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의 덫
진공의 우주는 침묵으로 가득 차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백시우의 귓가에는 고막을 찢을 듯한 경보음과 선체가 삐걱거리는 비명이 가득했다.
대기권을 돌파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은빛 별들의 바다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르고 호를 겹겹이 에워싼 발할라 중공업 특별보안기동대의 거대 전함들이었다. 그 선봉에 선 중형 전함 ‘아이언 클로’의 거대한 포신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조종석 우측 콘솔에서 스파크가 튀며 매캐한 오존 냄새가 풍겼다. 함교 전면의 홀로그램 스크린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며 경고 메시지를 쉴 새 없이 띄웠다.
[경고: 초고출력 중력파 고정 감지.]
[선체 외부 압축률 급증. 구조 프레임 변형 위험.]
“으윽……!”
시우는 신음하며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목덜미에 이식된 ‘싱크 포트 v4’가 터질 것처럼 뜨거워지며 척추를 따라 찌릿한 열감을 방출했다. 아레스와의 동조율이 35% 선에 고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이전의 무리한 기동 여파로 왼쪽 다리는 여전히 차가운 대리석처럼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시우는 한 손으로 허벅지를 강하게 내리쳤으나,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오른쪽 다리와 온전한 양손만이 아르고 호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 파일럿, 적 전함 ‘아이언 클로’의 함장 바실리가 중력 견인 광선(Tractor Beam)의 출력을 임계치까지 끌어올렸습니다. 현재 아르고 호의 주 엔진 추진력 대비 견인력이 142%를 초과했습니다. 물리적인 탈출 확률은 0%입니다.
뇌리 속에서 울리는 아레스의 음성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하고 서늘했다. 마치 남의 일인 양 연산 수치만을 읊조리는 기계의 오만함이 섞여 있었다.
“0%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엔진 출력을 한계까지 올려!”
시우가 이빨을 악물며 주 추진력 레버를 앞으로 끝까지 밀어붙였다.
쿠우우우웅—!
아르고 호 하부의 양자 도약 엔진이 폭발적인 굉음을 내며 황금빛 플라즈마 제트를 뿜어냈다. 선체가 무섭게 진동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요동쳤다. 하지만 백자색으로 빛나는 아이언 클로호의 중력 견인 광선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쇠사슬처럼 아르고 호의 선미를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엔진 출력을 올릴수록, 두 중력장의 충돌로 인해 아르고 호의 내부 구조 프레임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도련님! 엔진 지지대가 휘어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도약 엔진이 선체에서 통째로 뜯겨 나간다!”
통신 홀로그램 화면 너머로 수석 기관장 고르크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의 이마에 새겨진 플라즈마 화상 흉터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잘려 나간 기계 어깨 관절에서는 응급 지혈 젤 사이로 미세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그 뒤편에서 소년 민우가 화상 입은 손가락으로 보조 냉각 파이프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고: 선체 하부 티타늄 프레임 피로도 89%. 구조적 붕괴 임박.]
“젠장…… 직접 돌파는 불가능한가.”
시우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왼쪽 눈은 아레스의 붉은빛 양자광으로, 오른쪽 눈은 아르고 호의 푸른빛으로 물든 채 떨리고 있었다.
- 당연한 결과입니다. 바실리 함장은 정규 함대 포격 지휘 전술의 베테랑입니다. 그는 아르고 호의 주 배터리가 방전되어 보조 실드가 작동하지 않는 취약점을 정확히 노렸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적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면 아르고 호는 12초 이내에 분해됩니다.
아레스의 말대로였다. 아이언 클로호 주변의 요격기 편대들이 아르고 호를 포위하며 사격 통제 록온을 완료하고 있었다. 바실리 함장은 아르고 호의 발을 묶어두고 제레드 대장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가만히 앉아서 죽으라는 거야? 아레스, 네 잘난 초연산으로 방법을 찾아내!”
시우가 소리쳤다. 그의 목덜미 포트에서 나노 스팀이 치익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신경 과부하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 연산 경로를 재구성합니다.
그 순간, 시우의 시각 피질 위에 기묘한 기하학적 선들이 붉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르고 호 전방에 위치한 데브리스-7의 외곽 궤도 소행성대였다. 수많은 고철 파편과 거대 광물 암석들이 무질서하게 회전하고 있는 우주의 무덤.
- 적 전함의 에너지는 현재 중력 견인 광선에 92%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적 주포의 사격 제어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고 있습니다. 주변 소행성의 질량과 중력 상수를 이용해 견인 광선 자체를 굴절시키는 변칙 기동을 제안합니다.
“굴절시킨다고? 어떻게?”
