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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삼키고 경맥을 찢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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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붉은 노을이 흑토곡의 메마른 대지 위로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물가 주변을 에워싼 제갈세가 무사들의 은빛 세검이 붉은 햇빛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그 삼엄한 포위망 한가운데, 사파의 악명 높은 독무수 악건이 서 있었다. 그의 검게 물든 손톱이 어린 순이의 가냘픈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단도의 서슬 퍼런 날이 아이의 살결을 파고들 때마다, 미세한 핏방울이 차가운 쇠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 선택해라. 이 우물물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들이켜라. 마시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이 아이의 목을 베고 흑토곡 전체를 도륙하겠다!"


악건이 내민 나무 바가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푸른 독수가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사파의 비전 극독인 녹소독(綠消毒)이었다. 닿는 모든 생명체를 안에서부터 녹여버리는 강한 부식성의 악취가 서진의 코끝을 찔렀다.


서진은 지독한 침묵 속에서 악건을 응시했다. 그의 창백하고 비쩍 마른 체구는 헤진 회색 삼베옷에 감싸여 있었고, 찢어진 가슴 붕대 사이로 노출된 칠성탈명침의 검붉은 상처 구멍들은 마치 지옥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부서진 오른쪽 무릎 관절은 서 있을 때마다 뼈마디가 비틀리는 극통을 유발했고, 마비된 왼손은 도포 소매 아래에서 죽은 나뭇가지처럼 늘어져 있었다.


지금 상태로 정면 돌파를 감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릎의 골절로 인해 가속 보법인 역천보를 펼칠 수도 없었고, 무모하게 검을 휘둘렀다가는 사나운 악건이 그 전에 순이의 목을 벨 터였다.


‘독을 삼켜야 한다.’


서진의 내면에서 차갑고 침착한 계산이 빠르게 일어났다. 녹소독은 위장과 식도를 녹여버리는 가공할 부식독이지만, 동시에 강력한 음사(陰邪)의 팽창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이 독을 스스로 삼키고, 체내의 역침쇄명결(逆針鎖命訣) 구결을 발동해 그 기운을 경맥 벽으로 유도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심장을 파고드는 칠성탈명침의 화독을 한시적으로 억제하는 상쇄 매개체로 삼는 동시에, 그 파괴적인 팽창력으로 찢어진 경맥을 강제로 확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위장이 녹아내려 즉사할 수도 있는, 목숨을 담보로 한 처절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무고한 이들의 피 위에 세워진 복수는 가문의 명예를 다시 더럽힐 뿐이라는 부친의 가르침이 서진의 영혼을 붙잡고 있었다.


서진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악건이 내민 나무 바가지를 받아 쥐었다. 묵철검의 둔탁한 자루를 쥐고 있던 거친 손가락이 바가지의 가장자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오라버니…… 안 돼요……!"


멱살이 잡힌 순이가 피울음을 터뜨렸고, 뒤편에 쓰러져 신음하던 자치회 주민들이 절망 어린 비명을 질렀다. 경비조장 임씨가 부러진 철검을 짚고 일어서려 했으나 제갈세가 무사들의 검끝이 그의 목을 겨누며 제지했다.


악건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입꼬리를 기괴하게 찢어발겼다.


"흐흐흐, 그래. 그래야 백무흔의 자식놈답지! 어서 마셔라! 네놈의 오장육부가 푸른 진물이 되어 쏟아져 나오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아주마!"


서진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바가지를 입가로 가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푸른 독수를 목구멍 안으로 단숨에 들이부었다.


꿀컥, 꿀컥.


차가우면서도 끈적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서진의 전신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지옥의 불길이 목구멍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 같았다. 녹소독의 강한 부식성이 식도와 위장 벽을 닿는 족족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세포가 타들어 가고 장기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극통이 전신을 덮쳤다.


"컥……! 으으윽!"


서진은 바가지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과 코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진흙바닥에 떨어진 그의 피가 녹소독의 기운과 반응하여 치익 소리를 내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눈동자가 터질 듯이 충혈되었고, 전신의 모공에서 붉은 피안개가 배어 나와 회색 삼베옷을 순식간에 피칠갑으로 만들었다.


