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학사와 주판을 든 거상
"숙부 강태식 대감이… 공작가의 모든 자금줄을 동결시켰습니다! 게다가 원로회를 소집하여 도련님의 가주 대행 자격을 박탈하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시종 길동의 다급한 비명이 정원의 고요함을 산산조각 냈다. 길동은 무릎을 꿇은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세 아내의 팽팽한 기싸움이 머물다 간 중앙 정원에는 이제 또 다른 종류의 음습한 살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는 강태현의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칠흑 같은 머리칼 사이로, 그의 맑고 깊은 눈빛만이 차갑게 빛날 뿐이었다. 태현은 가볍게 기침을 토해내며 하얀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쳤다. 소수점 아래의 미세한 맥박 소리까지 읽어내는 그의 감각은 이미 숙부 강태식의 다음 수수를 예측하고 있었다.
첫날밤의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마자 자금줄을 묶어 고사시키려 들다니. 과연 탐욕스럽고 잔인한 숙부다운 대처였다.
"도련님, 어찌합니까? 저택의 식량과 약재 보급이 당장 내일부터 끊길 판입니다. 세 아내 가문의 호위 무사들도 눈을 번뜩이며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가 굶주리기 시작하면 가문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길동이 눈물을 글썽이며 태현의 무릎을 붙잡았다. 태현은 그의 어깨를 나직이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라, 길동아. 숙부가 가문의 금고를 닫았다면, 우리는 가문 밖에서 더 큰 금고를 열면 된다."
"예? 가문 밖이라니요?"
태현은 대답 대신 품속을 만졌다. 어젯밤 살수의 시체에서 확보한 '강태식의 문양 주머니'가 묵직하게 만져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무기가 필요했다. 오직 두뇌와 지식만으로 이 거대한 판을 뒤집을 무기.
그날 밤, 사방이 어둠에 잠긴 시각. 태현은 세 아내의 감시망을 피해 홀로 휠체어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청룡성 북쪽 골목 끝, 낡고 조용한 '독고진의 서당'이었다.
서당 안에는 하얀 머리칼을 유연하게 묶고 눈에 회색 천을 감은 노인이 홀로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앉아 있었다. 과거 황실의 한림원 학사였으나 눈이 멀어 이곳에 은거 중인 기재, 독고진이었다.
"태현아, 밤바람이 매우 차구나. 뒤틀린 경맥을 가진 네 몸으로 이 시간에 움직이다니, 제명에 살고 싶지 않은 게냐?"
독고진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태현의 미세한 바퀴 소리와 거친 호흡만으로 그의 상태를 정확히 간파했다.
"스승님, 숙부가 공작가의 자금줄을 동결했습니다. 사흘 뒤 원로회를 소집해 저를 실각시키려 합니다. 가문의 법도와 제국의 율법으로 숙부의 목을 죌 방안이 필요합니다."
태현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독고진은 허허실실 웃으며 대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강태식 그 졸장부가 결국 얄팍한 수수를 부렸구나. 제국의 대명률을 너무 가볍게 보았어."
독고진은 등 뒤의 서가에서 낡고 두꺼운 필사본 서책 하나를 꺼내 태현의 앞에 놓았다. 그것은 제국의 비사와 율법의 허점이 고스란히 기록된 '독고진의 역사 서책'이었다.
"대명률 제37조를 보거라. 가문의 가주 대행이 합법적인 '구휼(救恤) 특별 세수'나 '영지 방비 비상 자금'을 선포할 경우, 방계 원로나 임시 대리인은 이를 동결하거나 횡령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만약 이를 어기고 자금을 묶어두는 자는 황실 반역죄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되지."
독고진의 손가락이 서책의 특정 구절을 짚었다. 눈먼 학사의 안광이 천을 뚫고 나올 듯 예리하게 빛났다.
"숙부 강태식이 아무리 원로들을 매수했다 한들, 황실 대명률의 이 예외 조항 앞에서는 불법 횡령범이 될 뿐이다. 너는 이 조항을 들이밀어 원로들 앞에서 숙부의 자금 동결이 '불법'임을 선언하거라. 하지만 명심해라, 태현아. 법적인 명분만으로는 원로들의 탐욕을 완전히 잠재울 수 없다. 실질적인 '돈'의 실체를 보여주어야 해."
"실질적인 돈의 실체라면…."
"청룡령 최대의 거상, 마태상을 만나라. 그 주판을 든 늙은 구렁이라면 네가 가진 가치를 단번에 알아볼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각인한 태현은 서당을 나와 곧장 청룡성 중앙에 위치한 '금풍상단 청룡성 지부'로 향했다. 거대한 석조 요새와 같은 상단 지부의 삼엄한 경비원들은 휠체어를 탄 병약한 서자의 등장을 경계했으나, 태현이 내민 소공작 가주의 직인을 보고는 이내 안으로 인도했다.
화려한 비단 소파에 앉아 손가락마다 굵은 옥반지를 낀 채 주판을 두드리고 있던 사내, 금풍상단의 상단주 마태상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상인 특유의 눈빛이 태현의 마른 체구와 창백한 안색을 훑었다.
"공작가의 쓸모없는 서자분께서 이 늦은 밤에 금풍상단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듣자 하니 숙부인 강태식 대감에게 자금줄이 묶여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이라던데, 장사꾼에게 구걸이라도 하러 오신 겁니까?"
마태상의 목소리에는 거상의 오만함과 냉정함이 가득했다. 그는 철저히 이익만을 쫓는 장사꾼이었다. 태현이 소공작 가문의 명예를 담보로 대출을 받으려 했다면, 그는 단칼에 거절했을 터였다.
