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기록을 열다
“진혁아, 정신 차리고 내 말 똑바로 들어라.”
벨라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검은 소용돌이 시장의 자욱한 가스 연기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진혁의 고막을 납탄처럼 무겁게 뚫고 들어왔다.
“네 숙부, 서진우 박사가…… 제국 신권 재판소의 임시 심문 구역으로 끌려갔다. 카엘이 직접 그를 고문하며 헤르메스 호의 위치를 캐내고 있어. 처형 시간이…… 단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순간, 진혁의 머릿속에서 수십억 개의 양자 노이즈가 다시 폭발하는 듯한 충격이 일었다. 왼쪽 안구 뒤편에 이식된 황금빛 양자 분석 렌즈가 주파수 왜곡을 일으키며 시뻘건 경고등처럼 깜빡였다. 숙부의 온화했던 미소,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자신을 향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숙부님이…… 나 때문에…….”
진혁은 벌어진 어깨 상처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피가 울컥 배어 나왔지만, 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제국군의 임시 심문 구역으로 뛰어들어가 카엘의 그 검은 기계 대가리를 플라스마 단검으로 꿰뚫어 버리고 싶었다. 피가 끓다 못해 기화하는 것 같은 분노가 전신을 지배했다.
“안 돼, 진혁아! 지금 가면 개죽음일 뿐이야!”
벨라가 진혁의 멱살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카엘은 너를 끌어내기 위해 네 숙부를 미끼로 던진 거다. 제국의 1급 심문관과 그 사설 기동대를 유기체 육체 하나로 어떻게 상대하겠다는 거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힘이다. 제국의 포위망을 찢어발기고 날아오를 수 있는 힘!”
“……헤르메스 호.”
진혁이 핏발 선 눈으로 벨라를 응시했다.
“그래, 고대 탐사선 헤르메스 호를 깨워야 해. 하지만 그 우주선은 카론-4의 중력권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제국의 양자 검열망에 걸려 즉각 분해될 거다. 그걸 막으려면…… 수천 년 동안 우주 지도에서 지워진 진짜 모성, ‘지구’의 중력 항로가 필요해.”
진혁은 심호흡을 하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성이라는 차가운 얼음 아래로 가라앉혔다. 학자로서의 냉철함이 다시 그의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숙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제국의 압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나아 가야 했다. 부모님이 목숨을 바쳐 연구했고, 숙부가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수호하려 했던 그 약속의 장소로.
“태고의 기록 보관소로 간다.”
진혁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하게 울렸다.
* * *
카론-4의 지하 5,000미터 아래.
이곳은 제국 학술원이 수백 년 동안 수십 미터 두께의 특수 차단 콘크리트로 메워 존재 자체를 말소하려 했던 금단의 구역이었다. 사방은 빛 한 점 없는 절대적인 어둠이었고, 차가운 청색 우주 먼지가 정적 속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 앞이네, 서태오의 아들이로군.”
어둠 속에서 횃불 대신 희미한 양자 랜턴을 든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바랜 사서 예복을 입고 등 굽은 체구에 주름진 손으로 낡은 종이책을 소중히 안고 있는 은발의 노인, 카론-4 고대 도서관 최후의 수호자 ‘노 학자 첸’이었다.
“첸 박사님…….”
“자네 부모와 나는 과거에 비밀리에 학술적 교류를 나눴었지. 그들이 처형당할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네. 하지만 이 보관소만큼은…… 제국의 콘크리트 포탑들이 이 위를 덮을 때도 목숨을 걸고 지켜왔지. 자네가 올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첸은 주름진 손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의 틈새를 가리켰다. 제국이 인위적으로 메워버린 균열 부위였다. 그 안쪽으로 고대 지구의 합금 장갑판이 미세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물리적 봉인막이 통로를 완벽히 차단하고 있네. 총독부의 마스터 코드가 없다면 이 게이트는 영원히 열리지 않아.”
진혁은 묵묵히 가죽 코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아론 총독의 관저 비밀 금고에서 탈취했던 반투명한 금속 카드, ‘제국 보안 인증 토큰’을 꺼냈다.
“이게 있으면 가능합니다.”
진혁이 토큰을 콘크리트 내벽에 감춰진 제국의 감시 단말기에 접촉했다.
