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사 이건의 강림
황실 칙사 이건(Yi Geon)의 행차가 청룡성에 당도한 것은 정오가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태양마저 숨을 죽인 듯 먹구름 뒤로 몸을 숨긴 하늘 아래, 황실 금위영(Imperial Guard)의 흑철 갑옷이 불길한 광채를 뿜어냈다. 수백 마리의 군마가 대지를 울리는 소리는 청룡성 영민들의 가슴을 짓눌렀고, 행차의 중심에 선 황금빛 가마는 그 자체로 압도적인 황권의 위압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가마의 사방을 장식한 황룡의 문양은 변방의 척박한 영지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이자, 거역할 수 없는 지배자의 상징이었다.
청룡성 강씨 소공작 저택의 정문 앞.
창백한 피부에 단정한 청색 학자 도포를 입은 강태현(Kang Tae-hyun)은 휠체어에 몸을 기댄 채 그 광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철무기의 공방에서 겨우 바퀴 축만 고정해 온 목재 휠체어는 미세하게 흔들릴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를 냈고, 태현의 무릎을 덮은 두꺼운 설견사 담요는 그의 병약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화상의 열기와 뒤틀린 경맥의 통증으로 인해 태현은 가벼운 기침을 참지 못했다.
"콜록, 컥... 영지 경계에서부터 기세를 올리더니, 기어코 안마당까지 군화를 들이미는군."
태현이 하얀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쳐내자, 곁에 서 있던 둘째 아내 제갈진아(Jegal Jin-ah)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향긋한 약초 내음이 그의 코끝을 스쳤으나, 다가오는 황실의 살기 앞에서는 그 온기마저 차갑게 식어가는 듯했다.
"서방님, 무리하지 마셔요. 저 자는 황제 폐하의 심복이자 가문들을 찢어발기는 데 도가 튼 뱀 같은 자입니다."
진아의 속삭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금빛 가마의 비단 휘장이 걷히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황금색 용 무늬 도포를 휘날리며 가마에서 내려선 자, 황족이자 칙사인 이건이었다. 머리에 얹은 옥관과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 그리고 입가에 머금은 오만한 미소는 그가 왜 제국에서 가장 잔인한 정치가로 불리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이건은 저택의 전경을 오만하게 둘러보더니, 휠체어에 앉아 있는 태현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군화가 대리석 바닥을 딛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이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강씨 공작가의 그 쓸모없는 서자란 말인가?"
이건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멸시가 가득했다. 그는 태현의 앞에 멈추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 명의 여왕을 아내로 맞이했다 하여 내심 기대를 품었거늘, 직접 보니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종이 인형에 불과하구나. 이런 자가 청룡령의 맹주를 자처하다니, 황실의 권위가 통탄할 지경이로다."
이건의 도발에 뒤편에 서 있던 북무관 소가주 백서설(Baek Seo-seol)의 연청검 칼날이 미세하게 떨렸고, 적련교주 염설화(Yeom Seol-hwa)의 전신에서 붉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태현은 유순한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비굴하리만치 고개를 숙였다.
"황실의 귀한 칙사 대감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몸이 선천적인 병약함으로 예의를 다하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콜록..."
"흥, 겉치레는 치워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다."
이건은 품속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황실 칙서를 꺼내 들었다.
"천신 영석광산의 소유권을 즉각 황실로 귀속시키라는 폐하의 어명이다. 변방의 일개 가문들이 감히 황실의 영맥을 사사로이 채굴하는 것은 역모에 준하는 대역죄인 바, 당장 광산의 열쇠와 채굴권을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이 저택을 피로 물들이고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금위영 무사들이 일제히 창을 겨누며 저택을 압박했다.
그때, 태현의 뒤편에서 관복을 단정히 한 지방관 송대인(Song Dae-in)이 떨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송대인은 태현이 어젯밤 쥐여준 서류를 품속에서 꺼내 들며, 이건의 위압적인 안광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칙사 대감, 고정하십시오. 황실의 명령은 지엄하나, 제국의 대명률 세법 제7조 '변방 자치 가문 면세 특별법'에 의거하면, 재난과 이간의 위험이 잔존하는 영지의 영석 자산은 황실이 강제로 몰수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광산의 소유권은 현재 제국 공인 상단인 금풍상단에 합법적으로 담보 저당 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상법상 황실이라 할지라도 상단의 합법적 재산권을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송대인의 목소리는 비록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가 제시한 법률적 조항과 계약서의 명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백했다.
이건의 눈매가 거칠게 일그러졌다. 그는 송대인이 내민 서류들을 낚아채듯 빼앗아 읽어내려갔다. 완벽했다. 세법의 예외 조항과 거대 상단의 저당권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황실의 강제 징수 권한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이건은 서류를 구기듯 움켜쥐며 태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쓸모없는 병약한 서자가 머리를 쓴 것이로군. 송대인 따위가 이런 정교한 법률적 덫을 설계했을 리 없다.'
이건은 태현의 나약한 외양 뒤에 숨겨진 천재적인 두뇌를 직감했다. 합법적인 명분이 가로막힌 상황에서 억지로 군대를 움직인다면, 청룡령의 세 강대 세력이 결탁하여 황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거대한 민란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은 교활한 정치가였다. 그는 즉시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무기를 거두게 했다.