"하하하하! 정말로 마셨어! 이 미련한 놈이 기어코 독수를 삼켰구나!"


악건은 순이를 바닥으로 거칠게 밀쳐내며 광소했다. 제갈세가 무사들 역시 검을 낮추며 방심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눈에 서진은 이미 위장이 녹아내려 몇 조각의 숨결조차 이어가지 못하고 죽어갈 시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이 방심한 바로 그 순간, 쓰러진 서진의 내면에서는 가공할 만한 자학의 기공이 요동치고 있었다.


‘지금이다……!’


서진은 뇌공차단 호흡법을 극한으로 전개하여 뇌를 찢는 듯한 통증을 강제로 차단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거칠게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찢어진 붕대 사이로 드러난 검붉은 상처 구멍들, 그 중심에 박혀 있는 세 자루의 은침을 손끝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은침들을 심장 깊숙한 곳을 향해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푸욱!


살이 찢어지고 심장 근육을 은침이 관통하는 섬뜩한 감각이 서진의 이성을 날려버릴 듯 몰아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장에 박힌 칠성탈명침의 화독이 일시에 대폭주를 일으키며 뿜어져 나왔다.


화독의 타오르는 열기와 위장을 녹여버리던 녹소독의 음한한 부식 기운이 체내의 기맥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상극의 두 극독이 부딪치며 발생하는 충격파는 서진의 파괴된 단전터를 거대한 소용돌이로 만들었다.


서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침쇄명결의 독기 전환 구결을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역침쇄명(逆針鎖命)—— 경맥을 열어라!’


두 독기의 무시무시한 반발력과 팽창력이 서진의 찢어지고 닫혀 있던 기경팔맥으로 사정없이 흘러들었다. 폭발적인 기류가 경맥 벽을 안에서부터 강제로 밀어붙였다.


두두두둑!


뼈가 맞춰지고 힘줄이 늘어나는 기괴한 파공음이 서진의 몸 안에서 울려 퍼졌다. 찢어진 채 유착되어 있던 경맥들이 독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강제로 넓어지며 찢겨 나갔다. 매 순간 전신의 살점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으나, 그 대가로 서진의 몸 주변에는 전례 없는 가공할 진기의 폭풍이 일어났다.


역침쇄명 2성(경맥 강제 확장)의 돌파였다.


서진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안광이 완전히 붉게 충혈되어 기괴한 피의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고, 피부 표면에는 검붉은 균열이 생기며 독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어…… 어라? 이놈의 기운이 왜 이래?"


악건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의 오만한 눈동자에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공포가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위장이 녹아내려 죽어가야 할 폐인의 몸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거무죽죽한 검붉은 진기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진은 천천히 일어섰다. 오른쪽 무릎의 관절염 통증조차 강제로 확장된 독기 진기의 압력 아래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는 바닥에 꽂혀 있던 이가 빠진 검은 철검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스으으으.


서진이 묵철검을 들어 올리자, 검신 전체가 검붉은 독기로 휩싸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부식성 녹소독의 기운과 칠성탈명침의 화독이 융합된, 기괴하고 사나운 독기 검강(毒氣 劍罡)이었다.


"이, 이 괴물 같은 새끼가……! 죽어라!"


악건이 비명을 지르며 전신에 녹소독경의 푸른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끝이 기괴하게 팽창하며 강력한 녹소독의 장풍이 서진을 향해 쏟아졌다. 허공에 닿는 모든 공기가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부식되어 나갔다. 일류 독공 고수로서 펼치는 최후의 호신독강(護身毒罡)이었다.


하지만 서진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조차 없었다.


서진은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로 지면을 강하게 디디며, 오른팔 하나만으로 묵철검을 크게 휘둘렀다.


소지검로(掃地劍路)의 변칙 궤적이었다. 마당을 쓸어내듯 검끝을 지면에 낮게 깔아 모래바람을 일깨우는 초식이었으나, 역침쇄명 2성의 폭발적인 내력이 실린 참격은 차원이 달랐다.


