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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의 밤, 빼앗긴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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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너머, 붉은 안개와 함께 피비린내 나는 살기가 소리 없이 정원 풀잎을 적시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문이 보낸 사설 살수 집단, ‘혈영대’의 검은 그림자가 제3 도서관 별관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창틀을 타고 흐르는 새벽이슬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신태경은 붕대가 칭칭 감긴 왼손으로 찻잔을 쥔 채, 창밖의 짙은 어둠을 응시했다. 장도현의 규율부가 물러간 자리에 남은 것은 폭풍 전야의 불길한 정적뿐이었다. 우측 시력이 흐릿한 탓에 오른쪽 시야는 온통 하얗게 번져 보였지만, 왼쪽 눈동자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결국 법과 교칙이라는 방패가 깨지니, 사설 살수를 보냈군.’


태경은 품속에서 ‘만물 기록첩’을 슬며시 꺼내 들었다. 장부의 낡은 가죽 표면 위로 반투명한 시스템 경고창이 붉은빛을 발하며 깜빡이고 있었다.


[위험: 일류 살수 집단 ‘혈영대’의 정예 자객 8인 접근 중.]

[살수대장 ‘독고혈’의 살기 파동 감지. 별관 포위 완료까지 남은 시간 3분.]


“오라버니…….”


태경의 뒤편, 책장 그늘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채원이었다. 심령안정초 환약 덕분에 그녀의 마왕 각성도는 45%로 안정되어 있었으나, 별관을 에워싸는 살기를 감지한 듯 그녀의 단전에서 미세한 붉은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채원의 핏빛 눈동자에는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에 대한 증오보다, 눈앞의 태경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과 살벌한 독점욕이 뒤엉켜 있었다.


“쉬이, 괜찮다. 채원아. 내 뒤에 가만히 있거늘.”


태경은 붕대 감긴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살기 속에서도 태경의 손길만큼은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채원은 그 온기에 몸을 바르르 떨며 붉은 마력을 억누르고 그의 옷자락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그녀에게 태경은 이미 세상의 전부이자, 결코 잃어서는 안 될 유일한 구원자였다.


스스스.


풀잎을 밟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기괴한 잠행 무공. 하지만 태경의 ‘영혼의 안’은 어둠 속을 가르는 사악한 검은 실타래들을 똑똑히 포착하고 있었다. 자객들의 살기가 별관의 낡은 목조 벽을 뚫고 들어와 피부를 찔렀다. 심장 주변에 새겨진 파란색 서리 흉터가 그 살기에 반응하듯 찌르르한 통증을 유발했다. 태경은 신음을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쨍그랑!


그때, 별관의 오래된 유리창이 일제히 깨지며 시커먼 그림자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복면을 쓰고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혈영대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쥔 비수에는 치명적인 신경독이 발려 있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죽여라. 서녀 년은 다리만 부러뜨려 생포하고, 사서 놈은 목을 베어라.”


어둠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검은 도포를 입은 살수대장 독고혈의 냉혹한 명령이 떨어졌다. 살수들이 일제히 신법을 전개하며 태경의 목덜미를 향해 비수를 내뻗는 찰나였다.


탁, 탁, 탁.


도서관 구석, 낡은 흔들의자에 누워 잠만 자던 임노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낡고 먼지 쌓인 대나무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던 노인의 눈동자에서 일순간 drunken한 안개가 걷히고,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깊고 예리한 광휘가 번쩍였다.


“미천한 살수 놈들이 신성한 아카데미 사서부를 더럽히는구나.”


임노인이 가볍게 대나무 빗자루를 허공으로 휘둘렀다. 아무런 내력의 소리도, 화려한 초식의 궤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별관 내부의 공기가 일순간 진공 상태처럼 얼어붙었다.


스으으으—!


무형의 검기(無形之劍氣)였다.


어둠 속을 가르고 들어오던 살수들의 신형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들의 목덜미와 단전 부근에서 아주 미세한 바람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혈영대 살수들의 기맥이 소리 소문 없이 파괴되며 바닥으로 투두둑 쓰러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일류 살수들이 단 한 번의 빗자루질에 무력화된 것이다. 현경(玄境) 초입의 절대적인 무위가 낡은 별관 안을 가득 채웠다.


독고혈은 가죽 가면 너머로 눈을 부릅뜨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 노인네가…… 검선(劍仙) 임진천인가……!”


