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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씻는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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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대지를 사납게 두들겼다. 성읍의 밤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끝내 눈물 같은 폭우를 쏟아내며, 흑토곡 외곽 성읍의 기와지붕들을 사정없이 때려눕히고 있었다. 거리에 고인 진흙탕 물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수없이 많은 거품을 만들어냈다 사라졌다.


그 어둡고 축축한 길 한가운데를, 한 사내가 고요히 걸어가고 있었다. 깊게 눌러쓴 대나무 삿갓 아래로 창백하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백서진이었다. 그의 왼팔은 검게 마비된 채 삼베 도포 안쪽 가슴팍에 단단히 묶여 움직이지 않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며 진흙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의 오른손에는 가죽 끈으로 칭칭 동여맨, 무겁고 투박한 이가 빠진 검은 철검이 빗물을 머금은 채 쥐여 있었다.


제갈우를 참살하고 초소를 피바다로 만든 뒤 얻은 상처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왼쪽 어깨의 깊은 관통 자상과 오른쪽 무릎의 세검 자상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독혈이 빗물에 씻겨 내리며 도포 자락을 검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서진은 신음 한 자락조차 뱉지 않았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사납게 날뛰는 칠성탈명침의 화독을 역침쇄명결의 내공으로 억누르고, 뇌공차단 호흡법을 통해 전신을 찢는 듯한 고통을 강제로 뇌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뼈에 사무치는 복수심과 차가운 이성뿐이었다.


성읍의 서쪽 검문소에 도달하자, 횃불을 든 경비병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멈춰라! 통행증을 제시하라. 이 폭우 속에 성읍으로 들어서려는 자가 누구냐?"


서진은 말없이 도포 자락 속에서 놋쇠로 주조된 묵직한 패를 꺼내 보였다. 붉은 빗물에 젖은 채 차갑게 빛나는 그것은, 제갈세가 하급 대주 제갈우의 요패였다. 경비병들은 요패에 새겨진 제갈세가의 문양을 확인하는 순간, 사납게 부르짖던 목소리를 즉시 죽이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제, 제갈세가의 어르신이셨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서 들어가십시오!"


요패 하나에 검문소의 철문이 무겁게 열렸다. 정파의 기득권 세가들이 부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얼마나 추악하고 편리한지, 서진은 입가에 쓸쓸한 비웃음을 머금으며 성읍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 제갈세가의 비호 아래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배신자의 사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성읍 북방, 화려한 청기와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가문이 멸문당할 당시 백씨의가의 가솔 백여 명이 단두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참수당할 때, 무림맹의 압박에 굴복해 가문의 비밀 약방 지도를 넘겨주고 생명을 구걸했던 방계 당숙 백강우의 사저였다. 그는 가문의 피를 판 대가로 얻은 금화로 이 대저택을 사고, 제갈세가의 하급 가솔 대접을 받으며 밤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


서진은 저택의 높은 담장 아래 멈춰 섰다. 빗물에 젖은 담장은 미끄러웠고, 그의 오른쪽 무릎은 관통상으로 인해 도약하기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서진은 이를 악물고 역천보의 기동력을 억지로 쥐어짜 내어 몸을 띄웠다. 담장을 넘는 순간, 지면 수풀 사이에 정밀하게 가려져 있던 가느다란 철선이 그의 오른쪽 발목을 스쳤다.


팅!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바닥에서 강철 가시 덫이 솟구쳐 올랐다. 서진은 급히 신형을 비틀었으나, 절뚝거리는 다리의 한계로 인해 오른쪽 발목 살점이 예리한 강철 가시에 긁혀 나갔다. 얕은 자상이었지만 차가운 빗물이 상처에 닿자 뼈가 시려 왔다. 서진은 바닥에 착지하며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발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진흙을 적셨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지만, 몸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경고였다.


저택 안마당에는 제갈세가에서 파견한 정예 호위무사 세 명이 창을 쥔 채 삼엄하게 순찰을 돌고 있었다. 빗소리가 워낙 거세어 서진의 절뚝거리는 발소리는 묻혔으나, 무인들의 예리한 기감이 언제 그의 존재를 알아챌지 몰랐다.


서진은 묵철검의 가죽 끈을 오른손 아귀에 단단히 조여 쥐었다. 정상적인 내공이 없는 서진은 오직 심장의 화독과 백사담의 냉독이 기맥 속에서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팽창력만을 무서운 힘으로 환원시켰다.


스스슥.