[위잉- 제국 1급 행정 보안 프로토콜 우회 시작. 인증 코드: 아론 총독 인가.]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돔 내벽을 흐르던 붉은색 레이저 그리드가 순식간에 녹색으로 변하며 소멸했다. 수십 미터 두께의 콘크리트 장벽이 둔중한 유압음과 함께 좌우로 갈라지며, 수천 년 동안 인공 중력과 대기가 유지되어 온 신비로운 지하 공간이 그 장엄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태고의 기록 보관소.’
기하학적인 강철 구조물들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서고였다. 천장에는 인공 별무리가 희미하게 청색 양자 빛을 발하며 일렁이고 있었고, 사방의 벽면은 벌집 모양의 투명한 양자 데이터 수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은하 제국의 그 어떤 첨단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잃어버린 초고대 문명의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장엄하군…….”
첸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짧았다.
그들이 보관소의 원형 중심부 광장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바닥의 기하학적 그리드 라인이 일제히 붉은색 광채를 뿜어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광장 중앙의 강철 바닥이 갈라지며, 거대한 청색 안광을 번뜩이는 존재가 솟구쳐 올랐다. 온몸이 고대 지구 연합 정부의 기하학적인 백색 합금 장갑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자율 전투 안드로이드, 아카이브 수호 장치 ‘시그마 (Sigma)’였다.
[경고. 미승인 유기체 진입 감지.]
시그마의 기계음은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채 차갑고 엄숙했다. 드로이드의 양어깨가 분할되며 수십 문의 양자 광선 포화 장치가 충전되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는 전자기 파동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조준선이 정확히 진혁의 이마 중앙에 정렬되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절대적인 죽음의 압박이었다.
“시그마! 멈추게! 나는 아카이브의 마지막 사서 첸이다!”
첸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던 ‘고대 사서의 인장 반지’를 치켜들었다. 반지가 방출하는 미세한 고대 보안 신호가 시그마의 광학 센서에 닿았다.
[스캔 중…… 고대 사서 인장 감지. 그러나 시스템 물리적 훼손으로 인해 완전 정지 명령 수용 불가. 침입자 말살 프로토콜 가동 유지. 격멸까지 남은 시간: 60초.]
“제장! 제국의 물리적 폭격 영향으로 드로이드의 인지 회로가 오작동하고 있어! 반지가 통하지 않네!”
첸이 비명을 질렀다. 시그마의 양자 포탑 끝에 청색 플라스마 에너지가 임계치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저 포화가 뿜어지는 순간, 이 원형 광장은 단 한 줌의 재도 남지 않고 기화할 터였다.
‘물리적인 파괴는 불가능하다. 저 단단한 고대 지구의 합금 장갑은 플라스마 단검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진혁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왼쪽 눈동자가 찬란한 황금빛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진혁아! 위험해!”
뒤편에서 대기하던 벨라가 라이플을 조준하려 했으나, 진혁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쏘지 마십시오. 저 안드로이드는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진혁은 황금빛 양자 분석 렌즈를 한계치까지 오버로드시켰다. 안구 신경망을 타고 뇌 세포를 갉아먹는 듯한 극심한 신경통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수십억 개의 전자기 노이즈로 찢어질 것 같았고, 목구멍으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황금빛 안광이 시그마의 전신을 훑으며, 드로이드가 투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양자 주파수의 흐름을 역추적했다.
그때, 시그마의 머리 위 허공에 고대 지구 연합 정부의 사법 수수께끼 문자가 홀로그램으로 투사되었다. 극도로 훼손되어 획의 절반 이상이 날아간 상형 기호들이었다.
[질문: 시원 인류의 정의를 증명하라. 답을 제시하지 못할 시 이단 침입자로 판정, 즉각 정화한다. 남은 시간: 30초.]
“저 문자는…….”
첸 박사가 당황해 책을 뒤적였지만, 훼손된 문자를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진혁에게는 부모님의 연구 유산과 이모 이설아가 남긴 검열 우회 공식의 데이터베이스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진혁은 ‘양자 언어 복원 추론법’을 가동했다. 황금빛 렌즈가 훼손된 기호의 잔여 전하 패턴을 분석하고, 비어 있는 획의 궤적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나갔다. 문학적 은유와 역사적 맥락이 그의 뇌리에서 초고속으로 결합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암호가 아니다. 제국이 인류를 기계로 승화시키기 전, 고대 지구 연합 정부가 제정한 헌법 제1조…… 인간성 보존에 대한 맹세다.’
“시원 인류의 정의는…….”
