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이간계
달빛조차 숨을 죽인 청룡성의 깊은 밤, 강씨 소공작 저택의 안채 서재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밤바람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촛불은 위태롭게 흔들리며 벽면에 기괴한 그림자를 그려냈다.
드르륵, 드르륵.
정적을 깨뜨린 것은 휠체어 바퀴가 구르는 둔탁한 마찰음이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칠흑 같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청년, 강태현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바퀴를 밀며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무릎을 덮은 흰색 설견사 담요 위로 가벼운 기침과 함께 붉은 선혈이 묻어났다. 선천적 맥 폐색증의 고통과 전신 화상의 열기가 여전히 그의 뼈마디를 갉아먹고 있었으나, 맑고 깊은 그의 눈빛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콜록, 컥... 이건, 황실의 사냥개답게 냄새를 아주 잘 맡는군."
태현은 책상 위에 놓인 찻잔을 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황실 칙사 이건이 청룡성에 입성하자마자 세 아내의 처소로 발송한 붉은 인장의 밀서들. 그것이 가문 장로들을 흔들고 동맹의 뼈대를 뒤흔들고 있음을 태현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때, 닫혀 있던 서재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기척도 없이 안개처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첫 번째 아내, 북무관 소가주 백서설이었다. 은백색 검복을 입고 얼음 조각처럼 차가운 미모를 지닌 그녀의 손에는 붉은 인장이 선명한 서신이 들려 있었다.
탁.
서설은 주저 없이 서신을 태현의 책상 위에 던져놓았다.
"이건이 보낸 밀서입니다. 북무관에 최고급 지극 한철의 독점 유통권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더군요. 가문의 강경파 원로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제 처소 외곽을 포위한 채 당장 혼인을 파기하라고 광증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가웠으나, 연청검의 자루를 쥔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문의 압박과 남편을 향한 신뢰 사이에서 그녀가 느꼈을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쪽 진아각의 주인 제갈진아가 에메랄드빛 비단 의복을 휘날리며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 역시 은침 통 옆에 꽂아두었던 밀서를 꺼내 서설의 서신 위에 겹쳐 놓았다.
"제 처소에도 배달되었어요, 서방님. 황실 한림원에 잠든 금기 의학 서적들의 열람 권한을 주겠답니다. 남옥곡의 장로들은 이미 황실의 비호를 받자며 저를 배신자 취급하고 있어요."
진아는 태현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창백한 뺨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따뜻한 약초 향이 배어 나와 태현의 오한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혔다.
마지막으로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선 것은 적련교주 염설화였다. 불꽃처럼 붉은 비단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요염한 안광을 번뜩이며 자신의 적련 채찍으로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찰싹!
"서방님! 당장 그 오만한 이건 놈의 목을 따버리면 안 될까요? 감히 우리 적련교를 정식 정파로 승인해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나를 흔들려 하다니!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고 맹세했는데, 장로 늙은이들이 칙사의 제안을 따르라며 사사건건 제 앞을 가로막고 있어요!"
설화는 분노로 전신에서 붉은 마기를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렸다. 세 아내 모두 가문 내부의 극심한 반발과 압박에 직면해 있었으나, 그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황실의 품이 아닌 병약한 남편의 침소였다.
태현은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인 세 통의 밀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략과 의심으로 시작된 삼중 혼인이었으나, 생사의 전장을 함께 넘나들며 다져진 신뢰는 황실이 제시한 그 어떤 거대한 이권보다 단단했다. 태현의 입가에 온화하고도 깊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를 믿고 이 차가운 밀서들을 내 눈앞에 가져와 주었으니, 이 몸이 어찌 그 신뢰에 보답하지 않겠소."
태현은 가느다란 손을 뻗어 세 아내의 손을 차례로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그 눈빛만큼은 대지를 녹일 듯 따뜻했다.
"서방님, 대안이 있으신가요?" 진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건은 우리가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 법적 명분을 무시하고 금군을 동원해 저택을 피바다로 만들 장본인입니다."
"진아 부인의 말이 맞소. 이건은 교활한 정치가요. 우리가 겉으로 완벽하게 단결해 있다면, 그는 무력이라는 최악의 수단을 쓸 것이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이간책에 넘어가 완전히 갈라선 것처럼 보인다면 어떻겠소?"
태현의 질문에 서설의 은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거짓 불화 연극을 하자는 뜻이군요."
"그렇소. 적이 가장 기뻐할 때는 자신의 책략이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이오. 이건은 지금 자신의 회유책에 세 가문이 흔들려 동맹이 붕괴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직접 그 붕괴의 서막을 보여주는 것이오."
태현은 휠체어 바퀴를 가볍게 돌려 책상 서랍에서 위조된 가죽 양식의 서류들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가 독고진의 역사 서책을 참고하여 철무기와 오씨의 공방을 통해 정교하게 제작한 '위조된 광산 방어 진법도'였다.
"내일부터 우리는 저택의 중앙 정원에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소리 높여 싸울 것이오. 가문의 원로들과 이건의 밀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오.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 이건이 매수한 저택의 하인이 제 서재에서 이 가짜 진법도를 '도둑질'해 가게 만들겠소."
태현의 치밀한 역정보 유포 지략에 설화가 요염한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 서방님은 정말 악마보다 더 잔인하고 영리하셔. 이건 그 멍청한 놈이 가짜 진법도를 진짜로 믿고 광산으로 기어들어 올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뛰는걸요?"
"이것은 단순한 연극이 아니오. 적의 눈을 완벽히 속이기 위해서는 24시간 내내 감시망을 속여야 하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극심한 피로가 따를 것이오. 부인들, 나와 함께 이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주겠소?"