서진은 빗자루를 쓸던 마당의 궤적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낮게 신형을 웅크렸다. 그리고 적들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향한 찰나, 지면을 낮게 쓸어 담으며 묵철검을 휘둘렀다.


소지검로(掃地劍路)!


무겁고 이가 빠진 검은 철검이 빗물을 가르며 원을 그렸다. 검붉은 진기와 차가운 서리 기운이 뒤섞인 참격이 수풀을 쓸어 넘기며 정예 호위무사 3인의 발목을 향해 사납게 쇄도했다.


콰직! 콰직!


검이 뼈와 힘줄을 파고드는 둔탁한 파열음이 거센 폭우 소리에 묻혀 나지막하게 울렸다. 단 한 번의 회전 참격에 호위무사 세 명의 발목 힘줄이 일시에 끊어져 나갔다. 적들은 비명을 지르려 목청을 높였으나, 서진은 이미 역천보의 가속력으로 그들의 목덜미를 차례로 그어버린 뒤였다. 붉은 선혈이 빗물과 섞여 마당의 대리석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세 구의 시체는 비명 한 자락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차가운 진흙 바닥 위로 쓰러졌다.


서진은 시체들을 지나쳐, 불이 밝혀져 있는 저택의 가장 깊은 안방 침실로 향했다. 문가에 도달하자 안쪽에서 가래 끓는 듯한 기름진 목소리와 함께 장신구가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


"허허, 제갈세가의 장로님들께서 이번에 바칠 황금 침구 세트를 보시면 필시 크게 기뻐하시겠지. 내게 더 큰 약방의 운영권을 주시기로 약조하셨으니, 이제 방계라는 꼬리표를 떼고 완벽한 세가의 일원으로 대접받을 날이 멀지 않았구나."


백강우였다. 그는 침상 머리에 앉아 황금빛 찬란한 백씨의가 비전 침구 세트(백씨의가 비전 침구 세트)를 품에 안고 탐욕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문원들의 목숨과 바꾼 은혜를 은화로 환산하며, 가문의 비보를 원수들에게 바쳐 더 큰 영달을 누리려는 추악한 몰골이었다.


서진은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여닫이문을 부수듯 열어젖혔다.


쾅!


차가운 빗바람과 함께 피비린내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백강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누, 누구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제갈세가의 사저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백강우의 호통은 문가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대로 목구멍 속으로 막혀 버렸다. 대나무 삿갓 아래로 드러난, 핏기 없이 창백하고 해골처럼 마른 얼굴. 가슴팍의 찢어진 삼베옷 사이로 드러난 일곱 개의 검붉은 침공과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사나운 독기.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피 묻은 이가 빠진 검은 철검.


"너…… 너는…… 서진이냐? 서진이 네놈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이냐! 분명 칠성탈명침을 맞고 흑토곡의 구덩이에서 죽었다고 들었거늘!"


백강우의 눈동자가 극심한 공포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품에 안고 있던 황금 침구 세트가 그의 손에서 비틀거렸다.


"당숙, 가문의 피를 팔아 마시는 술은 달콤하더이까."


서진의 목소리는 지옥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서리 바람처럼 차가웠다. 그는 절뚝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며 방 안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왔다. 검끝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내뿜었다.


"서, 서진아! 오해다! 나도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무림맹의 압박 속에서 나마저 죽으면 우리 백씨 가문의 핏줄이 완전히 끊어질까 두려워……!"


백강우는 침상 뒤편으로 물러서며 가문의 정을 비열하게 언급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 끝은 침상 머리에 장치된 비밀 암기통의 실선으로 은밀하게 향하고 있었다. 서진은 독기 감지 능력을 통해 적의 미세한 근육 움직임과 기의 흐름을 완벽히 읽어내고 있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일가친척 백여 명을 참수대 위로 밀어 넣었단 말인가."


"죽어라, 이 마귀 새끼야!"


백강우가 비명을 지르며 실선을 잡아당겼다. 침상 기둥에서 세 자루의 독침 암기가 서진의 얼굴을 향해 기습적으로 발사되었다.


피이익!


날카로운 파공음이 방 안을 갈랐다. 서진은 급박한 순간에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왼손 대신 품속에서 부친이 물려준 백동 거울 파편(백동 거울 파편)을 오른손으로 꺼내 들어 전방을 향해 비스듬히 세웠.


챙!


예리한 독침 한 자루가 백동 거울 파편의 단단한 청동 면에 부딪쳐 불꽃을 튕기며 어긋났다. 동시에 서진은 거울 파편의 각도를 미세하게 조율하여, 침실 벽면에 켜져 있던 촛불의 빛을 백강우의 눈을 향해 강렬하게 반사시켰다.


