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을 삼킨 불꽃과 진심
매캐한 연기가 허공을 가르며 청룡성 강씨 소공작 저택의 밤을 잠식해 들어갔다.
불과 몇 시간 전, 천신 영석광산의 지하 갱도 붕괴 사고 현장에서 수십 명의 광부들을 구출해 내고 복귀한 강태현은 안채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유독가스를 흡입한 탓에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가시지 않았고, 막힌 기맥을 억지로 비틀어 기감을 탐지했던 반동으로 전신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종 길동이 정성스레 다려온 약탕기를 들고 들어와 그를 보살피고 있었으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쿨럭, 쿨럭...!"
태현이 격렬한 기침과 함께 하얀 침구 위로 검붉은 선혈을 쏟아냈다. 길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건을 적셔 그의 입가를 닦아내던 그 순간, 코끝을 찌르는 기묘한 냄새가 서재의 문틈을 넘어 밀려왔다.
단순한 나무가 타는 냄새가 아니었다. 찌르는 듯한 유황의 기운, 그리고 열기를 극대화하는 기묘한 약재의 향.
'적련 사황(Red Lotus Realgar)...!'
태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독소 식별안(Poison Identification Eyes)이 뇌리에 경고음을 울렸다. 적련 사황은 적련교에서 무기를 제련하거나 특수 화약을 제조할 때 쓰는 극양의 물질이었다. 이것이 저택 사방에 뿌려졌다는 것은 단순한 실화가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적련교의 흔적을 남겨 저택을 불태우고, 가문 연합을 찢어발기려 하는 것이다.
"도, 도련님! 바깥에 불길이...! 서설각과 설화각 방향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안채로 통하는 통로까지 이미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길동이 비명을 지르며 창문을 열었다. 창밖은 이미 붉은 화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은 마치 거대한 붉은 뱀처럼 저택의 목재 대들보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하인들의 비명과 무사들의 다급한 고함이 뒤엉켜 들려왔다.
태현은 휠체어 바퀴를 잡으려 했으나, 마비된 다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전신의 경맥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비명을 질렀다. 길동이 태현을 등에 업고 탈출하려 했으나, 이미 안채의 출구는 무너진 서래와 화염 장벽으로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그 시각, 저택의 중심부인 청룡성 중앙 정원에서는 또 다른 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염설화! 네년이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감히 이 신성한 저택에 불을 질러 우리를 몰살하려 해?"
서설각을 탈출해 정원으로 나온 북무관 소가주 백서설이 한설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음의 빙백신공 기운이 화염의 열기와 부딪히며 자욱한 수증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설의 눈동자는 분노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풍기는 적련 사황의 냄새는 그녀로 하여금 적련교주 염설화를 범인으로 확신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당당하게 짖는 거야, 얼음 여편네야?"
동편 설화각에서 붉은 비단 옷을 휘날리며 나타난 염설화 역시 분노로 안광을 붉게 빛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쥔 적련 채찍이 지면을 내리치며 붉은 마기의 불꽃을 튀겼다.
"내가 미쳤다고 우리 서방님이 계신 안채까지 불을 지르겠어? 머리가 얼어붙어서 대가리 회전이 안 되는 모양인데, 그 잘난 주둥이부터 찢어주랴?"
"저택 내부에서 사적인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은 지 사흘도 되지 않았다. 마교의 요녀다운 비열한 배신이로군!"
"배신? 하, 먼저 칼을 뽑아 든 건 너야, 백서설! 오늘이야말로 네 그 오만한 콧대를 완전히 꺾어주마!"
두 여걸의 기세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한빙의 검기와 적련의 마기가 허공에서 부딪히며 폭발적인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저택 내부의 무력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 '소공작 저택 평화 조약'은 화마 속에서 한 장의 종잇조각처럼 바스러지기 직전이었다. 서로를 향한 의심의 불꽃이 저택을 집어삼키는 화재보다 더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안채의 2층 창문이 거대한 폭음과 함께 통째로 박살 나며 날아갔다.
콰아아앙-!
화염에 휩싸인 목재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와중, 붉은 불길을 뚫고 한 사내가 휠체어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강태현이었다.
무너진 안채의 장벽을 평범한 몸으로는 돌파할 수 없음을 직감한 태현이, 휠체어 하단의 특수 탄성 진법 판을 폭발시키는 '휠체어 긴급 탈출(Wheelchair Emergency Escape)' 기교를 가동한 것이었다. 고압 스프링과 진석의 폭발적인 반발력이 휠체어를 후방 5장 밖의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도련님-!" 길동의 절규가 화염 속에 묻혔다.
태현은 낙하하는 와중에도 온몸을 덮쳐오는 열풍과 가슴을 짓누르는 기압에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전신에 장착된 학자 도포가 불길에 그을려 타들어 갔고, 창백한 살결 위로 붉은 열화 화상이 번져나갔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떤 고수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쿵-!
