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를 깨워라
쿠구구구구—!
지각의 가장 깊은 틈새가 비명을 지르며 붉은 용암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카론-4의 내장이 무너지며 뿜어져 나온 열기는 지하 은하 도크의 거대한 강철 지지대들을 순식간에 빨갛게 달구었다. 대기가 팽창하며 발생한 고압의 열풍이 먼지와 황을 뒤섞은 채 진혁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진혁 형! 조금만 더요! 활주로가 녹아내리고 있어요!”
루카가 카이의 유품인 홀로그램 패드를 품에 꼭 안은 채 비틀거리며 외쳤다. 소년의 얼굴은 눈물과 댕기머리처럼 엉킨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진혁은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움켜쥐고 각혈로 물든 입술을 깨물었다. 왼쪽 눈에 이식된 황금빛 양자 분석 렌즈가 주변의 극심한 열적 파동을 감지하며 시야에 붉은색 경고 격자를 미친 듯이 뿌려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거대한 암석 절벽 내부에 숨겨진 지하 은하 도크(Dock)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수천 년 동안 은하 제국의 역사 검열망을 피해 잠들어 있던 고대 지구의 탐사선, ‘헤르메스 호’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낡고 거친 장갑판으로 뒤덮인 화물선 같았지만, 유기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진 선체와 군데군데 드러난 황동빛 제어선들은 제국의 차가운 기계 기술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태고의 미학을 품고 있었다.
“도련님……! 살아 계셨군요!”
도크의 비상 제어반 앞에서 낡은 가죽 코트를 걸친 늙고 왜소한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서씨 가문의 충직한 가신이자 수년 동안 이 비밀 격납고를 지켜온 관리인, 마크였다.
“마크 아저씨, 헤르메스 호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진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일럿 한솔이 짧은 흑발을 쓸어올리며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선체와 기본 장갑은 마크 씨가 완벽하게 보존해 뒀어. 하지만 동력이 문제야. 이 배의 양자 코어 엔진은 현재 제국식 규격 전력원과 전혀 호환되지 않아. 보조 제어 시스템을 깨우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라고!”
“엔진 동력선이 완전히 끊어져서 수동으로 바이패스를 연결해야 해!”
이마에 용접용 고글을 얹은 채 엔진룸 해치에서 상체를 내민 젊은 여성 기술자, 렌이 기름때 묻은 양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제국식 예비 발전기를 강제로 융합하려 해봤지만, 전압 규격 차이 때문에 콘솔 회로 일부가 쇼트되어 연소됐어! 고대 지구의 전력 규격을 이어줄 특수 도선이 없다면 시동조차 걸 수 없어!”
“그렇다면 이건 어때요!”
루카가 품속에서 빛바랜 금속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소년이 카론-4의 슬럼가 쓰레기 더미를 샅샅이 뒤져 수집해 온 ‘초전도 정밀 구리 도선(Superconducting Wire)’이 타래로 묶여 빛나고 있었다. 고순도 구리로 제작되어 전자기 노이즈를 차단하고 서로 다른 전력 규격을 손실 없이 매개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었다.
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초전도 구리선……! 그거라면 고대 양자 코어와 제국의 비상 전력 셀을 연결할 수 있어! 루카, 당장 이리 와서 내 팔을 보조해!”
진혁은 지체하지 않고 헤르메스 호의 해치를 열고 조종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종석 내부는 먼지가 자욱했지만, 황동빛으로 빛나는 콘솔 테이블과 수동 조종간이 고풍스러운 비주얼을 자아내고 있었다.
진혁은 품속에서 숙부 서진우가 체포되기 직전 전해준 암호 칩에서 실체화한 황동빛 카드 키, ‘헤르메스 호 비상 기동 키’를 꺼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키를 넣는 순간, 제국의 감시 위성에 그들의 정확한 좌표가 노출될 터였다. 하지만 뒤편에서 들려오는 용암의 기분 나쁜 끓는 소리가 그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찰칵—.
진혁이 메인 콘솔 중앙의 깊은 슬롯에 비상 기동 키를 밀어 넣었다. 동시에 그의 왼손바닥을 생체 인식 패드 위에 얹었다.
“시원 게놈 주파수 동조, 개시.”
진혁의 혈관 속에서 잠자던 고대 지구 연합 정부 지휘관의 특수 유전자 서열이 깨어나며 황동 콘솔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백색 빛줄기가 콘솔의 기하학적 문양들을 따라 맥박치듯 퍼져나갔다.
위이이이잉—!