콰아아아앙!


검붉은 독기 폭풍이 대지를 찢어발기며 전방으로 휘몰아쳤다. 폭풍에 휘말린 제갈세가 무사들의 은빛 세검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부식되어 가루로 변해 흘러내렸다.


"끄아아악!"


적들의 비명소리가 흑토곡의 밤하늘을 찢었다. 악건이 자랑하던 푸른 호신독강은 서진의 무겁고 투박한 묵철검이 내뿜는 부식성 검강에 부딪치는 순간, 얇은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나며 깨져 나갔다.


"말도 안 돼…… 내 녹소독강이……!"


악건이 경악하여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미 서진의 신형은 그의 코앞까지 육박해 있었다.


서진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악건의 시선과 마주쳤다. 지독한 침묵 속에, 서진의 오른팔 근육이 뒤틀리며 묵철검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서걱!


"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악건의 두 팔이 어깨죽지째 잘려 나가며 허공을 맴돌았다. 검게 물든 그의 손톱이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는 붉은 피 대신 푸르스름한 독혈이 뿜어져 나왔다.


서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반바퀴 회전하며 오른손의 묵철검을 수직으로 곧게 세웠다. 그리고 악건의 비명 횡사하는 입구멍을 향해, 검신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푸우욱!


묵철검의 이가 빠진 거친 날이 악건의 목구멍을 뚫고 들어가 그의 심장을 단숨에 관통했다. 악건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서진의 검 끝에 매달렸다. 그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서진은 검을 거칠게 뽑아냈다. 악건의 거구는 우물가 돌바닥 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그의 잘린 목에서는 푸른 독혈이 우물가 틈새로 흘러내렸다.


서진은 악건의 목을 베어,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물가 버드나무 나뭇가지에 높이 매달아 버렸다. 그것은 흑토곡을 유린하려던 정파의 위선자들과 사파의 졸개들을 향한 피 묻은 경고장이었다.


"오, 오라버니……."


순이가 울먹이며 서진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다. 주민들은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서진을 무능한 벙어리 청소부로 보지 않았다. 스스로 악마가 되어 자신들을 구원한 처절한 복수귀의 탄생을 목격한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카타르시스는 찰나에 불과했다.


"끄으윽……!"


서진은 검을 짚은 채 바닥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체내에 흡수되었던 녹소독의 부식성 기운이 역침쇄명결의 제어 한계를 넘어서며 무서운 반발 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심장의 화독을 억제하기 위해 삼켰던 독수가, 결국 그의 육체를 안에서부터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지독한 오한과 열독이 교대로 전신을 강타했다. 전신의 기맥이 불타오르며 독기 폭주 임계점에 도달했다.


특히, 검은 독기가 집중적으로 흘러들었던 서진의 왼손 경맥이 기괴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매 아래에 감춰져 있던 그의 왼손가락들이 하나씩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며 검게 타들어 갔다. 살점이 괴사하고 신경이 완전히 죽어가는 끔찍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뇌리를 강타했다.


서진은 이빨을 악물며 비명을 삼켰다.


그의 왼손은 이제 완전히 빛을 잃고, 어떤 기운도 통하지 않는 싸늘한 시체처럼 마비되어 버렸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중한 육체를 바쳐야만 하는 잔혹한 등가교환의 법칙이 그의 몸에 지울 수 없는 영구적인 장애를 새겨 넣은 것이다.


서진은 마비된 왼손을 품속으로 거칠게 밀어 넣으며, 오른손으로 묵철검을 꽉 쥐었다.


악건은 처단했고 주민들은 구했으나, 이 피비린내 나는 참살극의 흔적은 곧 무림맹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서진의 특이한 독공과 생존 사실이 정파의 거대한 그림자를 흑토곡으로 끌어들이는 도화선이 될 것임을, 서진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피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 석양빛이 완전히 꺼진 어두운 황무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복수의 길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고, 그의 몸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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