서설이 한설검의 자루를 꽉 쥐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검은 오직 서방님의 지략을 수호하기 위해서만 움직입니다. 연극이든 실전이든, 제 검 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아 역시 침통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서방님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라면, 어떤 연극이든 기꺼이 동조하겠어요."
계획이 수립되자 태현은 서재 구석의 어둠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것은 그림자 잠행복을 입은 정보원 조장 설이였다. 그녀의 맑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태현을 향해 고정되었다.
"설이야, 이건의 처소 주변을 감시하는 황실 첩자 하연수의 움직임을 밀착 마크해라. 그녀가 저택 하인 중 누구를 매수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 하인의 동선에 자연스럽게 이 위조 진법도를 노출시켜라. 결코 의심을 사서는 안 된다."
"주군,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설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바람처럼 서재 창문을 통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다음 날 아침, 청룡성 소공작 저택의 중앙 정원.
맑은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이었으나, 그곳을 감싸고 있는 기류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이건이 점거한 동편 안채의 누각 위에서는 황실 첩자 하연수가 거문고를 타는 척하며 정원의 동태를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고, 저택 구석구석에는 가문 원로들의 밀탐들이 숨 죽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염설화! 감히 적련교의 그 천박한 마기를 내 처소 앞까지 들이밀다니, 정략결혼의 조약을 우습게 보는 것이냐!"
정원 한가운데서 백서설이 연청검을 뽑아 들며 서슬 퍼런 빙백의 기세를 방출했다. 지면이 하얗게 얼어붙으며 서리 가루가 휘날렸다.
"하! 오만한 얼음 여편네가 아침부터 짖어대는군! 황실의 제안을 받고 흔들리는 북무관 주제에 감히 누구를 훈계하려 드는 거야?"
염설화 역시 적련 채찍을 지면에 내리치며 붉은 화염 마기를 폭발시켰다. 콰앙 하는 파열음과 함께 정원의 대리석 바닥이 붉게 타들어 갔다.
두 여걸의 기세 격돌은 저택 전체를 뒤흔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제갈진아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침통을 쥔 채 쏘아붙였다.
"두 분 다 그만두셔요! 남편의 기맥이 이토록 뒤틀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가문의 이권 싸움으로 저택을 난장판으로 만들 셈입니까? 이 혼인이 파탄 난다면 남옥곡 역시 독자적인 길을 갈 것입니다!"
정원 한편에서 시종 길동이 미는 휠체어에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태현은 격렬한 기침을 토해내며 피가 묻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쿨럭, 콜록...! 부인들, 제발 고정하십시오. 가문의 평화를 위해... 컥!"
태현이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쥐며 휠체어 위로 쓰러지듯 웅크리자, 정원의 분위기는 극도의 혼란으로 치달았다. 아내들은 서로를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붙이며 각자의 처소로 흩어졌고, 가문 무사들 사이에는 팽팽한 불신의 사슬이 얽히기 시작했다.
누각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하연수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즉시 이건의 처소로 향해 속삭였다.
"대감, 이간책이 완벽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세 여왕이 서로를 불신하며 칼을 뽑아 들었고, 병약한 서자는 그 기세에 밀려 각혈하며 쓰러졌습니다. 동맹은 이미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건은 흡족한 듯 호탕하게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좋구나! 나약한 서자 놈이 법률의 방패 뒤에 숨어 발악하더니, 결국 내부의 분열 앞에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군. 이제 저들이 완전히 파멸하기 전, 광산의 방어 진법 배치도만 확보하면 끝이다. 매수한 하인은 어떻게 되었느냐?"
"오늘 밤, 서자가 혼절해 누워 있는 틈을 타 서재의 비밀 금고를 열기로 했습니다."
***
깊은 밤, 태현의 서재.
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한 하인이 살금살금 서재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태현이 일부러 살짝 열어둔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정교한 가죽 양식의 '위조된 광산 방어 진법도'를 꺼내 들었다.
하인의 눈에 탐욕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진법도를 품속에 소중히 찔러 넣고 소리 없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가 나간 직후, 서재 천장의 어둠 속에서 설이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하인의 도주 경로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주군, 쥐새끼가 미끼를 물었습니다."
서재 안쪽의 침상에 누워 숨을 고르고 있던 태현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 묻은 붉은 피는 차가운 달빛 아래 검붉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통증과 밤새 연극을 펼치느라 누적된 불면증의 피로가 그의 육체를 압박했으나, 그의 두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석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네 오만함이 결국 너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인도할 것이다. 네가 그 가짜 지도를 믿고 군대를 움직이는 순간, 청룡령의 협곡은 네 무덤이 될 터이니."
태현은 휠체어에 몸을 싣고 서재 창가로 다가갔다.
같은 시각, 동편 안채의 집무실에서 이건은 하인이 가져온 위조 진법도를 펼쳐 들고 있었다. 기하학적인 팔괘 문양과 광산 지하의 기맥 배치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승리감에 도취된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완벽하구나! 이 진법의 약점 구역만 장악한다면, 군대를 동원해 광산을 무단 점령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당장 군사 이동을 준비하라!"
이건이 오만한 포효를 내지르며 축배를 들어 올리던 바로 그 순간.
청룡성 외곽, 거대한 산맥 아래 깊숙이 숨겨진 천신 영석광산의 지하 3층 고대 제단.
일반인은 기압과 영압을 견디지 못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절대 금역의 어둠 속에서, 벽면에 새겨진 황금빛 군주의 문양들이 미세하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대지의 영맥이 요동치며 차가운 지하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저택 서재 창가에 앉아 있던 강태현은 심장 깊은 곳에서 쿵 하는 강력한 충격과 함께 전신을 관통하는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막혀 있던 그의 경맥 속에서, 태초의 황금빛 혈맥이 대지의 부름에 공명하듯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기세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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