조종석 전면의 홀로그램 패널이 켜지며 단순한 녹색 점선 주파수의 형태가 깜빡였다. 헤르메스 호의 서브 AI, 네로(Nero)의 시동음이었다.
[시스템 부팅 개시. 비상 동력 감지…… 에러. 전압 불안정 및 물리적 규격 불일치. 프로토콜 가동을 중단합니다.]
“렌! 전력이 부족해! 네로가 시동을 거부하고 있어!”
진혁이 조종실 마이크를 향해 외쳤다.
엔진룸 내부에서 렌과 루카의 필사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렌은 한쪽 다리를 고정대 뒤에 딛고 서서 거대한 수동 크랭크를 온 힘을 다해 조작하기 시작했고, 루카는 초전도 구리 도선의 한쪽 끝을 메인 전력 셀의 고전압 터미널에 직접 용접하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지직!
“으악! 전류가 역류해!”
루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규격이 맞지 않는 제국식 전력이 고대 엔진에 닿자 강력한 전자기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물러서지 마, 루카! 크랭크를 고정해!”
렌이 이 악물고 소리쳤다. 그녀는 양손으로 수동 크랭크의 기어를 억지로 맞물리며 엔진의 기계적 진동을 강제로 제어하려 했다. 그러나 고대 양자 코어에서 방출된 고압의 전자기 에너지가 도선을 타고 역류해 렌의 전신을 때렸다.
“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렌의 몸이 엔진룸 벽면에 거칠게 부딪혔다. 그녀의 왼쪽 팔 전체가 고압 전류에 감전되어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렌 언니!”
루카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려 했으나, 렌은 오른손으로 파손된 파이프를 붙잡으며 억지로 일어섰다. 그녀의 입술에서 신음과 함께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나…… 나 신경 쓰지 마……! 도선 연결은 끝났어! 진혁, 당장 기동시켜!”
진혁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죄책감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콘솔에 자신의 게놈 주파수를 집중했다. 그의 왼쪽 눈 황금빛 렌즈가 극도로 과열되며 타는 듯한 안구 통증이 밀려왔다.
‘조금만 더…… 내 신체 능력을 아틀라스와 함선에 동조시켜야 한다!’
진혁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콘솔을 움켜쥐자, 전면 홀로그램의 녹색 주파수가 순간적으로 장엄한 청색과 황금빛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메인 콘솔 중앙에서 마모되고 지직거리는 노년의 지휘관 형상을 한 녹색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헤르메스 호의 원형 인공지능 시스템, 크로노스(Chronos)였다.
[……계승자의 혈통 주파수 감지. 수천 년의 침묵을 깨고 임무를 재개합니다.]
크로노스의 인격 코어가 마지막 남은 시스템 에너지를 쥐어짜 헤르메스 호의 메인 컴퓨터에 강제 접속했다.
[비상 안전 락(Lock)을 강제 해제합니다. 메인 양자 코어 엔진, 시동 시퀀스 가동.]
둥—! 둥—!
헤르메스 호의 심장부에서 묵직한 맥박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선체가 거대하게 진동하며 쌓여 있던 수천 년의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엔진 배출구에서 차가운 청색 광채와 함께 푸른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찬란한 부활의 순간, 조종석의 비상 센서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
[경고: 대기권 상공으로부터 고출력 전자기 신호 감지. 제국 지상군의 궤도 유도 빔(Targeting Beam)이 격납고 외벽에 고정되었습니다. 포격 임박.]
“제장! 저놈들이 위성으로 우리 위치를 완전히 록온했어!”
조종석 부함장석에 앉아 비행 장치를 점검하던 한솔이 주먹으로 콘솔을 내리쳤다. 제국 주둔군 사령관 발가스 대장의 포위 부대가 마침내 격납고의 물리적 위치를 특정하고 함포 조준을 완료한 것이었다.
천장에서 흘러내리던 용암의 줄기가 점점 굵어지며 도크의 바닥을 삼켜가는 가운데, 격납고 폐쇄 장벽 너머로 둔중한 기계음과 군화 소리가 땅을 울렸다.
엔진의 양자 코어가 푸른 불꽃을 일렁이며 부르르 떨리는 찰나,
쾅—!
귀를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격납고의 거대한 이중 강철 정문이 산산조각이 나며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 구덩이를 뚫고, 제국 주둔군 사령관 발가스 대장의 거대한 중장갑차가 육중한 바퀴를 굴리며 도크 내부로 강제 진입했다. 장갑차 상부에 장착된 고열 플라스마 주포의 포신이 기괴한 기계음을 내며 회전하더니, 이륙을 준비하는 헤르메스 호의 조종석 전면 유리창을 정확하게 조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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