“이름을 기억하는 놈이 아직 있었군. 그렇다면 네놈의 목숨도 여기까지다.”


임노인이 다시 빗자루를 치켜들려던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제3 도서관 별관의 단단한 벽면이 거대한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흙먼지가 휘날렸다. 부서진 잔해를 뚫고 들어온 것은, 얼굴에 깊은 칼자국이 새겨진 거구의 무인, 한림가문의 집행 장로 한무진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쇠사슬이 칭칭 감긴 무거운 강철 대검이 쥐어져 있었고, 온몸에서 일류 극성의 ‘철혈강기(鐵血罡氣)’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늙은 은거 고수가 숨어 있었군! 하지만 내 동생 한태오 가주님의 명을 막을 수는 없다!”


한무진이 광소를 터뜨리며 파산대검법(破山大劍法)의 무거운 궤적을 전개했다. 붉은 내력이 검신에 얽히며 임노인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임노인은 혀를 차며 빗자루 끝으로 무진의 강철 대검을 받아냈다.


깡—! 콰아아앙!


철과 대나무가 부딪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별관 내부를 휩쓸었다. 책장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수천 권의 책들이 낙엽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임노인은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한무진의 맹렬한 기세를 받아냈지만, 한무진은 애초에 임노인을 이길 생각이 없었다. 그의 교활한 눈동자가 이 난장판 속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포착했다.


바로 양손에 붕대를 감은 채 흐릿한 눈으로 서 있는 하급 사서, 신태경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네놈이 배후였구나!”


한무진이 임노인의 무형 검기 궤적을 억지로 몸으로 받아내며 피를 흘리면서도, 신법을 꺾어 태경을 향해 쇄도했다. 그의 손목에 감겨 있던 흑철 속박의 사슬이 채찍처럼 날아가 태경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윽……!”


차가운 무쇠 사슬이 태경의 목을 조여왔다. 목덜미에 새겨진 한채민의 옛 손자국 흉터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함께, 태경의 신형이 한무진의 거구 앞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무진은 거친 손길로 태경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밀었다.


“움직이지 마라! 늙은이,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이 평민 놈의 목을 그 자리에서 꺾어버리겠다!”


한무진의 비수가 태경의 목피부를 파고들어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임노인의 신형이 허공에서 뚝 멈춰 섰다. 노인의 눈동자에 깊은 고뇌와 살기가 서렸으나, 인질이 된 태경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태경은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1성 입문경의 내력으로는 이 화경 고수의 완력과 강기를 풀 수 없어. 하지만…….’


그는 붕대 감긴 오른손 소매 속으로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손끝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침통에서 ‘마력 동조 은침’ 한 개를 소리 없이 꺼냈다. 무형 기맥 조율술(無型氣脈調律術)의 구결이 그의 머릿속에서 정교하게 가동되었다. 한무진의 기맥 흐름을 투시하여, 그의 팔꿈치 안쪽 곡지혈을 찔러 완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쉬익!


태경이 번개처럼 손을 뻗어 은침을 한무진의 팔에 꽂아 넣으려 했다. 그러나 화경 고수의 본능적인 방어 기전인 철혈강기가 무진의 피부 표면을 단단한 강철 장벽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깡!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마력 동조 은침이 무진의 강기 장벽에 부딪혀 허무하게 튕겨 나가 부러졌다. 동시에, 강한 내력의 역풍이 태경의 손가락을 타고 그대로 역류했다.


두두둑!


“아아악!”


태경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은침을 쥐고 있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의 기맥이 무참히 파열되며 뼈가 꺾이는sickening한 소리가 별관 내부에 울려 퍼졌다. 붕대 틈새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태경은 극심한 고통에 전신을 바르르 떨며 한무진의 손아귀 속에서 각혈했다.


“하하하! 미천한 사서 놈이 감히 화경의 강기를 뚫으려 드느냐!”


한무진이 태경의 부러진 손가락을 비웃으며 그의 목을 더욱 강하게 옥죄었다.


“안 돼—!!! 오라버니!!!”


태경이 피를 토하며 손가락이 꺾인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한채원의 이성이 완전히 붕괴했다.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태경을 향한 미칠 듯한 독점욕과 죄책감, 그리고 가문에 대한 파괴적인 증오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채원의 전신에서 핏빛의 광포한 마력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와 쓰러진 책장들을 먼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녀의 마왕 각성도가 순식간에 요동치며 붉은 가시들이 공중에 돋아났다. 당장이라도 한무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세상을 불태워버릴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한무진은 차갑게 미소 지으며 태경의 목에 비수를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살을 베는 차가운 금속의 감각과 함께 태경의 목에서 피가 더 울컥 쏟아졌다.


