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검은 세럼
카론-4의 지하는 언제나 시리도록 차가운 청색 우주 먼지로 가득했다.
버려진 광산의 제4구역, 무너진 갱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서진혁의 비밀 기지는 웅웅거리는 노후 발전기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진혁은 낡은 가죽 코트 깃을 바짝 여몄다. 신체의 단 1%도 기계로 개조하지 않은 ‘개조율 1단계: 유기체 순수형(Pure Bio)’인 그에게 변방 행성의 지하 냉기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물리적인 고통이었다. 인공 온열 장치가 내장된 의체를 가진 자들이라면 느끼지 못할 한기였다.
“하지만 이 차가운 육체야말로 제국의 눈을 피할 유일한 방패지.”
진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유리 앰플을 바라보았다. 앰플 내부에서 일렁이는 액체는 겉보기에는 영롱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제국 신권 재판소와 학술원이 전 은하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하는 ‘영생 백신’.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유기체를 보호하고 세포 수명을 무한히 연장해 준다는, 제국이 신성시하는 인류 진화의 기적이었다.
진혁은 숨을 고른 뒤, 왼쪽 눈에 장착된 황금빛 양자 분석 렌즈를 작동시켰다.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그의 왼쪽 안구가 황금빛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양자 렌즈 미세 문자 스캔’ 기술이 활성화되자, 은빛 액체의 분자 구조가 수억 개의 기하학적 그리드와 양자 코드로 분해되어 그의 시야에 투사되었다.
“단순한 방사선 차단제가 아니야. 이 배열은…….”
진혁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캔 화면에 나타난 염기서열은 비정상적으로 조작되어 있었다. 특정 구간의 나선 구조가 마치 가위로 잘려 나간 것처럼 뚝뚝 끊어져 있었다. 이것은 자연적인 돌연변이가 아니었다. 고도로 설계된 인위적인 절단이었다.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진혁은 품속에서 오래된 금속 만년필을 꺼냈다. 만년필 내부에서 추출한 ‘부모님의 일기장 마이크로칩’을 분석 터미널의 리더기에 조심스럽게 삽입했다. 이 칩에는 제국 학술원의 저명한 천체물리학자이자 유전학자였던 그의 부모, 서태오 박사와 이윤경 박사가 처형당하기 직전 목숨을 걸고 숨겨둔 원본 게놈 데이터가 담겨 있었다.
화면 위에 부모님의 연구 일지와 이모 이설아가 남긴 역사 검열 우회 공식이 떠올랐다. 진혁은 우회 공식을 스캔 데이터에 대조했다. 복잡한 알고리즘이 맞물려 돌아가며, 제국이 감추어 두었던 은빛 액체의 진짜 이름이 터미널 화면에 붉은 글씨로 새겨졌다.
[분석 완료: 안티 게놈 세럼(Anti-Genome Serum)]
“백신이 아니라…… 유전자 퇴화 유도 약물이었어.”
진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국이 영생의 축복이라 부르던 백신의 실체는 인간의 순수한 유기체 유전자를 천천히 손상시켜 퇴화를 유도하는 독약이었다. 백신을 복용한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물학적 육체의 기능을 잃게 되고, 결국 생존을 위해 제국이 제공하는 기계 의체 개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신체의 절반 이상을 기계화하는 순간, 제국 황제의 양자 정신 지배망에 영원히 종속되는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인류가 온전한 인간성을 잃고 기계 부품으로 변해가는 거대한 음모. 제국은 이 위대한 역사 조작을 은폐하기 위해 부모님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던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학자로서의 분노와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이 진혁의 전신을 지배했다.
그 순간, 기지 내부의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적색으로 점멸하며 고음의 경보음이 갱도를 찢었다.
삐이이이-!
[경고: 비정상적 아카이브 접근 감지. 제국 학술원 중앙 감시 AI 역추적 가동.]
“벌써 알아챈 건가!”
진혁은 급히 터미널의 보조 방화벽을 가동했다. 하지만 제국 학술원의 최신 보안 프로토콜은 압도적이었다. 화면 오른쪽에 표시된 방화벽 수치는 단 5초 만에 0%로 떨어지며 허무하게 붕괴했다. 제국 중앙 AI의 역추적 신호가 기지의 양자 방어망을 종이장처럼 찢어발기며 진혁의 뇌 신경망을 직접 타겟팅하기 시작했다. 순수 유기체 뇌를 가진 진혁에게 제국의 강제 뇌파 해킹은 즉사급의 인지 과부하를 초래할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귓가에서 뇌를 찌르는 듯한 고주파 노이즈가 폭발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진혁은 이를 악물었다. 도망칠 시간도, 물리적으로 맞설 무기도 없었다. 오직 지략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정신적 기억 장벽 가동’ 기술을 활성화했다. 그는 뇌의 모든 고차원 인지 활동을 강제로 정지시키고, 자신의 뇌파 주파수를 일시적으로 동결시켰다. 스스로 유도한 가상 뇌사 상태. 제국의 정신 탐지 스캐너가 그를 생명 신호가 없는 단순한 유기체 더미로 오인하도록 기만하는 전술이었다.
“으윽……!”
극심한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뇌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과부하를 호소했지만, 진혁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백업 장치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해독된 안티 게놈 세럼의 원본 분석 데이터가 그의 휴대용 칩으로 흘러 들어갔다.
[전송 완료: 100%]
데이터 백업 성공과 동시에 진혁은 마지막 전력을 다해 기지의 메인 물리 전력 레버를 아래로 후려쳤다.
콰직-!
스파크가 튀며 기지 내부의 모든 전원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웅웅거리던 발전기 소리가 멈추고, 붉은 경보등도 꺼지며 깊은 어둠과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국의 역추적 해킹 신호도 전력 차단과 함께 단절되었다.
진혁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귀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피가 뺨을 타고 가죽 코트 깃을 적셨다. 극심한 두통으로 눈앞이 흐릿했지만, 그는 품속에 백업된 데이터 칩을 단단히 쥐었다. 마침내 제국의 추악한 기만을 입증할 실증적 물증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어둠뿐인 지하 폐광 기지 입구 틈새로 낯설고 위협적인 백색 광선들이 비쳐 들기 시작했다. 서치라이트의 날카로운 불빛들이 먼지 쌓인 콘크리트 벽면을 훑고 지나갔다. 기지 외곽 벽 너머로 제국 정찰대의 무거운 군화 소리와 기동 바이크의 엔진 저음이 갱도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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