"으악! 내 눈!"


순간적인 반사광에 백강우가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감고 얼굴을 가렸다. 그 찰나의 빈틈을 서진은 놓치지 않았다.


쿵!


역천보의 가속력이 폭우 속의 번개처럼 작렬했다. 서진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잔상을 남기며 백강우의 코앞으로 쇄도했다. 무거운 묵철검의 검신이 백강우의 오른손 손목을 정면으로 찍어 눌렀다.


콰직!


"끄아아아악!"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백강우의 오른손 손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침상 바닥에 처박혔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소형 암기통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고, 품에 안고 있던 황금 침구 세트 역시 서진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서진은 절뚝거리는 다리로 백강우의 가슴팍을 짓밟아 침상 위로 완벽하게 고정시켰다.


"서, 서진아…… 제발 살려다오! 내가 잘못했다! 가문의 비보도, 내가 가진 모든 은화도 다 네게 주마! 나는 네 당숙이 아니냐! 혈육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백강우는 바스러진 손목을 감싸 쥐고 피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가문의 피를 팔아 귀족 노릇을 하던 오만함은 간데없고, 오직 살고자 하는 추악한 본능만이 비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서진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황금 침구 세트를 회수해 품속에 넣었다. 가문의 고결한 의술이 깃든 보물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서진은 품속에서 부친이 생전에 환부 절개용으로 사용하던 은장도인 백무흔의 은장도(백무흔의 은장도)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은장도의 고결한 은빛 날이 촛불 아래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이 칼은 원래 사람을 살리고 썩은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부친이 평생 소중히 다루던 의술의 도구였다. 하지만 이제는 가문을 배신한 추악한 썩은 살점을 도려내기 위한 처벌의 흉기가 되어 있었다. 서진의 가슴속에서 자괴감과 뼈를 깎는 슬픔이 화독과 함께용솟음쳤다.


"당숙, 이 칼은 아버지가 환자들을 살릴 때 쓰시던 은장도입니다."


"서, 서진아! 제발……!"


"아버지는 이 칼로 썩은 환부를 도려내어 사람을 살리셨지요. 오늘 밤, 나는 이 칼로 가문의 가장 추악한 배신의 썩은 살점을 도려내려 합니다."


서진의 눈동자에서 핏빛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백무흔의 은장도를 백강우의 심장을 향해 깊숙이 밀어 넣었다.


푸학!


"꺼어억……!"


백강우의 비명이 목구멍 안에서 굳어버렸다. 은장도의 예리한 날이 그의 가슴뼈 사이를 관통하여 심맥을 정확히 끊어놓았다. 가문의 고결했던 의술 칼이 배신자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 서진의 내면에는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죄책감과 처절한 슬픔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검을 비틀어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자, 백강우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빠르게 소멸하며 그의 뚱뚱한 육체가 침상 위에서 차갑게 굳어갔.


은장도를 뽑아내자, 칼날 끝에서 검붉다 못해 검은빛을 띠는 배신자의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서진은 차갑게 식어가는 백강우의 시체를 밀쳐내고, 침상 뒤편 벽면에 장치된 비밀 금고를 발견했다. 백강우의 바스러진 손가락을 이용해 금고의 기계 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금화 주머니들과 함께, 무림맹주 독고황의 붉은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극비 서신 한 장이 보관되어 있었다.


서진은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펼쳤다.


[백씨의가가 황실의 비밀 자금을 유용하려 했다는 가짜 명부를 작성하여 황실에 보고하라. 백무흔의 목을 베고 가문을 멸문시킨 뒤, 그들의 의서와 처방전을 회수하여 본 맹으로 압송하라. - 무림맹주 독고황]


가문이 멸문당한 진짜 진상. 그것은 가문이 역모를 꾸민 것이 아니라, 황실의 비밀 자금을 세탁하려던 무림맹주 독고황의 음모를 부친 백무흔이 알아챘기 때문에 벌어진 추악한 조작극이었다. 가문의 억울한 누명과 무림맹의 추악한 이중성이 적힌 결정적인 물증이 서진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서진의 가슴속에서 칠성탈명침이 무섭게 공명하며 검붉은 피가 그의 입가로 흘러내렸다. 복수의 대상이 단순한 제갈세가를 넘어 무림 전체를 지배하는 무림맹주 독고황이라는 거대한 태산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사나운 폭우가 대지를 때려눕히고 있었다. 서진은 피 묻은 은장도와 황실 연판장 서신을 품에 안은 채, 어둠 속으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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