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의 덫
칠성동의 음습한 안개를 뒤로한 채, 백서진은 흑토곡 외곽의 가파른 황토 비탈을 내려갔다. 밤바람은 칼날보다 매서웠고, 가죽 붕대로 조여맨 그의 오른쪽 다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쩍, 쩍 소리를 내며 얼어붙은 관절을 짓눌렀다. 백사담(白蛇膽)의 냉독을 삼켜 심장의 화독을 억제하는 음한독기 순환법을 가동한 대가는 잔혹했다. 오른쪽 무릎 이하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진 채, 마치 무거운 얼음덩어리를 매달고 다니는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질질.
그가 걸을 때마다 이가 빠진 검은 철검(이가 빠진 검은 철검)의 무겁고 투박한 검끝이 돌바닥을 긁으며 불길한 쇳소리를 냈다. 검신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날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어 검이라기보다는 거친 쇳덩어리에 가까웠다. 마비된 왼손은 가슴팍의 붕대 틈새에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서진의 두 눈동자만은 백사담의 푸른 기운과 심장의 검붉은 살기가 뒤엉켜 기괴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본가로 향하는 전령이 기밀을 전하기 전에 초소를 부수어야 한다.’
서진은 품속에 넣은 제갈세가의 기밀 서신을 어루만졌다. 견무의 사체에서 빼앗은 서신에는 그의 생존 사실과 기괴한 독공의 존재가 적혀 있었다. 이 사실이 제갈세가 본가와 무림맹주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아직 힘을 온전히 기르지 못한 서진의 복수극은 시작되기도 전에 무너질 터였다.
비바람을 뚫고 저 멀리 황토 요새의 윤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세가 전방 초소(제갈세가 전방 초소)였다. 거친 통나무를 깎아 만든 이중 목책과 높이 솟은 감시탑, 그리고 그 주위를 삼엄하게 순찰하는 무사들의 횃불이 빗줄기 속에서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초소 내부의 지리와 무사들의 배치는 이미 독기 감지 (毒氣感知) 능력으로 뇌리에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미세한 청풍기공의 흐름이 안개 속에서 붉은 기류가 되어 서진의 기감을 자극했다.
서진은 묵철검을 고쳐 잡았다. 기경팔맥이 찢어진 그에게 정상적인 내공 따위는 없었다. 오직 심장에 박힌 칠성탈명침의 독기와 백사담의 냉독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기괴한 팽창력만이 그의 사지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걸을 때마다 어긋난 무릎 관절이 삐걱거렸지만, 뇌공차단 호흡법으로 통증을 강제로 지워버린 서진은 고요하게 목책을 향해 걸어갔다.
"누구냐!"
목책 위 감시탑에 서 있던 무사가 어둠 속에서 질질 끌리는 쇳소리를 듣고 횃불을 아래로 비추었다. 빗속에서 나타난 창백한 몰골의 사내, 한쪽 팔을 가슴에 묶고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며 이가 빠진 검은 검을 쥔 괴물의 형상에 무사는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상이마인……! 침입자다!"
무사가 경보를 울리려 목청을 높이는 찰나, 서진은 이미 오른발을 단단히 디디고 있었다. 얼어붙어 감각이 없는 오른쪽 다리에 역침쇄명결의 독기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쿵!
역천보 (逆天步)의 폭발적인 기동력이었다. 디딤발을 디디는 순간 발바닥의 기맥이 개방되며 지면이 움푹 패이고, 그 반동으로 서진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절뚝거리는 다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변칙적인 가속이었다.
서진은 도약과 동시에 묵철검을 크게 휘둘렀다. 빗자루를 쓸던 궤적이 무거운 검끝에 실려 원을 그렸다.
소지검로(掃地劍路)!
검붉고 푸른 서리 기운이 섞인 둔탁한 참격이 감시탑의 목조 지지대를 그대로 후려쳤다. 콰직! 하는 폭음과 함께 두꺼운 통나무가 한순간에 얼어붙으며 산산조각이 났고, 감시탑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정문 목책 위로 무너져 내렸다. 지면의 자갈과 흙더미가 거대한 장막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무슨 일이냐!"
"적습이다! 정문이 무너졌다!"
초소 연무장에 대기하고 있던 제갈세가의 하급 무사 수십 명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무너진 감시탑의 잔해와 피어오르는 먼지 안개 속에서, 서진은 검은 철검을 질질 끌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오른쪽 다리가 흙바닥에 닿을 때마다 쩍, 쩍 소리와 함께 서리가 내렸고, 가슴팍에서는 검붉은 독혈이 빗물에 씻겨 내렸다.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무사들이 합격을 전개하며 서진을 사방에서 포위하려 들었다. 서진은 묵묵히 묵철검의 넓은 검신을 들어 올렸다. 검이 워낙 무거워 오른쪽 어깨와 손목 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 고통조차 그의 복수심을 키우는 땔감일 뿐이었다.
