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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린 검과 율법의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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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군사들의 철갑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새벽 공기를 찢었다.


불길이 잡힌 지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청룡성 소공작 저택의 안채는 여전히 매캐한 탄내와 함께 희뿌연 연기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중앙 정원의 석판 바닥은 화재의 흔적으로 검게 그을려 있었고, 전신에 깊은 화상을 입은 강태현은 안채의 임시 침상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서방님. 상처가 터지면 화독이 기맥으로 흘러들어 가 영구히 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에메랄드빛 비단 옷자락을 펄럭이며 제갈진아가 태현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쥔 현철 백우침이 태현의 가슴팍에 깊게 박혀 폭주하려는 기혈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온몸을 붕대와 약초 반죽으로 칭칭 감은 태현은 손끝 하나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통증 속에서 신음했다. 휠체어의 왼쪽 바퀴 축이 완파되어 쓸 수 없게 된 지금, 그는 침상에 묶인 나약한 서자에 불과했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백서설의 호위 무사인 백청현이 안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소가주님, 대행님! 큰일났습니다. 북무관의 강경파 장수 백무현이 정예 무사 100여 명을 이끌고 저택 정문을 포위했습니다! 저택 외곽의 방어선을 뚫고 정문 빗장 앞까지 들이닥쳤습니다!”


백청현의 얼굴은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검자루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무현이... 결국 움직였군.”


태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전신의 화상 상처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쿨럭! 컥...!”


검붉은 선혈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내려 하얀 붕대를 적셨다. 제갈진아가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눌렀다.


“안 됩니다! 지금 정문으로 나서시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저들이 칼을 뽑아 든 이상, 서방님의 그 약한 몸으로는 단 한 번의 여파도 견디지 못합니다!”


“진아 부인... 지금 내가 나가지 않으면, 백무현은 저택을 피바다로 만들 명분을 얻게 되오. 방화의 오해가 풀렸다고는 하나, 가문 내부의 강경파들은 이 혼인 자체를 파탄 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소.”


태현의 창백한 얼굴 위로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무공을 쓸 수 없는 병약한 몸이었지만, 적들이 어떤 타이밍에 자신을 노릴지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 수 앞을 계산하고 있었다. 백무현은 태현이 부상으로 누워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군사를 움직였을 터였다. 그 오만함이 바로 태현이 노릴 빈틈이었다.


스르릉-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으며, 은백색 검복을 입은 백서설이 서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한설검 칼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서리가 바닥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서설은 침상 옆에 서서 태현의 상처 입은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 속에 깊은 자책감과 함께 이글거리는 분노가 일렁였다.


“내가 부축하겠다, 서방님.”


백서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태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주저 없이 자신의 어깨를 내밀어 태현의 상체를 지탱했다.


“소가주님! 북무관의 군사들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은 가문 내전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제갈진아가 만류했으나, 서설은 흔들림이 없었다.


“백무현은 내 남편을 병약한 서자라며 모욕했다. 그것은 나 백서설의 명예를 짓밟은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서설은 태현에게만 들릴 듯 미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대 공작께서 남기신 편지에 적혀 있었다. 그대야말로 북무관의 검의 무덤을 각성시킬 유일한 혈맥이라고. 나는 그 편지를 믿고 이 혼인을 수락했다. 그러니 사냥개 따위가 내 남편의 목숨을 넘보게 두지 않겠다.”


태현은 그녀의 단단한 어깨에 의지해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지극 한철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짚은 그의 걸음걸이는 위태로웠지만, 서설의 호위를 받으며 걷는 그의 기개만큼은 천하를 호령할 군주와 같았다.


***


청룡성 소공작 저택의 정문 광장.


철갑을 두른 북무관의 강경파 무사 100여 명이 횃불을 들고 저택 정문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백무현은 거대한 구리 칼을 지면에 꽂은 채 오만한 표정으로 정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가주 백서설은 당장 나와라! 쓸모없는 병약한 서자의 저택에 불이 나 전멸할 위기에 처했거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며 그 나약한 놈 곁에 머물 이유가 없다! 당장 혼인을 파기하고 북무관으로 복귀하라!”


백무현의 우렁찬 사자후가 새벽하늘을 흔들었다. 그의 뒤에 선 무사들이 창칼을 두드리며 위협적인 소음을 만들어냈다.


콰아아앙-!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저택의 거대한 목조 정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자욱한 안개와 연기 사이로, 백색 붕대를 온몸에 감은 강태현이 백서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한 손에는 낡은 대나무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고, 옷자락 사이로 화상 상처가 터져 붉은 핏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깊고 맑은 눈빛은 백무현을 정면으로 꿰뚫고 있었다.