하지만 태현은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와 서류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마 상단주님, 장사꾼에게 구걸을 하러 올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가져온 것은 구걸이 아니라, 금풍상단을 동대륙 최대의 상단으로 만들어줄 전설적인 거래입니다."
태현이 가죽 주머니를 열자, 은은한 청색 영기를 뿜어내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투명한 원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태상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즉시 종을 울려 자신의 수석 보석 감정사인 설연을 불러들였다. 푸른빛 비단 안경을 쓴 도도한 인상의 설연이 다가와 백옥 확대경으로 원석을 정밀하게 감정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설연의 하얀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태상을 바라보았다.
"상, 상단주님… 이것은 단순한 영석이 아닙니다. 고대 문양이 서린 전설의 '천신 영석'입니다. 이 정도 순도의 영석은 일반 영석 만 개의 가치에 필적합니다. 내력을 증폭시키는 정화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설연의 감정에 마태상이 주판을 쥐고 있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태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준비해 온 천신 영석광산의 고대 지형도와 영기 분석표 사본을 펼쳐 보였다.
"천신 영석광산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미공개 매장 정보와 가치 평가서입니다. 이 광산의 우선 채굴권과 유통 독점권을 금풍상단에 넘기겠습니다. 그 대가로 제가 가문 내부의 적들을 소탕할 수 있도록 청룡령 백은화 5만 냥을 즉시 무상 투자해 주십시오."
마태상은 침을 삼키며 지도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상인 특유의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태현을 쏘아보았다.
"제안은 달콤하군.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커. 황실과 대립하는 세 가문이 이 광산을 가만히 둘 리 없고, 가문의 서자에게 그런 거액을 투자하기엔 내 신용 장부가 허락하지 않네."
태현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 마지막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었다.
"마 상단주님, 장사꾼으로서 경쟁 상단인 '천해상단'의 움직임을 모를 리 없으실 텐데요? 천해상단의 소상주 금무현이 이미 황실 칙사 이건과 내통하여 청룡령의 영석 광산을 통째로 강탈하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광산을 독점한다면, 금풍상단은 청룡령에서 영구히 축출당하고 파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금풍상단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간책과 경쟁사의 기밀 폭로. 마태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천해상단의 음모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태현의 정보는 정확했고, 그의 지략은 마태상을 완벽하게 외통수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때, 마태상이 태현의 창백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그 영민한 눈빛. 자네, 혹시 유설혜 대인의 아들인가?"
태현이 미세하게 눈을 크게 떴다.
"제 친모의 이름을 어찌 아십니까?"
마태상의 눈빛에 서려 있던 차가운 계산기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며, 깊은 부채감과 그리움이 교차했다.
"과거 내 상단이 초창기 시절, 도적떼에게 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지. 그때 지나가던 의원이었던 자네의 친모 유설혜 대인께서 내 목숨을 구해주고 상단 재건 자금까지 마련해 주셨다네. 내 평생 그 은혜를 갚지 못해 가슴에 짐으로 남겨두고 있었는데… 그분의 아들이 바로 자네였군."
마태상이 태현에게 전폭 투자하는 진짜 이유. 그것은 천부적인 영석의 가치와 천해상단의 위협이라는 현실적 계산 위에, 과거 친모에게 진 목숨의 빚이라는 거대한 의리가 결합된 필연적인 인과였다.
쿵!
마태상이 굵은 옥반지가 낀 손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좋네! 내 평생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값진 투자를 감행하지. 백은화 5만 냥을 즉시 가문 비밀 유통망을 통해 저택으로 반입해 주겠네. 자네 어머니의 은혜를 이렇게나마 갚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군."
협상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태현은 마태상과 공식적인 영석 독점 유통 계약서에 서명한 뒤, 백은화 5만 냥의 신용 증서를 품에 넣었다.
그러나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긴장이 풀리자마자 태현의 약한 신체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밤샘 이동과 고도의 정밀한 서류 작성, 그리고 심리전의 뇌 세포 과부하로 인해 그의 선천적 맥 폐색증 통증이 극도로 도진 것이었다. 어제 복용했던 사향 독초의 미량의 독소 부작용까지 겹쳐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우욱… 쿨럭! 쿨럭!"
태현은 마차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격렬한 기침을 토해냈다. 하얀 소매 깃이 순식간에 붉은 선혈로 물들었다. 전신에 오한이 들며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략의 승리 뒤에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한 육체가 치러야 할 합당한 희생이 뒤따랐다.
그때였다.
히히힝-!
마차를 몰던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차가 급격하게 제동을 걸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태현의 신형이 크게 흔들리며 마차 벽면에 부딪혔다.
"도, 도련님! 사방이 포위당했습니다!" 마부의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청룡성 초입의 숲길. 횃불 수십 개가 일제히 밝혀지며 태현의 마차를 포위했다.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화려한 가죽 경갑을 걸친 채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의 형상이 드러났다.
태현의 사촌 형이자 강태식의 장남, 강지훈이었다. 그의 뒤에는 칼을 뽑아 든 가문의 사설 무사 수십 명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쓸모없는 서자 벌레 놈이 밤중에 어딜 기어 나갔다 오나 했더니, 쥐새끼처럼 상단 지부를 기웃거리고 있었구나." 강지훈이 청강검을 가볍게 흔들며 비열하게 웃었다. "내려라, 강태현. 네 놈이 품고 있는 그 주머니와 마차 안의 물건들을 모조리 압수하겠다. 가주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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