- 아르고 호의 보조 무장, 중력 견인 광선 방출기 ‘타이탄 그립’을 가동하십시오. 대상은 적 전함이 아닙니다.
아레스가 가리킨 붉은 조준선은 아르고 호 좌측 상공을 빠르게 흘러가고 있던 직경 300미터짜리 거대 고철 소행성이었다.
시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아날로그적인 질량체 간섭으로 물리적 법칙을 뒤흔드는 전술. 사관학교의 낡은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오직 실전의 직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행이었다.
“좋아, 기계 놈치고는 꽤 쓸만한 생각이네.”
시우는 마비된 왼쪽 다리를 버텨내며 오른손으로 조종간의 서브 트리거를 힘껏 당겼다.
“타이탄 그립, 기동!”
위이이이잉—!
아르고 호의 좌측 하부 포탑에서 눈부신 황금빛 중력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광선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던 거대 고철 소행성의 표면을 정확히 움켜쥐었다.
철컥하는 둔탁한 물리적 충격이 선체 전체를 흔들었다. 아르고 호의 질량보다 무거운 소행성을 끌어당기자, 두 거대 질량체 사이에 강력한 중력 슬링샷 인력이 발생했다.
“고르크! 보조 배터리 남은 에너지 전부 타이탄 그립으로 전하해!”
“뭐라고? 실드 배터리까지 전부 털어 쓰겠다고? 미쳤어!”
“지금 안 쓰면 쓸 일도 없어! 당장!”
시우의 외침에 고르크가 이빨을 갈며 전력 배분 다이얼을 끝까지 돌렸다. 아르고 호의 마지막 보조 실드 배터리가 방전되며 황금빛 견인 광선의 굵기가 배로 늘어났다.
쿠구구구구!
거대 고철 소행성이 궤도를 이탈하여 아르고 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시우는 조종간을 움켜쥐고 소행성의 추락 경로를 정확히 아이언 클로호가 쏘아 올린 백자색 견인 광선의 중심선 위로 정렬했다.
마치 거대한 방패를 자신과 적 전함 사이에 끼워 넣는 형국이었다.
적 전함 아이언 클로의 함교에서 바실리 함장의 다급한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파지직! 파지이이직—!
거대 소행성이 백자색 중력 견인 광선의 경로를 가로막는 순간,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전자기 소음이 우주 공간을 뒤흔들었다. 아이언 클로호의 강력한 중력 견인 광선이 아르고 호 대신 엄청난 질량의 소행성을 정면으로 움켜쥐게 된 것이었다.
중력의 초점이 급격히 흐트러지며 전함의 견인 제어 컴퓨터에 심각한 오작동 연산 노이즈가 발생했다.
“지금이다!”
시우가 외쳤다.
두 중력장의 간섭을 이기지 못한 소행성이 내부 철광석 성분과 양자 에너지의 충돌로 인해 과부하를 일으키며 백색 섬광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앙—!
우주 공간에 거대한 금속 파편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소행성이 분해되며 발생한 엄청난 충격파가 아르고 호의 선미를 강하게 밀어 올렸다. 동시에 아르고 호를 묶고 있던 보이지 않는 중력의 사슬이 완전히 끊겨 나갔다.
[경고: 외부 중력장 구속 해제.]
[도약 엔진 출력 임계치 도달. 가속 개시.]
“해냈어……!”
민우의 기쁨 섞인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흘러왔다.
중력의 덫에서 벗어난 아르고 호는 소행성 폭발의 충격파를 추진력 삼아 데브리스-7의 궤도를 벗어나 우주 저편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급가속하기 시작했다. 선체가 가벼워지며 자유로운 비행의 감각이 시우의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는 찰나에 불과했다.
우측 아크릴 창 너머, 데브리스-7의 검은 대기권 경계선 위로 산맥 같은 거대한 함선들의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발할라 중공업 특별보안기동대의 총사령관, 제레드 대장이 이끄는 본대 함대였다.
웅장하고 차가운 강철의 요새들이 아르고 호의 탈출 경로를 완전히 가로막으며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그들의 주포 끝에서 눈이 멀 것 같은 푸른빛 플라즈마 에너지와 초고속 레일건의 탄환들이 밤하늘의 유성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 전체가 적들의 무자비한 화망으로 뒤덮였다.
동시에, 아르고 호의 레이더망 사각지대에서 클로킹 장막을 켠 채 은밀히 접근하던 특별기동대의 정예 요격기 편대, ‘섀도우 편대’의 붉은색 센서 광망들이 아르고 호의 양 측면을 집요하게 겨누며 포위를 좁혀왔다.
더 거대하고 자비 없는 진짜 지옥이 그들의 앞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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