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날개의 망설임
푸슈우우우—!
해치 잠금장치가 녹아내리며 뿜어내는 매캐한 열기와 스팀이 함교 조종실의 차가운 정적을 짓눌렀다. 렉스를 무참히 짓밟은 고스트-2가 마침내 해치 틈새로 손목에 이식된 단분자 커터를 밀어 넣었다. 초고주파 진동이 일렁이는 보라색 광막이 유리의 목덜미를 베어 넘기기 위해 허공을 갈랐다.
"시우야! 제발!"
유리가 공포에 질려 판도라 단말기를 방패 삼아 몸을 움츠렸고, 조종석 구석의 민우는 눈물을 흘리며 백시우의 차가운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백시우의 의식은 타들어 가는 뇌 신경망 속에서 아레스의 서늘한 목소리와 조우하고 있었다.
- 파일럿. 뇌세포 온도가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의 생체 신호가 소멸하기 직전입니다. 자아 붕괴를 감수하고 신경 동조를 가속하겠습니까?
‘당연하잖아, 이 기계 놈아.’
시우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사관학교에서 억울하게 쫓겨나 데브리스-7의 쓰레기 더미를 뒹굴 때도, 자신을 유일하게 인간으로 대접해 주었던 동료들이었다. 그들을 이 차가운 void 속에서 개죽음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시우는 심상 공간을 뒤덮은 붉은 불꽃과 레온 발할라의 비열한 환영을 향해 자신의 뇌파 주파수를 강제로 던졌다. 싱크 포트 v4가 척추를 타고 뇌로 치솟는 나노 전류를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쩌저적!
현실의 조종석에 누워있던 백시우의 감은 눈꺼풀 아래로 푸른 양자 광막이 폭발하듯 되살아났다. 그의 왼쪽 안구는 아레스의 붉은색 양자광으로, 오른쪽 안구는 아르고 호의 푸른빛으로 물들며 이중 변색의 기믹이 번뜩였다.
"……사출(Ejection)."
시우는 감각이 죽어버린 왼쪽 다리 대신,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조종석 우측 하단에 위치한 물리적 비상 레버를 끝까지 당겼다. 함교 전정 비상 사출 레버였다.
콰아아앙—!
아르고 호 함교 입구 복도의 비상 격벽이 닫히는 동시에, 고스트-2가 서 있던 전정 구역의 에어록이 강제로 열렸다. 진공의 우주 공간이 뿜어내는 가공할 흡입력이 복도를 집어삼켰다.
"……!"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고스트-2의 칠흑 같은 신체가 사일런트 존의 차가운 붉은 가스 성운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철컥 소리와 함께 외부 해치가 다시 밀폐되고 비상 전력이 복구되자, 함교 내부에는 렉스의 붉은 피와 고르크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녹색 유압 오일만이 처참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시우 형! 깨어난 거야?"
민우가 울먹이며 시우를 붙잡았다. 시우는 뇌 신경 포트가 전소되며 느끼는 극심한 두통과 귓가를 찢는 듯한 만성 이명을 참아내며 조종석에서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목덜미의 싱크 포트 v4에서는 여전히 그을린 스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리…… 아저씨들을 의료실로 옮겨. 아르고 호의 자동 치료 캡슐을 가동해. 민우는 날 보조하고."
시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왼쪽 다리는 여전히 완전한 마비 상태로 힘없이 늘어져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차갑게 빛났다.
유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슴에 깊은 자상을 입은 렉스와 양팔을 모두 잃고 쓰러진 고르크를 아르고 호의 보조 정비용 카트에 싣고 서둘러 함교를 빠져나갔다.
혼자 조종석에 남은 시우가 가죽 벨트로 자신의 paralytic한 왼쪽 허벅지를 조종석 시트에 단단히 묶었다. 그 순간, 아레스의 경고음이 시각 피질을 두드렸다.
- 경고. 사일런트 존 외곽 경계선에 대규모 질량 반응 감지. 발할라 중공업 특별보안기동대 정예 편대가 우리의 퇴로를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전면 스크린의 전자기 노이즈를 뚫고 붉은색 탐지 광망이 아르고 호의 선체를 훑고 지나갔다. 가스 안개 저편에서 날렵한 은빛 날개를 번뜩이며 다가오는 최신예 요격기 편대. 그 선두에 선 기체는 사관학교 시절 시우의 유일한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엘레나의 '실버 윙(Silver Wing)'이었다.
통신망의 잡음을 뚫고, 차갑고 단호한 엘레나의 목소리가 함교 내부로 흘러들었다.
- 미등록 고대 함선. 즉각 엔진을 정지하고 투항하라. 발할라 중공업 특별보안기동대다. 거부 시 즉각 격침하겠다.
"엘레나……."
시우는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옛 동료였던 그녀를 향해 고대의 양자 주포를 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잡힌다면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동료들의 희생은 모두 물거품이 될 터였다. 비행으로 증명해야 했다.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사관학교 시절의 백시우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 적 기체의 록온 주파수 감지. 초정밀 레이저 사격 시퀀스가 개시됩니다. 회피 확률 12%.
"아레스, 동조율 올려."
- 승인합니다. 뇌 신경 동조율 42% 진입. ‘전술 궤적 예측 단계’를 활성화합니다. ‘아레스 전술 경로 보정 법칙’을 시각 피질에 투사합니다.
시우가 왼쪽 눈에 착용한 투박한 홀로그램 단안 렌즈 '크로노스' 너머로,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붉은 실선들이 미리 그려지기 시작했다. 엘레나가 쏠 레이저의 3초 앞 미래 궤적이었다.
피융! 피융! 피융!
실버 윙의 포구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레이저 광선들이 사일런트 존의 붉은 가스를 가르며 쇄도했다.
시우는 이명으로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으며 오른손 하나로 조종간을 미세하게 꺾었다. 아레스가 그려준 붉은 회피선 위로 아르고 호의 선체를 0.001mm의 오차도 없이 밀착시키는 극한의 정밀 비행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레이저 광선이 아르고 호의 외장 장갑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며 전자기 스파크를 일으켰다. 시우의 왼쪽 시야가 과부하로 인해 순간적으로 흑백으로 흐려지는 패널티가 찾아왔지만, 그는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아르고 호는 은빛 날개들이 펼쳐놓은 촘촘한 화망의 실핏줄 같은 틈새를 유려하고 변칙적인 곡선을 그리며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그것은 사관학교 시절, 시우가 엘레나를 꺾고 수석을 차지할 때 보여주었던 특유의 변칙 선회 궤적이었다.
실버 윙의 조종석에 앉아 있던 엘레나의 눈동자가 그 믿을 수 없는 비행 궤적을 바라보며 사정없이 흔들렸다. 사격 중지 레버를 쥔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비행은…… 백시우? 너 정말 살아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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