서진은 정면으로 달려드는 무사들의 검격을 피하지 않았다. 묵철검의 두꺼운 검신으로 적들의 세검을 정면에서 찍어 눌렀다. 깡!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정종 기공이 아닌, 사나운 한독과 화독이 섞인 독기가 적들의 검날을 타고 흘러들었다. 무사들은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과 얼어붙는 오한을 동시에 느끼며 검을 놓치고 비명을 질렀다.
그 혼란의 틈새를 타, 초소 내실의 두꺼운 목조 문이 열리며 화려한 청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제갈세가 특유의 청색 도포 위에 가죽 흉갑을 덧대고 날카로운 세검을 찬 사내, 가문 학살의 최전선에 섰던 원수이자 초소의 대주인 제갈우(제갈우)였다.
제갈우는 연무장에 쓰러진 부하들과 서진의 처참한 몰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경악과 함께 이내 잔인한 탐욕이 서렸다.
"백서진……! 네놈이 정말 살아 있었구나. 단전이 깨지고 심장에 칠성탈명침이 박힌 폐물 놈이 흑토곡 구석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더니, 결국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군."
제갈우는 서진의 완전히 마비되어 가슴에 묶인 왼손과 걸을 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오른쪽 다리를 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사지가 멀쩡할 때도 내 적수가 되지 못했던 놈이, 이제는 한쪽 팔을 쓰지도 못하고 절뚝거리는 개가 되어 돌아왔다니. 그 이가 빠진 고철 덩어리로 내 청풍세검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제갈우가 세검을 가볍게 흔들자, 검신을 따라 푸른 청풍기공의 흐름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일렁였다. 일류 고수의 압도적인 기세였다.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가문이 멸문당하던 날, 제갈우의 검에 난도질당해 죽어가던 가솔들의 비명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서진은 묵철검을 낮게 깔며 제갈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죽어라, 폐물 놈아!"
제갈우가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몸은 바람을 탄 듯 기민했고, 세검은 수십 자루의 푸른 바늘이 되어 서진의 전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청풍세검술(靑風細劍術)의 정수였다.
서진은 디딤발을 딛고 묵철중검격을 시도하려 했으나, 얼어붙은 오른쪽 무릎 관절이 순간적으로 고정되어 신형의 균열이 일어났다. 제갈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볍게 신법을 전개해 서진의 정면 강타를 회피한 뒤,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깊게 베어냈다.
스윽!
가죽 붕대가 찢기며 검붉은 독혈이 뿜어져 나왔다. 서진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하하하! 다리가 굳어 검을 휘두르는 각도조차 맞추지 못하는구나! 그런 비참한 몸으로 복수를 꿈꾸었단 말이냐!"
제갈우가 오만하게 외치며 서진의 마비된 왼손 방향, 즉 완벽한 사각지대를 향해 번개처럼 세검을 찔러왔다. 적은 서진이 왼쪽으로 가해지는 공격을 전혀 방어할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서진이 노린 덫이었다.
서진은 일부러 왼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며 방어 자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왼팔을 고기 방패로 삼고, 적의 회심의 일격을 유도한 것이다.
제갈우의 예리한 세검이 서진의 왼쪽 어깨 가죽 붕대를 뚫고 살점을 파고드는 찰나의 순간.
쩍!
서진은 비명을 삼키며 오른쪽 디딤발을 강하게 굴렀다. 얼어붙은 무릎 관절의 무게를 원심력의 축으로 삼아, 몸을 기괴한 각도로 반바퀴 회전시켰다. 마비된 왼손 방향을 미끼로 던져주고, 적의 검날이 몸에 박힌 순간을 이용해 회전력을 극대화하는 변칙 전술.
사각지대 역습술(사각지대 역습술)이었다!
회전하는 원심력이 무거운 이가 빠진 검은 철검 끝에 실려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제갈우는 자신이 서진의 사각지대를 완벽히 찔렀다고 확신한 순간, 기괴하게 회전하며 옆구리를 파고드는 거대한 검은 쇳덩어리를 대면하고 경악했다.
"이, 이 기괴한 보법은……!"
제갈우가 다급히 세검을 거두어 막으려 했으나, 묵철검의 엄청난 중량감과 회전 속도를 당해낼 수 없었다.
쿠웅!
두 병기가 맞부딪치는 순간 거대한 폭음이 초소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제갈우의 얇은 세검이 무섭게 진동하며 뒤로 튕겨 나갔고, 서진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화독이 제갈우의 세검 날을 타고 역류했다. 화독반사격 (火毒反射擊)의 치명적인 열기가 제갈우의 가죽 장갑을 순식간에 불태우며 그의 손바닥 피부를 벌겋게 익혀버렸다.
"아악!"
제갈우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오른손바닥은 이미 검게 그을려 진물이 흐르고 있었고, 세검을 쥔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지가 망가진 폐물이라 경멸했던 사내의 기괴한 지략과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에 제갈우의 얼굴에서 오만함이 씻겨 내려갔다.
"네놈…… 정말 인간의 몸으로 이런 뒤틀린 무공을 부린단 말이냐!"
제갈우가 분노에 찬 포효와 함께 제갈세가 비전 칠성검법을 전개하며 서진의 가슴팍(심장 부근)을 향해 검을 찔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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