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 흐르는 푸른 죽음
공동묘지를 뒤흔들던 살수견들의 울부짖음과 제갈우의 군마 소리가 잿빛 안개 너머로 멀어질 때까지, 백서진은 비석의 그늘 아래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가슴팍의 가죽 붕대가 처참하게 찢겨 나간 자리에서는 검붉은 독혈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회색 삼베옷을 무겁게 적셨다. 제갈세가 정찰조장의 청풍검기에 직격당한 심장 부근의 흉터가 불타는 숯덩이를 밀어 넣은 것처럼 뜨겁게 요동쳤다. 심장 주변에 박힌 일곱 개의 칠성탈명침이 외부의 충격과 서진의 분노에 공명하여 심맥을 안에서부터 찢어발기듯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컥……!"
서진은 흙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뇌공차단 호흡법을 극한으로 전개하여 통증을 인지하는 뇌의 신경을 강제로 마비시키려 애썼지만, 파괴된 단전터에서 역류하는 화독의 기운은 온몸의 기맥을 태워버릴 기세로 날뛰었다. 설상가상으로, 철쇠의 대장간에서 무거운 묵철검을 휘두르다 어긋나 버린 오른쪽 무릎 관절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뼈마디가 서로 갈리는 듯한 비틀린 통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서진은 묵철검의 둔탁한 자루를 쥔 오른손에 아귀힘을 주었다. 마비되어 검게 변한 왼손은 도포 소매 속에 무력하게 감춰져 있었지만, 오른손만은 가문의 원수들을 단죄하기 전까지 결코 검을 놓을 수 없었다.
서진은 품속에 찔러 넣은 제갈세가의 수색 지도를 만져보았다. 피에 젖어 끈적거렸지만, 제갈세가의 서북부 보급로와 다음 복수 대상인 방계 당숙 백강우의 은신처가 선명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이 지도를 들고 흑토곡 지하 의선의 폐가로 숨어 들어가 전신 기맥을 조율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공동묘지의 시독 안개를 헤치며 흑토곡 주민들이 모여 사는 토굴촌 어귀로 들어섰을 때, 서진의 예민한 후각에 기괴하고 매캐한 냄새가 걸려들었다.
비린내와 유황 냄새가 섞인, 피부를 찌르는 듯한 부식성의 악취였다.
동시에 흑토곡 주민들의 유일한 젖줄이자 식수원인 우물가 방향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무명천의 맑은 물길이 모여드는 거대한 돌 우물 주변에는 이미 흑토곡 자치회 주민들이 사방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아악! 목이…… 목이 타들어 간다!"
"물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살려주시오! 의원님, 제발 내 아이를 좀 살려주시오!"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피를 토하며 우물가 바닥을 긁었다. 아이의 입술은 이미 기괴한 푸른빛으로 변해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치회 경비조장 임씨가 낡은 철검을 쥔 채 쓰러진 주민들을 보호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 역시 절망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진은 무너진 진흙 벽 뒤에 몸을 숨겼다.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검붉게 타올랐다.
독기 감지 능력이 허공에 퍼진 푸른 연기의 성질을 순식간에 분석해 냈다. 사파에서 악명 높은 극독인 '녹소독(綠消毒)'이었다. 쇠가죽도 닿는 즉시 녹여버리는 강한 부식성을 지닌 독물이 우물물 전체를 푸른빛으로 물들이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우물의 돌 틈새마다 닿은 들풀들이 치익 소리를 내며 검게 녹아내렸다.
우물가 중앙에는 녹색 가죽 옷을 걸치고 손톱이 길고 검게 변한 사내가 서 있었다. 제갈세가 장로 제갈표의 지략에 따라 초빙된 사파의 독무수, 악건이었다. 그의 곁에는 제갈세가의 청색 무복을 입은 무사 서너 명이 칼을 뽑아 든 채 주민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악건은 한 손에 붉은 비단으로 포장된 작은 주머니를 가볍게 흔들며, 쓰러진 주민들을 내려다보고 비열하게 웃었다.
"흐흐흐, 흑토곡의 미천한 쥐새끼들아. 이 우물에 풀린 녹소독은 반나절 안에 오장육부를 완전히 녹여버릴 것이다. 해독제를 얻고 싶다면, 밤마다 우리 수색대원들의 목을 따고 도망친 그 가문의 잔당 새끼를 끌어내라! 그놈이 직접 기어 나와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너희는 물론이고 너희 자식새끼들까지 전부 푸른 핏물을 토하며 죽게 될 것이다!"
악건의 조롱 섞인 고함이 메마른 흑토곡의 하늘을 찔렀다.