휠체어가 중앙 정원의 석판 바닥에 거칠게 착지했다. 충격으로 휠체어의 왼쪽 바퀴 축이 꺾이며 태현의 신형이 앞으로 크게 비틀거렸다. 마비된 다리는 힘없이 꺾였고, 태현은 바닥에 거칠게 굴러떨어졌다. 전신의 화상 상처가 흙바닥에 쓸리며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쿨럭...! 컥...!"
태현이 대지 위로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연기를 들이마신 폐가 찢어질 듯 요동쳤다. 그러나 그는 지팡이를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서로를 향해 검과 채찍을 겨누고 있던 백서설과 염설화의 한가운데를 가로막아 섰다.
"모두... 검을 거두시오...!"
태현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미약했으나, 그 속에 담긴 서늘한 권위는 두 여장부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서방님...!"
염설화가 깜짝 놀라 채찍을 멈추었다. 백서설 역시 한설검의 검강을 거두며 태현의 처참한 몰골을 바라보았다. 전신이 그을리고, 도포 자락이 불타 붉은 진물이 흐르는 남편의 모습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서방님, 왜 그런 몸으로 불길 속에 뛰어드신 겁니까! 어서 피하셔야...!"
백서설이 다가가려 했으나, 태현은 피 묻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대들보를 붙잡느라 가죽이 벗겨져 붉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서설 부인, 설화 부인... 서로를 향한 검을 거두시오. 이 불길은 설화 부인의 짓이 아니오. 또한 북무관의 수작도 아니지."
태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의 흙을 한 줌 쥐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잿더미 속에 미세하게 붉은빛을 띠는 결정체들이 섞여 있었다.
"이것은... 적련 사황이 맞소. 하지만 교단의 정제법이 아닌, 인위적으로 유황과 철가루를 섞어 연기와 열기만 극대화한 가짜요. 범인은... 우리가 서로를 의심하여 이 저택 안에서 피를 흘리기를 바란 것이오. 우리가 여기서 싸운다면, 진정으로 웃는 자는 누구겠소?"
태현의 날카로운 지적에 백서설과 염설화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서로를 향한 분노에 눈이 멀어, 가장 기초적인 음모의 냄새를 맡지 못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남편의 피 흘리는 육체 앞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그때, 저택 남편의 진아각 방향에서 에메랄드빛 비단 옷을 입은 제갈진아가 의원들을 이끌고 쾌속으로 정원에 당도했다. 그녀는 주방의 약선 요리를 준비하던 중 화재를 인지하고 달려온 참이었다. 진아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는 태현을 목격하자마자, 비명에 가까운 숨을 들이쉬며 그의 곁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서방님-!"
진아의 손끝이 떨리며 태현의 전신을 살폈다. 기맥은 폭주 직전이었고, 온몸에 입은 열화 화상은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경맥이 영구히 손상될 정도로 심각했다. 그녀는 즉각 현철 백우침을 꺼내 태현의 심장 주변 사혈들을 찌르며 내력을 주입해 그의 호흡을 안정시켰다.
"서설 소가주, 설화 교주! 두 분은 청룡령 최고의 고수들이라 자부하면서, 정작 남편이 불길 속에서 온몸이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칼부림이나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제갈진아의 서늘한 일갈이 정원을 때렸다. 평소 온화하던 그녀의 얼굴은 극도의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태현의 그을린 뺨을 적셨다.
백서설은 연청검을 쥔 손에 힘을 잃고 검끝을 지면에 떨어뜨렸다. 염설화 역시 적련 채찍을 거두며 붉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남편을 죽일 뻔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과 동맹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 병약한 남편의 '진심'이 그녀들의 오만하던 마음의 벽을 완벽하게 허물어뜨린 순간이었다.
불길이 서서히 진압되어 가며 저택 위에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그때, 정원의 어둠 속에서 검은 잠행복을 입은 설이가 한 사내의 덜미를 움켜쥔 채 나타났다.
사내의 온몸은 그을음과 기름 냄새로 가득했고, 그의 품속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적련 사황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강태식이 고용한 방화범, 태구였다.
"도련님... 방화범 쥐새끼를 생포했습니다." 설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보고하며 태구를 바닥에 내팽개쳤.
바닥에 처박힌 태구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세 여왕의 눈빛은 방금 전의 불길보다 더 뜨겁고 잔혹한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태현은 진아의 품에 기대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록 전신이 타들어 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마침내 세 아내의 진정한 반려이자 조율사로서 그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장악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혼란을 틈타 저택 외곽에서 북무관의 강경파 장수 백무현이 군사들을 이끌고 저택 정문을 향해 삼엄하게 진격을 시작했다는 경보음이 청룡성 저편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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