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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더미가 된 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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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을 짓누르던 폭우가 점차 가늘어지고 있었으나, 서북의 밤바람은 여전히 칼날처럼 차가웠다.


백서진은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진흙 바닥에 끌며 흑토곡의 좁은 협곡 입구로 들어섰다. 오른발목에 새겨진 강철 가시 덫의 상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린 통증을 뿜어냈고, 왼쪽 어깨의 관통 자상은 도포 자락을 검붉은 피로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가슴팍 삼베옷 품속에는 방금 전 배신자 백강우의 심장을 꿰뚫고 회수한 가문의 비보, 황금 침구 세트와 무림맹주 독고황의 직인이 찍힌 역모 조작 서신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의 다 왔다.’


서진은 심장을 파고드는 칠성탈명침의 화독을 뇌공차단 호흡법으로 억누르며 은신처인 낡은 서고를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왼손은 여전히 도포 안쪽에 마비된 채 묶여 있었기에, 오직 오른손 하나로 이가 빠진 검은 철검의 자루를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움켜쥔 상태였다. 흑토곡 주민들과 아진, 그리고 철쇠가 기다리는 그 어둡고 고요한 서고만이 그가 유일하게 몸을 뉘일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러나 협곡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서진의 안광이 무섭게 흔들렸다.


매캐한 탄내가 서북의 밤바람을 타고 그의 코끝을 찔렀다. 비구름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것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거대한 불길이었다. 불길의 중심, 그곳은 서진이 낮에는 먼지를 쓸고 밤에는 뼈를 깎는 통증을 참으며 기맥을 조율하던 낡은 서고가 있는 자리였다.


“아……!”


서진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불타오르는 서고의 지붕이 굉음과 함께 무너지며 사방으로 붉은 불꽃을 비산시켰다. 건조한 목조 건물은 이미 거대한 아궁이처럼 변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청색 무복을 입은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물러설 길을 완전히 차단한 채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 불타오르는 서고 내부에서 뭉개진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혀가 잘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소년의 절박한 울부짖음. 아진이었다.


‘아진이 안에 있다.’


서진의 이성이 분노로 하얗게 불타올랐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부서진 다리와 찢어진 경맥의 한계를 계산하지 않았다.


쿵!


역천보(逆天步)의 폭발적인 기동력이 대지를 강타했다. 서진은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에 역침쇄명결의 독기를 강제로 밀어 넣으며 불타오르는 서고의 정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침입자다! 상이마인이 나타났다!”


외곽을 경비하던 제갈세가 무사들이 경보를 울리며 검을 뽑아 들었으나, 서진의 신형은 이미 그들의 시야에서 잔상만을 남긴 채 사라진 뒤였다. 서진은 타오르는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는 서고의 불길 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화염의 열기가 숨통을 막아왔다. 가슴팍의 상처가 고열에 반응해 칠성탈명침의 화독을 극도로 자극했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통증 속에서도 서진은 독기 감지 능력을 전개해 사방의 화염 장막 속에서 아진의 기척을 찾았다. 서고 구석, 무너진 책장 아래에 머리를 감싸 쥐고 쓰러져 있는 작은 소년의 형체가 붉은 안광 속에 잡혔.


서진은 묵철검을 휘둘러 불타는 책장 더미를 단숨에 쳐냈다. 그리고 묶여 있는 왼손 대신 오른팔로 아진의 작은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로 호이스트했다. 미리 찢어둔 회색 삼베 끈으로 아진의 몸을 자신의 가슴과 단단히 동여맨 서진은, 무너져 내리는 불타는 지붕을 향해 묵철검을 거칠게 내리찍으며 밖으로 탈출했다.


콰아앙!


화염과 먼지 안개를 뚫고 밖으로 튕겨 나온 서진의 앞을, 한 사내가 가로막아 섰다.


정갈한 청색 비단 도포를 입고, 차가운 눈빛에 긴 백수염을 휘날리는 중년의 고수. 그의 손에는 은은한 푸른빛 서리 기운을 뿜어내는 명검, 청류검(靑流劍)이 들려 있었다. 제갈세가의 장로이자 화경의 초입에 달한 대고수, 제갈송(제갈송)이었다.


“제갈우를 죽이고 가문의 피를 빤 벌레 놈이 결국 제 발로 기어 나왔구나.”


제갈송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의 주변으로 일류급 실력을 지닌 제갈세가의 정예 살수 세 명이 검을 비스듬히 쥔 채 서진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서진은 아진을 등에 업은 채 반토막 난 묵철검의 자루를 고쳐 잡았다. 오른손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독혈이 빗물과 섞여 뚝뚝 떨어졌다.


“가문의 유산을 훔친 배신자들을 단죄했을 뿐이다.”


