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의 쓸개, 음양의 첫 단추
지독한 한기가 발밑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칠성동 동굴 깊은 곳, 막다른 절벽 끝에 등을 기대고 선 백서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의 구덩이와 다름없는 백사굴(白蛇窟)이었다. 사방을 분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수천, 수만 마리의 흰 뱀들이 서로의 차가운 몸뚱이를 뒤엉키며 만들어내는 마찰음이 서걱, 서걱거리며 동굴 벽을 타고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횃불도 없는 심연 속이었으나, 서진의 심장에 박힌 극독의 공명 덕분에 활성화된 독기 감지 (毒氣感知) 능력은 어둠을 뚫고 그 기괴한 백색의 소용돌이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이것이 백사의 냉독인가.’
서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팍의 붕대 사이로 흘러내린 검붉은 독혈이 바닥을 적실 때마다, 백사들이 그 피비린내와 독기에 자극받아 구덩이 가장자리를 타고 꿈틀거리며 기어올랐다. 그의 신체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제갈세가의 살수견들에게 물어뜯긴 오른쪽 어깨에서는 뜨거운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고, 부러진 채 억지로 맞춘 오른쪽 무릎 관절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뼈를 갈아내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다. 왼팔은 이미 완전히 마비되어 괴사한 채 가슴팍에 가죽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동굴 입구 방향에서 횃불의 벌건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흐흐흐, 쥐새끼가 결국 이 깊은 구덩이까지 기어 들어왔구나!"
살수견 훈련사 견무의 오만한 목소리가 동굴 내부를 울렸다. 쇠사슬이 돌바닥을 긁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은 살수견 한 마리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침을 흘리는 소리가 좁은 석실 안을 가득 채웠다. 견무는 서진이 완전히 막다른 절벽 끝에 몰린 것을 보고 승리를 확신한 듯 비열하게 웃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대로 잡혀 단전이 깨진 채 제갈세가의 인간 독로로 쓰이다 비참하게 죽어가느냐, 아니면 눈앞의 극독을 삼키고 스스로 괴물이 되어 살아남느냐.
서진은 오른손을 번개처럼 아래로 뻗었다. 독기 감지 능력으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서진의 아귀가 구덩이 가장자리를 기어오르던 거대한 백사 한 마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뱀이 그의 오른팔을 감싸 안으며 날카로운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었지만, 통각을 차단한 서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서진은 이빨로 백사의 배 가죽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검푸르고 서릿발 같은 냉기를 품은 쓸개, 흑토곡 백사담(黑土谷 白蛇膽)을 산 채로 적출해 냈다.
"저 미친 새끼가……!"
횃불을 들고 석실 안으로 진입하던 견무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경악 어린 비명을 질렀다.
서진은 망설임 없이 백사담을 입안에 털어 넣고 이빨로 짓씹었다.
콰직, 하며 쓸개가 터지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비릿함과 함께 얼음 송곳으로 위장을 꿰뚫는 듯한 극단적인 냉독(冷毒)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커헉……!"
서진의 입에서 검붉은 피와 함께 푸르스름한 성에가 섞여 나왔다. 냉독이 식도를 지나 위장에 닿는 순간, 그의 척추 전체가 하얗게 얼어붙는 듯한 극심한 오한이 찾아왔다. 심장 주변에서 타오르던 칠성탈명침의 화독이 갑자기 침투한 이질적인 냉독에 반응하여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길과 차가운 얼음 칼날이 그의 가슴속에서 정면으로 충돌하며 세포 하나하나를 찢어발겼다. 전신의 모공에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고, 서진의 신형은 격렬하게 진동했다.
‘지금이다. 다스려야 한다.’
서진은 이빨을 부딪치며 음한독기 순환법(陰寒毒氣 循環法)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미친 듯이 복기했다. 파괴된 단전터 주변에서 갈 갈이 찢어진 기맥의 틈새로 냉독의 기운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척추 경맥을 타고 차가운 기운을 등 뒤로 끌어 올리자, 심장의 화독이 뿜어내던 뜨거운 작열감이 한풀 꺾이며 기적적으로 맥상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두 극독이 서로를 밀어내며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가는 가혹했다. 미처 통제하지 못한 강력한 냉독의 파편이 그의 오른쪽 다리로 들이닥쳤다.
쩍, 쩍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서진의 오른쪽 무릎과 발목 관절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뼈를 깎는 골절상 위에 영구적인 냉독의 동상 패널티가 가해진 것이다. 서진은 다리를 움직이려 했으나, 오른쪽 다리는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된 것처럼 완전히 굳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일시적인 보법 전개 불가능 상태에 빠진 것이다.