"좋다. 법률의 조항이 그러하다면 황실 역시 법도를 지켜야지. 하지만... 이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위태로운 동맹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이건은 저택 내부의 사령탑으로 삼겠다며 공작 저택의 가장 거대한 동편 안채를 강제로 점거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청룡령을 지탱하는 세 아내의 가문 대표들을 개별적으로 비밀리에 소집하기 시작했다. 무력으로 꺾을 수 없다면, 내부로부터 찢어발기겠다는 '이간책(Divide and Conquer)'의 시작이었다.
***
이건이 가장 먼저 불러들인 것은 북무관 소가주 백서설이었다.
이건은 화려하게 꾸며진 집무실 상좌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칼날 같은 기세를 품은 백서설을 흘겨보았다.
"북무관의 소가주여. 내 그대의 명성을 중원에서도 익히 들었거늘, 어찌하여 이런 변방의 쓸모없는 약골 서자에게 검을 바치고 있는가? 그대의 차가운 검강이 저 나약한 자를 호위하는 데 쓰이는 것은 제국의 무인으로서 참으로 통탄할 명예의 실추로다."
백서설은 연청검의 자루를 쥔 채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칙사 대감, 가문의 혼사는 이미 결정된 일이며, 내 남편의 안위를 지키는 것은 내 검의 도리입니다. 황실의 이간질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건은 낮게 웃으며 탁자 위에 붉은 인장이 찍힌 밀서를 밀어놓았다.
"이간질이라니 섭섭하군. 이것은 황실이 보증하는 최고급 '지극 한철(Ultimate Cold Iron)'의 독점 유통 권한이다. 그대들이 영석 광산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는 검을 제련할 한철이 부족해서가 아니던가? 태현과의 혼인을 파기하고 황실의 손을 잡는다면, 북무관은 천하제일의 검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가문의 장로들이 이 제안을 들으면 과연 소가주와 같은 생각을 할까?"
서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문의 실권을 쥔 강경파 장로들이 이 거대한 이권 카드를 본다면 당장 자신을 압박할 것이 분명했다.
***
이건의 교활한 손길은 남옥곡주 제갈진아에게도 뻗쳤다.
이건은 진아의 의학적 호기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남옥곡주여. 그대의 의술은 신의 경지에 달했으나, 뒤틀린 맥을 가진 서자를 치료하는 데 평생을 낭비할 셈인가? 내 그대에게 황실 한림원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금기된 고대 의학 서적들의 열람 권한을 주마. 그 책자들 속에는 그대 가문이 평생을 찾아 헤맨 만독정화의 극의가 담겨 있다. 나약한 서자를 배신하고 황실의 전담 의가로 들어서라. 가문의 영광이 그대 손에 달려 있다."
진아는 은침 통을 쥔 손가락끝에 힘을 주었다. 황실 한림원의 금기 서적은 남옥곡의 의학적 숙원을 해결할 수 있는 거대한 미끼였다. 가문 내부의 배신 장로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당장 곡주의 지위를 흔들며 태현과의 결별을 요구할 터였다.
***
마지막으로 이건은 적련교주 염설화를 마주했다.
이건은 설화의 야성적이고 정열적인 성정을 흔들기 위해 가장 잔인한 제안을 던졌다.
"적련교주여. 그대들이 마교라 불리며 정파들의 사냥감이 되는 비참한 세월을 언제까지 견딜 셈인가? 태현을 버리고 광산의 채굴권을 황실에 인도한다면, 황실의 이름으로 적련교를 정식 '정파(Orthodox)'로 승인해 주마. 또한 교단 내에서 그대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마혁의 잔당들을 황실 금군이 직접 소탕해 주지. 마교의 요녀로 죽을 것인가, 황실의 비호를 받는 교주로 군림할 것인가?"
설화의 붉은 채찍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교단의 정식 정파 승인과 반대파 소탕은 적련교의 역사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치명적인 달콤함이었다.
***
이건의 정밀한 이간책은 단 하루 만에 청룡성 저택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황실이 제시한 거대한 이권과 권세의 카드는 세 아내 가문의 원로와 장로들을 미쳐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각 가문의 장로들은 황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소가주와 곡주, 교주를 향해 거센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소가주! 당장 그 병약한 서자와의 정략결혼을 파기하십시오! 지극 한철 유통권은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곡주님! 황실 한림원의 서적을 포기하고 일개 서자의 수발을 들다니, 남옥곡의 조상님들이 통곡할 일입니다!"
"교주! 당장 혼인을 깨고 정식 승인을 받으시오! 사마혁의 무리를 소탕할 기회요!"
저택 내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어제까지 태현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듯했던 세 가문의 무사들 사이에 기묘한 침묵과 경계 어린 눈빛이 오가기 시작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다시 불신과 시기가 싹텄고, 저택의 정원에는 폭풍 전야의 무거운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날 밤, 이건의 집무실에서 나온 세 명의 전령이 붉은 인장이 찍힌 특별 회유 서신을 품에 안고 각각 백서설, 제갈진아, 염설화의 처소로 비밀리에 움직였다.
드르륵, 드르륵...
어두운 서재 안, 태현은 홀로 휠체어 바퀴를 굴려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 아내의 처소 외곽에는 각 가문의 호위 무사들이 삼엄한 침묵 속에 대치하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이간질의 사슬이 그들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태현은 창백한 손가락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나직한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이건, 기어코 가장 추악한 수수를 부리는구나."
어둠 속에서, 세 아내의 처소로 전송된 특별 회유 서신들이 배달되는 순간, 저택 전체를 감싸는 숨 막히는 침묵이 청룡성의 밤공기를 갈가리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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