“백무현 장수, 이 새벽에 소공작 저택의 문을 부수고 난입하려는 무례함이 북무관의 가풍인가?”


태현의 갈라진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백무현은 휠체어도 타지 못한 채 위태롭게 서 있는 태현을 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하! 숨이 붙어 있기는 하군, 서자 놈아. 온몸이 불타서 시체가 된 줄 알았더니만. 소가주님, 이런 나약한 벌레 곁에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시고 당장 복귀하십시오! 가문의 원로들께서도 이 혼인을 무효로 돌리기로 합의하셨습니다!”


“닥쳐라, 백무현.”


백서설이 차가운 안광을 번뜩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연청검을 반쯤 뽑아 들자, 극음의 빙백신공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정문 앞 대지를 하얗게 얼려버렸다. 압도적인 초절정 검수의 기세에 백무현의 뒤에 서 있던 군사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내 남편을 한 번만 더 모욕한다면, 가법에 따라 네 목을 먼저 베겠다.”


“소가주님! 가문의 원로들의 뜻을 거역하시겠다는 겁니까!” 백무현이 구리 칼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 순간, 태현이 서설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는 품속에서 피 묻은 손으로 낡은 가죽 서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백무현 장수, 네가 북무관의 명예와 원로들의 뜻을 운운하는가? 참으로 가소롭군.”


태현이 서첩을 펼쳐 보였다. 그것은 설이의 정보망을 통해 입수한 백무현의 비밀 군사 장부였다.


“이것은 제국 황실 세법 율법서(Imperial Tax Code Lawbook)의 규정에 따라 작성된 북무관의 철광 유통 장부다. 백무현, 너는 지난 3년간 황실 세관원들과 결탁하여 가문의 지극 한철 광맥에서 채굴된 철광석의 절반을 밀무역하고, 그 대가로 황실 칙사 이건의 수하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받아 챙겼더군.”


태현의 날카로운 폭로에 백무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감히 서자 놈이 증거도 없이 북무관의 장수를 모함하는가!”


“모함이라니. 이 장부 하단에 적힌 제국 세무관의 직인과 네 친필 서명이 보이지 않는가? 제국 대명률 제37조에 따르면, 변방 자치 가문의 무장이 황실 관료와 사사로이 결탁하여 군사 자원을 밀무역하는 것은 가문을 배신한 ‘역모죄’이자 황실 율법을 유린한 대역죄에 해당한다.”


태현은 기침을 토해내며 서첩을 백무현의 발앞으로 던졌다. 툭,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장부 사본을 보며 백무현의 손이 사르르 떨렸다.


“너는 북무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황실 칙사 이건이 보낸 밀서를 받고, 이 정략결혼을 파탄 내어 너의 밀무역 비리를 영구히 덮으려 군사 시위를 벌인 것이지. 백무현, 네 뒤에 선 북무관의 충직한 무사들이 과연 너 개인의 탐욕과 반역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을까?”


태현의 서늘한 질문이 군사들의 가슴을 찔렀다. 백무현의 뒤에 서 있던 100여 명의 무사들 사이에 급격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들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 출정한 줄 알았으나, 실상은 장수의 개인 비리와 반역죄에 이용당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 이놈이...!”


백무현은 법적 명분과 자신의 치부가 완전히 드러나자 이성을 잃고 구리 칼을 휘두르며 태현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죽어라, 서자 놈아!”


그러나 그의 신형이 반 보도 움직이기 전이었다.


스으으릉-!


눈부신 푸른빛 검강이 밤공기를 가르며 백무현의 구리 칼을 단칼에 동강 내버렸다.


백서설의 연청검이 백무현의 목덜미 바로 앞에 딱 멈춰 서 있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빙백의 한기가 백무현의 목 피부를 즉각적으로 얼려 붉은 진물이 흐르게 만들었다.


“무릎 꿇어라, 백무현.”


백서설의 목소리는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에는 더 이상 북무관의 장수를 향한 일말의 자비도 남아있지 않았다.


“너는 가문을 팔아넘긴 반역자이자, 내 남편을 해치려 한 대역죄인이다. 가법과 율법의 이름으로, 너의 북무관 장수 직위를 이 자리에서 박탈한다.”


정문 광장 전체가 서리가 내린 검과 율법의 칼날 아래 차가운 침묵에 잠겼다. 백무현은 부러진 칼자루를 쥔 채, 차가운 대지 위로 무릎을 꿇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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