 미리 포섭해 두었던 내부 고발자, 백강이었다.
백강은 사방을 경계하며 품속에서 가죽으로 된 두꺼운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한림가문 저택의 정밀 경비 배치도였다.
“찬우 형님의 연락을 받고 목숨을 걸고 빼돌려 왔습니다. 저택 내부의 순찰 동선과 결계의 배치 상황이 적혀 있습니다.”
태경은 백강이 건넨 지도를 왼쪽 눈으로 꼼꼼히 살폈다. 그의 단전 속 은침 신호와 정확히 일치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지도의 중심부,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통로 바로 위에 붉은 먹물로 거대하게 그려진 기괴한 주술 문양이 태경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을 본 태경의 미간이 기이할 정도로 굳어졌다. 가슴팍의 파란 서리 흉터가 얼음 송곳에 찔린 듯 차가운 통증을 내뿜으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태경의 나직한 신음에 백강이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장 강력한 방어벽인 ‘적양 결계 장치(赤陽 結界 裝置)’입니다. 혼례식을 앞두고 가주님이 직접 기동시켜, 승인되지 않은 아주 미세한 마력 파동만 감지되어도 침입자를 그 자리에서 태워 죽이는 끔찍한 결계입니다. 이 장치를 무력화하지 못하면, 지하 감옥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재가 될 겁니다.”
지도 위에서 붉게 타오르는 적양 결계 장치의 표시를 바라보며, 태경은 붕대 감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사흘이라는 촉박한 시간의 모래시계가 빠르게 흘러가는 가운데,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장벽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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