"하하하! 독에 미쳐서 스스로 뱀 쓸개를 처먹더니 다리가 얼어붙었구나! 이 쓸모없는 폐물 새끼, 결국 제 발로 무덤을 팠어!"
견무가 그 모습을 보고 광소를 터뜨리며 살수견의 목줄을 풀어놓았다.
"가라! 그 얼어붙은 다리를 물어뜯어라!"
마지막 남은 거대한 사냥개가 으르렁거리며 서진의 얼어붙은 오른쪽 다리를 향해 덮쳐왔다. 기동력을 상실한 서진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진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서늘한 살기만이 맴돌았다. 그는 왼팔을 묶은 가죽 끈 틈새로 오른손을 집어넣어, 늙은 약초꾼 노가가 깎아 주었던 흑사죽 신형 피리를 꺼내 들었다.
서진은 피리를 입에 물고, 역침쇄명결로 제어한 백사담의 냉독 진기를 피리 구멍 속으로 강하게 불어넣었다.
지이이이잉-
인간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미세하고 날카로운 고주파 음파가 칠성동의 좁은 석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백사굴의 뱀들을 미친 듯이 자극하는 죽음의 진혼곡이었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음향이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스스스스스스스슥!
구덩이 깊은 곳에서 서식하던 수천 마리의 흰 뱀들이 피리 소리에 반응하여 폭포수처럼 구덩이 위로 쏟아져 나왔다. 석회질로 하얗게 변한 뱀들의 비늘이 횃불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반짝였다. 뱀들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순식간에 석실 바닥을 뒤덮었고, 달려들던 사냥개의 온몸을 칭칭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깨갱! 깽!"
사냥개가 날카로운 이빨로 뱀들을 물어뜯으려 했으나, 사방에서 조여드는 수백 마리의 백사 무리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뱀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사냥개의 가죽을 뚫고 냉독을 주입하자, 사냥개는 이내 온몸이 하얗게 마비된 채 바닥으로 쓰러져 거품을 물었다.
"이, 이게 무슨……! 뱀을 부리는 무공이란 말인가!"
견무가 경악하여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미 그의 발목 역시 수십 마리의 흰 뱀들이 감아 올라가고 있었다. 냉독이 장화를 뚫고 피부로 스며들자 견무의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갔다. 제갈세가의 하급 무사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횃불을 사방으로 휘둘렀지만, 뱀들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진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백사담의 영향으로 푸르스름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독기 감지 능력이 어둠 속에서 기혈이 얼어붙어 비틀거리는 견무의 심장 위치를 붉은 선으로 선명하게 그려냈다.
서진은 오른손으로 이가 빠진 검은 철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체내에서 순환하는 백사의 냉기를 검신으로 길게 인도했다.
스으으으읍.
묵철검의 깨진 날 사이로 푸르스름한 성에가 끼기 시작하더니, 이내 검붉은 독기와 냉기가 결합한 서늘한 음한검강(陰寒劍罡)의 기운이 검신 전체를 두껍게 감싸 안았다. 비록 다리는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지만, 서진에게는 묵철검의 엄청난 중량감과 회전력을 이용한 일격이 있었다.
서진은 얼어붙은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몸을 반바퀴 기괴하게 회전시켰다. 빗자루를 쓸던 궤적이 무거운 묵철검 끝에 실려 허공을 갈랐다.
소지검로(掃地劍路)!
검붉고 푸른 서리 기운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가며, 뱀들에게 묶여 비틀거리던 견무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 살려……!"
견무가 비명을 지르며 사슬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음한검강의 파괴력은 그의 무쇠 사슬과 목뼈를 한순간에 얼려 부수어 버렸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견무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고, 잘려 나간 목 단면에서는 피 대신 하얀 성에와 검은 독혈의 결정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견무의 육체는 얼어붙은 석상처럼 바닥에 쓰러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남은 하급 무사들 역시 서진의 사나운 검기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동굴 밖으로 달아났다.
서진은 묵철검을 지면에 짚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전신에 가해진 냉독의 역풍으로 인해 걸어 다니기조차 힘든 상태였지만, 마침내 지옥 같은 추격자 견무를 처단하고 칠성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견무의 찢어진 품속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피에 젖은 가죽 주머니였다.
그 가죽 주머니를 열어젖힌 서진의 두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안에는 제갈세가 본가에서 전방 초소로 급히 발송한 극비 서신이 들어 있었다.
[흑토곡에 기괴한 독공을 부리는 백씨 가문의 생존자가 살아있다. 본가에서 파견한 특별 전령이 이 무공의 비밀과 멸구 지시가 담긴 밀서를 지니고 전방 초소로 향하고 있으니, 대주 제갈우는 즉시 전령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서진의 가슴속에서 다시 한번 차가운 복수의 불꽃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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