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만년필
서치라이트 불빛이 어둠을 찢고 들어오는 순간, 진혁은 바닥의 먼지 묻은 만년필을 꽉 쥐었습니다.
지하 폐광 비밀 기지 입구 너머로 들려오는 제국 정찰대의 군화 소리는 무겁고 규칙적이었다. 강제 기계화 개조를 거쳐 온몸을 금속 장갑으로 두른 정규군 보초병들의 발걸음. 그 차가운 진동이 갱도의 흙바닥을 타고 진혁의 뼈마디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으윽…….”
진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죽 코트 안쪽 주머니를 더듬었다. 조금 전 제국 중앙 AI의 역추적을 차단하기 위해 가동했던 ‘정신적 기억 장벽’의 여파가 여전히 뇌 세포를 찌르고 있었다. 머릿속이 바늘로 헤집어지는 듯한 이명과 함께 시야가 흐릿하게 일렁였다. 왼쪽 눈에 불법 이식된 양자 분석 렌즈가 과열되어 안구 신경을 갉아먹는 듯한 작열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 쓰러질 수는 없었다. 손에 쥔 안티 게놈 세럼의 분석 데이터 칩이 그의 코트 안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진혁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국의 감시망은 그의 생체 뇌파 주파수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둔 상태다. 만약 이대로 기지 정문으로 나간다면 생체 스캐너에 걸려 단 3초 만에 나포될 터였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뿐이었다.
진혁은 낡은 가죽 코트 자락을 여미며 발전기 뒤편의 무너진 갱도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릴 적 이 폐광을 놀이터 삼아 돌아다니며 발견했던, 제국 행정망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고대 환기 통로였다. 흙먼지와 쥐죽은 듯한 어둠이 그를 덮쳤지만, 진혁은 소리 없이 기어갔다. 머리 위쪽에서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비밀 기지의 철문이 뜯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기계 합성음으로 이루어진 제국군의 차가운 수색 명령이 갱도를 울렸다.
간발의 차였다. 진혁은 좁은 통로를 기어가며 각혈하듯 푸른 빛이 감도는 핏방울을 바닥에 흘렸다. 유기체 순수형 육체의 한계가 벌써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 *
몇 시간 뒤, 진혁이 도달한 곳은 카론-4 대학 지부의 외곽 구역이었다.
과거 그의 부모이자 제국 학술원의 저명한 학자였던 서태오 박사와 이윤경 박사가 연구를 진행했던 곳. 그러나 지금은 제국에 의해 이단 반역자로 처형당한 그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사방에 붉은색 압류 딱지가 붙은 채 차갑게 버려진 ‘서태오 박사의 폐쇄된 연구실’이었다.
진혁은 연구실 외벽의 환기구 쇠창살 앞에 멈춰 섰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찌르듯 아팠지만, 그는 품속에서 소형 펄스 절단기를 꺼내 조심스럽게 창살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쇠가 잘려 나가는 미세한 마찰음이 심야의 정적을 깨뜨릴까 봐 진혁은 자신의 기계 진동 공감 감각을 가동해 소음의 주파수를 억제했다.
가까스로 잘라낸 틈새로 몸을 밀어 넣어 연구실 내부로 착지했다. 사방은 짙은 먼지와 오존 냄새로 가득했다. 부모님이 사용하던 책상, 천체 관측 장비들, 그리고 벽면에 걸린 낡은 성간 지도들이 달빛을 받아 음산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모님의 억울한 죽음과 제국의 역사 왜곡이 시작된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때, 연구실 안쪽의 메인 서버실 방면에서 희미한 백색 광선과 함께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책상 뒤편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숨을 죽이고 양자 분석 렌즈의 초점을 조절해 그곳을 바라보았다. 안구 신경이 타들어 가는 통증을 참아내며 렌즈가 스캔한 형상은 제국 학술원 정복 위에 화려한 금빛 사서 예복을 걸친 청년이었다.
‘아서…….’
그는 제국 학술원 원장 오태섭의 명령을 받고 파견된 ‘하급 필사생 (Acolyte Scribe)’이었다. 아서는 거만한 태도로 황금빛 모노클을 만지작거리며, 손에 쥔 ‘양자 데이터 소멸기’를 서태오 박사의 메인 서버 터미널에 연결하고 있었다.
“역시 변방 성계의 쓰레기 데이터들이군. 오태섭 원장님께서 왜 이런 헤르메스 호니, 지구니 하는 이단적인 소설을 다 지우라고 하셨는지 알겠어. 인류의 기원은 오직 황제 시스텐의 기계 승화뿐이거늘.”
아서가 툴툴거리며 터미널 화면에 유적 파괴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카론-4 지하 유적의 봉인막을 완전히 콘크리트로 메워버리겠다는 제국의 행정 명령서가 떠 있었다.