진흙 벽 뒤에 숨은 서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머릿속에서 과거 부친 백무흔의 온화하면서도 강직했던 목소리가 이명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진아, 의원의 침은 사람을 살리는 데 쓰여야 한다. 하지만 세상을 어지럽히는 위선자들의 독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서진은 이빨을 악물었다. 무고한 평민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괴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걸어둔 최후의 도덕적 한계선이었다. 제갈세가의 위선자들은 그 선을 비열하게 짓밟으며 서진을 사냥하려 들고 있었다.
서진은 품속에서 백동 침통을 만졌다. 비전 침구 세트의 침들이 차갑게 손끝에 닿았다. 지금 상태에서 정면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오른쪽 무릎은 부서져 신법을 전개할 수 없고, 가슴의 가죽 붕대가 찢어져 공력을 조금만 과도하게 끌어올려도 칠성탈명침의 화독이 폭주해 자멸할 터였다.
‘독의 성질을 역용해야 한다.’
서진은 기감을 극대화하여 우물물에 풀린 녹소독의 독성 배열을 읽어 내렸다. 강한 산성을 띠고 있지만, 역침쇄명결의 독기 전환 구결을 사용한다면 체내의 화독을 한시적으로 억제하는 상쇄 매개체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들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서진은 오른손으로 이가 빠진 검은 철검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검은 묵철검의 둔탁한 날이 흙바닥을 스치며 미세한 쇳소리를 냈다.
서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뇌공차단 호흡법으로 전신의 통증을 강제로 가라앉혔다. 그리고 천천히,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진흙 벽 뒤에서 걸어 나갔다.
스으으으.
회색 삼베옷을 입고, 찢어진 붕대 사이로 검붉은 피를 흘리는 창백한 사내의 등장에 우물가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주민들의 신음 소리가 멎었고, 자치회 경비조장 임씨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저, 저 벙어리 청소부가……?"
악건의 안광이 서진의 가슴팍에 노출된 일곱 개의 검은 칠성탈명침 흉터를 향해 꽂혔다. 악건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찢어졌다.
"하하하! 역시 기어 나오는구나! 제갈표 어르신의 예측이 정확했어. 가문의 잔당 놈이 벙어리 행세를 하며 흑토곡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순식간에 제갈세가 무사들이 서진의 사방을 포위하며 은빛 세검을 겨누었다. 서진은 그들의 포위망 한가운데에 서서, 묵철검을 지면에 낮게 내린 채 악건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지독한 침묵이 우물가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악건은 해독제 주머니를 흔들며 서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가문의 비전 의서가 서고 지하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말해라. 그리고 무릎을 꿇고 사지를 바쳐라. 그렇다면 이 미천한 쥐새끼들에게 해독제를 던져주마."
서진은 대답 대신 오른손가락 끝에 진기를 모았다. 소매 속에 감춰둔 은침 한 자루를 튕겨 암수투척으로 악건의 목덜미를 꿰뚫으려는 찰나였다.
그 미세한 살기를 읽은 악건이 비열하게 웃으며,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던 어린 순이의 덜덜 떠는 멱살을 움켜쥐고 독침 단도를 목에 들이댔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여 봐라. 이 꼬맹이의 목구멍에 독칼을 밀어 넣어 뼈까지 녹여주마. 네놈이 가문의 인술을 숭상하는 백무흔의 자식놈이라면, 이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지는 못하겠지?"
비열한 인질극이었다. 서진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멈칫하는 사이, 우물가의 독무는 점점 더 짙어져 쓰러진 주민들의 입에서 거품과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치료가 지체될수록 추가적인 희생은 불행히도 피할 수 없었다. 서진의 정체가 노출되는 대가와 주민들의 목숨이 저울 위에 올랐다.
악건은 서진의 망설임을 비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붉은 해독제 주머니를 바닥에 툭 던졌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더러운 가죽 장화 굽으로 주머니를 짓밟아 뭉개버렸다.
찌그러진 주머니 틈새로 푸른 약즙이 진흙바닥에 스며들며 거품을 일으켰다.
"아차, 내 손이 미끄러졌구나. 해독제를 먹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악건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우물가로 다가갔다. 그는 옆에 놓여 있던 나무 바가지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푸른빛 우물물을 가득 퍼 올렸다. 지독한 부식성 녹소독의 가스가 바가지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악건은 푸른 독수가 가득 든 바가지를 서진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이 우물물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들이켜라. 네놈이 이 독을 삼키고 고통스럽게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진흙 속에 스며든 해독제 가루라도 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마. 마시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이 아이의 목을 베고 흑토곡 전체를 도륙하겠다!"
푸른 독수가 든 바가지가 서진의 창백한 얼굴 앞에서 흔들렸다. 우물물에 투영된 서진의 핏빛 눈동자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서진은 천천히 왼손 마비된 팔을 소매 속에 둔 채, 오른손으로 묵철검을 짚고 악건의 푸른 독수를 바라보았다.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신음 소리가 흑토곡의 핏빛 석양 아래 진혼곡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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