“움직여라, 서녀 년아! 네놈이 한 걸음이라도 마력을 더 뿜어낸다면, 이 놈의 목줄기를 통째로 뜯어내 가문의 개 사료로 던져주마!”


“아…… 으아아…….”


채원의 신형이 뚝 멈춰 섰다.


자신 때문에 다치고, 자신 때문에 오른손 손가락이 부러져 피를 흘리는 다정한 오라버니.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자신에게 따뜻한 국밥을 끓여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유일한 온기였다. 저 비정한 가문의 칼날에 그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환영이 채원의 머릿속을 스치자,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태경이 죽는 것을 볼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편이 나았다.


“하지 마…… 하지 마세요…….”


채원의 눈에서 핏빛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광포한 붉은 마력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한무진을 향해 애원하듯 속삭였다.


“내가 갈게요…… 가문으로 돌아갈게요. 아버지의 뜻대로 혼례를 치르고, 내 영혼을 바치겠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살려줘요…… 제발…….”


“채원…… 아…… 안 돼…… 돌아가지…… 마라…….”


태경이 기맥이 파열된 손가락의 통증 속에서도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채원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나 때문에 더 이상 아프지 마세요. 내 평생의 밥을 해주겠다는 약속…… 지키지 못해 미안해요.”


철컹! 철컹!


한무진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흑철 속박의 사슬을 던졌다. 사슬이 채원의 가녀린 양손과 단전을 칭칭 감아 올리며 그녀가 지닌 모든 마력을 완벽하게 억제했다. 채원은 사슬의 반동으로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좋은 선택이다, 서녀 년아. 가문으로 돌아가 늙은 조대인 어르신의 훌륭한 제물이 되거라!”


한무진은 사슬을 잡아채며 태경을 바닥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태경은 반쯤 무너진 별관 바닥의 책더미 위로 굴러떨어졌다. 오른손 검지 기맥이 완전히 파열되어 손가락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전신에 내상 충격이 밀려와 각혈이 멈추지 않았다.


“태경아!”


임노인이 다급히 다가와 태경의 기맥을 짚으며 내력을 주입하려 했다. 하지만 태경은 부러진 손가락의 통증 속에서도 왼쪽 눈의 초점을 흐리지 않고, 멀어지는 채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검은 살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흑철 사슬에 묶인 채 도서관 별관 밖의 차가운 안개 속으로 끌려가는 한채원.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개를 돌려 태경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슬픔과 함께, 오직 태경만을 향한 광적인 집착과 사랑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스으으…….


그녀의 신형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태경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분노와 무력감이 끓어올랐다. 1성 입문경이라는 나약한 현실이,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맹세했던 첫 번째 소녀를 눈앞에서 빼앗기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태경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뒤틀렸다.


그는 바닥을 짚은 왼손을 천천히 폈다. 부러진 오른손 검지 손가락의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 안쪽, 아주 미세한 마력의 실타래가 연결되어 있었다.


한무진이 자신을 움켜쥐고 사슬로 목을 조르던 그 절체절명의 찰나. 태경이 시도했던 침술은 단순한 발악이 아니었다. 비록 무진의 강철 강기에 막혀 은침이 부러지고 손가락 기맥이 파열되는 대가를 치렀지만, 태경은 부러진 은침의 끝부분에 자신의 영혼 정화 영력을 실어 한무진의 옷자락 깊숙한 곳에 은밀히 심어두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력 추적용 은침’이었다.


은침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미세한 공명 신호가 태경의 단전과 연결되어, 한림가문 저택 내부의 실시간 경비 동선과 지맥 지도를 그의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그려내기 시작했다.


태경은 부러진 손가락을 움켜쥐며, 피가 섞인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왼쪽 눈동자가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붉게 빛났다.


‘사흘이다.’


한채원이 가문 지하 감옥에 갇혀 늙은 조대인과의 피의 혼례식 제물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사흘뿐이었다.


태경은 무너진 별관 바닥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움켜쥐며, 가문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녀를 되찾아올 피의 구출 작전을 맹세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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