오태섭. 부모님의 절친한 동료이자 학술원의 동지였던 그 자가 권력을 위해 부모를 밀고하고, 이제는 그 연구 흔적마저 완벽히 지우려 하고 있었다. 진혁의 가슴 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불꽃처럼 튀었다.
진혁은 아서가 유물 데이터를 소멸기로 완전히 포맷하기 전에 터미널의 원본 데이터를 가로채야 했다. 그리고 유적의 콘크리트 봉인을 풀기 위해 필요한 ‘제국 보안 인증 토큰 (Security Token)’의 기초 데이터 역시 이 서버실의 백업 코어에 숨겨져 있었다.
진혁은 코트 안쪽에서 ‘양자 암호 해독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겉보기에는 낡은 황동 만년필이었지만, 그 촉 부분에는 제국의 1급 보안 장벽을 우회할 수 있는 고대 지구의 양자 마이크로칩이 내장되어 있었다.
진혁은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바닥을 기어 아서의 등 뒤편에 위치한 보조 터미널 콘솔로 접근했다. 아서는 여전히 메인 화면을 보며 파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혁은 만년필의 촉을 보조 콘솔의 수동 데이터 포트에 정밀하게 삽입했다.
찌릿-
미세한 정전기 스파크와 함께 만년필 내부의 칩이 연구실의 비밀 도어락 및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에 동조되기 시작했다. 진혁의 시야 속 양자 렌즈가 황금빛 그리드를 그리며 서버 내부의 숨겨진 파티션을 스캔해 냈다.
[보안 장벽 감지: 제국 학술원 1급 암호화 프로토콜]
이모 이설아가 남겼던 우회 공식을 적용할 차례였다. 진혁은 만년필의 신호를 제어하며 우회 알고리즘을 터미널에 주입했다. 데이터 게이트가 열리고, 부모님의 처형 배후에 오태섭 원장이 개입했다는 비밀 밀고 서한과 카론-4 지하 유적의 봉인 코드가 실시간으로 다운로드되기 시작했다.
[다운로드 진행률: 45%... 60%...]
그 순간, 보조 콘솔의 냉각 팬이 급격히 회전하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서가 작성하던 메인 터미널 화면에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였다.
“뭐지? 네트워크 패킷 우회? 이단 서명이 왜 여기서 감지되는 거야?”
아서가 당황하며 보안 터미널을 차단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떤 쥐새끼가 시스템에 들어온 거지? 당장 격리하겠다!”
아서의 행정 권한이 진혁이 다운로드 중인 포트를 강제로 폐쇄하려 들었다. 다운로드 게이지가 78%에서 멈춰 섰다. 이대로 차단당하면 데이터는 영구 유실되고, 진혁의 위치도 노출될 위기였다.
진혁은 이를 악물고 만년필의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하급 필사생 주제에, 고대 지구의 프로토콜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진혁은 ‘고대 코드 강제 오버라이드’ 기술을 격발했다. 만년필 촉을 통해 고대 지구 연합 정부의 최상위 보안 프로토콜이 제국의 신형 시스템 위로 사정없이 덮어씌워졌다.
콰아아아-
아서의 터미널 화면이 순식간에 녹색 고대 지구 문양으로 채워지며 완전히 동결되었다. 아서의 행정 제어권이 강제로 박탈당한 것이다. 아서는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렸지만, 모니터는 그의 명령을 거부한 채 차갑게 빛날 뿐이었다.
“이, 이게 무슨……! 시스템이 강제 잠금되었다고? 말도 안 돼!”
아서가 경악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보조 콘솔 앞, 먼지 자욱한 어둠 속에서 황금빛 왼쪽 눈을 번뜩이며 만년필을 쥐고 있는 가죽 코트 차림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너…… 서진혁!”
아서의 비명과 동시에 연구실의 중앙 경보 시스템이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경고: 일급 이단자 침입. 구역 폐쇄 프로토콜 가동. 경비대 소환.]
“경비대! 당장 이 방을 폐쇄해라! 반역자가 여기 있다!”
아서가 소리치며 복도로 달아나려 했다. 연구실의 두꺼운 이중 강철 보안 문이 무거운 기계음을 내며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외부 창문마다 붉은색 전자기 차단 장막이 쳐지며 퇴로가 차단되고 있었다. 대학 지부 courtyard를 순찰하던 총독부 사설 경비대의 서치라이트 불빛들이 창문을 뚫고 연구실 내부를 거칠게 훑었다.
진혁은 다운로드가 100%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콘솔에서 양자 만년필을 거칠게 뽑아냈다.
그의 손에는 이제 오태섭의 배신 서한과 지하 유적의 봉인 코드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문은 이미 절반 이상 내려앉았고, 복도 너머로 중장갑 보초병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탈출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진혁은 천장 부근에 매달린 좁은 환기구 해치를 향해 몸을 날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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