진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답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필멸하는 육체를 가졌으나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인간성을 보존하며, 기계의 영생보다 불완전한 영혼의 가치를 수호하는 자들이다.”
[답변 분석 중…… 기호적 의미 일치율 98.7%. 그러나 최종 인가를 위해 생물학적 주파수 동조 요구.]
시그마의 청색 안광이 진혁의 전신을 훑었다.
[경고: 유기체 유전자 적합도 검증 불가. 계승자의 혈통 주파수가 감지되지 않을 시 말살 프로토콜 집행.]
“내 피가…… 마스터키다.”
진혁은 부모님이 자신의 혈액 속에 각인해 두었다는 ‘시원 게놈 마스터 키 주파수’의 비밀을 떠올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품속에서 플라스마 광선 단검을 꺼내 자신의 왼손바닥을 그어내렸다.
붉은 피가 단검의 청색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혁은 피가 흐르는 왼손바닥을 광장 중앙의 고대 제어 단말기 콘솔 위에 강하게 내리눌렀다.
“동조해라…… 내 혈관 속에 흐르는 진짜 인류의 역사와!”
진혁은 ‘고대 유물 주파수 공명 해독법’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급격한 압박감과 함께 숨이 턱 막혔다. 전신의 신경망이 고대 기계의 전자기 주파수와 강제로 동조되면서 느껴지는 물리적 대가였다.
파지직! 파지직!
진혁의 손바닥이 닿은 황동빛 단말기 표면을 따라, 푸른색 유전자 이중 나선 문양이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밝게 빛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푸른 빛은 시그마의 거대한 금속 발끝을 타고 올라가 그의 전신 장갑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스캔 완료…… 유기체 유전자 적합도 99.9%. 시원 게놈 주파수 완벽 일치. 적격한 계승자로 판명.]
시그마의 어깨에 충전되어 있던 청색 플라스마 포화 장치가 서서히 꺼졌다. 거대한 안드로이드 가디언은 조용히 무릎을 꿇으며, 진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식의 파수꾼 시그마, 정당한 시원 관리자 서진혁 님을 영접합니다. 침입자 말살 프로토콜을 영구 종료합니다.]
“하아…… 하아…….”
진혁은 왼손을 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입가로 푸른빛이 도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광장 중앙에서 솟구쳐 오르는 원형 Pedestal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쿠구구궁-
마침내 지하 밀실의 최종 봉인이 풀렸다. 찬란한 청색 홀로그램 빛무리 한가운데, 황동으로 정교하게 도금된 오래된 나침반 형태의 기기가 공중에 떠올랐다.
‘테라 아틀라스 (Terra Atlas).’
그리고 그 옆에는 고대 지구 기록 보관소의 지휘관만이 착용할 수 있었던 은빛 금속 반지, ‘고대 방어 안드로이드 통제 링’이 함께 놓여 있었다.
“해냈어…… 진혁아, 네가 해냈어!”
벨라가 다급하게 뛰어와 진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첸 박사 역시 평생의 사명을 완수했다는 듯이 아틀라스를 바라보며 경외감에 찬 눈물을 흘렸다.
진혁은 떨리는 손을 뻗어 황동빛 아틀라스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과 함께, 그의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아틀라스 표면의 정교한 홈을 채웠다.
철컥.
기기 상단이 개방되며, 눈이 멀 것 같은 푸른색 홀로그램 구체가 방출되어 5,000미터 아래의 지하 보관소 전체를 뒤덮었다. 은하 제국의 지도에서 공식적으로 말소되었던, 태고의 푸른 행성 ‘지구’의 아름다운 구체 형상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고대 중력 항로의 실선들이 장엄하게 투사되었다.
‘인류 모성 지구 말소의 진실’이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 데이터 스트리밍으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지구가 조작된 신화가 아닌, 실재하는 인류의 고향이자 구원의 열쇠임이 실증적으로 증명되는 역사적인 찰나였다.
그러나 경이로움에 잠길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쿠우우우우웅-!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폭음과 함께, 기록 보관소의 견고한 천장 돔이 사정없이 흔들리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가루와 강철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경고: 외부로부터 초고출력 에너지 빔 감지. 행성 궤도 함대의 반물질 주포 사격 개시. 유적 붕괴 임계치 도달.]
시그마의 붉은 경고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카엘이 이끄는 제국 신권 재판소의 함대가 유적의 가동 신호를 감지하고 궤도 폭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천장이 갈라지며 푸른색 반물질 에너지가 지하 깊은 곳을 향해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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