“미천한 마귀 놈이 입을 놀리는구나. 네놈의 기괴한 독공도 내 청풍파동검 앞에서는 한낱 먼지에 불과할 터.”


제갈송이 가볍게 청류검을 휘둘렀다. 순간, 허공을 가르는 푸른 검강이 바람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제갈세가 상급 절기, 청풍파동검(靑風波動劍)이었다.


서진은 묵철검의 중량감을 이용해 정면으로 검강을 막아서려 했다.


콰아아앙!


그러나 화경 고수의 내력은 단전이 깨진 서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폭발적인 바람의 충격파가 서진의 묵철검을 때려눕히며 그의 신형을 뒤로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청풍파동검의 예리한 검강 한 줄기가 서진의 가슴팍을 정확히 타격했다.


쩌억!


서진의 삼베 도포 안쪽에 장착되어 있던 묵철 흉갑(묵철 흉갑)이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깊숙이 함몰되었다. 단단한 묵철판이 으스러지며 가슴뼈를 압박했고, 그 충격으로 심장 주변에 박혀 있던 일곱 개의 칠성탈명침이 살점 깊숙한 곳으로 더 깊이 밀려 들어갔.


“컥……!”


내장이 파열되는 듯한 극통과 함께 서진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는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전신의 경맥이 일시에 꼬이며 독기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으으윽!”


등 뒤에 묶인 아진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서진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제갈송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청류검 끝에 다시 한번 푸른 검강을 응축시켰다. 정예 살수 세 명 역시 검을 치켜들며 서진의 사지를 끊어내기 위해 좁혀왔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서진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품속의 황금 침구 세트를 떠올렸다. 이대로 제갈송의 다음 일격을 맞으면 아진과 함께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스스로의 생명을 불태워 최후의 힘을 쥐어짜 내야만 했다.


서진은 오른손으로 품속에서 서른여섯 개의 황금 침(황금 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자신의 가슴팍과 목덜미, 그리고 끊어진 기맥의 주요 단면들을 향해 황금 침들을 동시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자학 비기, 일시적 일류 경맥 복구(일시적 일류 경맥 복구)였다.


“아아아아악!”


서진의 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금 침이 뼈와 신경을 직접 관통하는 순간, 그의 흑발 중 몇 가닥이 눈부신 백발로 변해갔다. 전신의 땀구멍과 상처 부위에서 붉은 핏방울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와 사방을 붉게 물들였다. 파괴되었던 단전터에 독기와 혈류가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임시 단전을 형성했고, 폭발적인 검붉은 진기가 그의 사지로 휘몰아쳤. 단 3분 동안 과거 천재 시절의 경맥 흐름을 강제로 재현하는 광기의 비술이었다.


“무슨 기괴한 짓을……! 쳐라!”


제갈송이 경악하며 명령했다. 정예 살수 세 명이 서진을 향해 동시에 쇄도했다.


그러나 서진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붉은 안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스스슥!


서진의 신형이 제갈세가 살수들의 눈앞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역천보의 가속력에 폭발적인 일류의 진기가 더해진 속도였다.


스사삭!


회색 먼지 안개 속에서 한 줄기 검붉은 검선이 그어졌다.


“윽……!”


단 한 번의 참격이었다. 서진의 사나운 독기와 진기가 실린 묵철검이 허공을 가르자, 쇄도하던 제갈세가 정예 살수 세 명의 목이 일시에 잘려 나갔다.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지며 세 구의 시체가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이, 이놈이……!”


제갈송의 안광이 극심한 경악으로 뒤틀렸다. 단전이 깨진 폐물이라 믿었던 놈이 순간적으로 일류 고수의 폭발적인 힘을 뿜어내며 자신의 정예들을 도륙했기 때문이다. 제갈송이 다급히 청류검을 치켜들며 전력을 다한 청풍파동검의 검강을 형성하려 기를 모았다.


서진은 제갈송과 전면전을 벌일 시간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일시적 경맥 복구의 제한 시간은 이미 흐르고 있었고, 그의 온몸의 혈관은 압력을 견디지 못해 하나씩 터져 나가고 있었다.


서진은 묵철검을 양손으로 쥐는 대신, 오른손 하나로 검을 거꾸로 쥐고 지면을 향해 전력을 다해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폭발적인 검붉은 진기가 지면을 강타하며 낡은 서고 앞마당의 바위 지반이 통째로 폭파되었다. 거대한 흙먼지와 돌풍이 제갈송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 자욱한 먼지 장막을 틈타, 서진은 아진을 가슴에 안고 서고 뒤편의 가파른 절벽 아래 어두운 숲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낙하의 순간, 서진의 의식은 이미 급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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