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개의 사슬, 붉은 밀지
어둠을 뚫고 날아든 붉은 신호탄의 불빛이 무경전의 차가운 기와 위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붉은 광망을 바라보는 심청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올 것이 왔다. 황실 동창(東廠)의 전령이 보내는 은밀한 접선 신호. 그것은 마교의 소교주 ‘무경’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그에게, 자신이 결국 목줄이 묶인 사냥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일깨워 주는 핏빛 낙인이었다.
청언은 침상 옆에 비장해 두었던 작은 단지를 꺼냈다. 단지 안에는 음기를 머금은 특수 연고인 삼음고(三陰膏)가 담겨 있었다. 그는 도포 자락을 걷어 올리고, 감각이 죽어버린 하반신의 태음경맥(太陰經脈) 부위에 연고를 조심스럽게 발라갔다.
치이익—.
살을 에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함께 차가운 음기가 꼬여 있던 경맥을 강제로 비틀어 열기 시작했다.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청언은 턱관절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며 비명을 삼켰다. 매번 밤중에 휠체어에서 일어나 암행을 감행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가혹한 육체적 대가였다. 간신히 다리에 미세한 기혈의 흐름이 돌아오자,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영,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침상을 지키거라. 백장로파의 시녀 소설이 다시 문밖을 서성일지 모르니, 각혈 연기를 보인 직후의 위독한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침상 아래 조아리고 있던 대역 무영이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걸고 소교주님의 부재를 감추겠사옵니다.”
청언은 아묵에게 눈짓을 보냈다. 벙어리 하인이자 전직 군사 정보원인 아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경전 외곽의 감시 사각지대를 가리켰다. 백장로의 사병들이 교대하는 찰나의 틈, 그 삼십 초의 시간이 청언이 빠져나갈 유일한 창구였다.
청언은 몸을 날렸다. 마교의 고급 은형 신법인 묵양보(墨影步)와 소리 없는 무경보법(無境步法)이 어둠 속에서 조화롭게 전개되었다. 그의 흑색 도포 자락은 밤공기를 가르는 한 줄기 무형의 바람이 되어, 삼엄한 무경전의 감시망을 흔적도 없이 통과했다. 철저한 어둠 속에서, 그는 흑월곡의 험준한 후문 협곡을 타고 내려가 양주성 외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양주성 외곽, 자욱한 밤안개 속에 가려진 허름한 만복 약방(萬福 藥房).
평소라면 금의위 동료이자 외부 연락책인 이진(李珍)이 약초 냄새를 풍기며 그를 맞이해야 했을 장소였다. 그러나 약방 문을 열고 들어선 청언의 감각이 즉각 경고음을 울렸다. 코끝을 찌르는 은은한 약초 향 뒤편으로, 황실 동창 요원 특유의 음습하고 비릿한 화장 향이 미세하게 섞여 있었다.
청언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지하 접선실로 통하는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한 계단씩 내려설 때마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살기가 그의 피부를 찔러왔다.
지하 밀실의 문을 열자, 희미한 촛불 아래 한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진이 아니었다. 사내는 뾰족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손가락 끝으로 무언가를 굴리고 있었다.
딸깍, 딸깍.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창백하고 병약한 소녀, 그의 여동생 심아란(沈雅蘭)이 소중히 간직하던 나비 모양의 옥비녀였다.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뱀처럼 차갑고 비열한 안광을 지닌 사내, 동창의 감시관 조정필(趙廷弼)이었다.
“늦었구나, 심 포교. 아니, 이제는 마교의 위대하신 소교주 무경이라 불러드려야 하나?”
조정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의 손가락이 옥비녀의 날카로운 끝부분을 지그시 누르자, 청언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품속에 숨겨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청언은 얼굴에 철저한 무표정의 가면을 덧씌웠다. 첩자는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파멸한다. 스승 단벽우가 뼈에 새겨준 첫 번째 규칙이었다.
“이진은 어디 있소?”
청언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 쓸모없는 금의위 쥐새끼는 잠시 다른 임무를 주어 멀리 보냈다. 제독님께서 내리시는 극비의 밀지를 사소한 포교 놈의 손을 거쳐 전달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조정필은 탁자 위의 옥비녀를 툭 던지듯 청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네 여동생 아란이는 북경의 지하 밀실에서 아주 고이 보살피고 있다. 매일 밤 오라버니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하며 눈물로 지새우더군. 그 가녀린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는 오직 네놈의 충성심에 달려 있지.”
그 순간, 청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끔찍한 통증이 치솟았다. 단전이 뒤틀리며 진무신결(眞武神訣)의 정기와 억지로 끌어올렸던 역천마공(逆天魔功)의 마기가 격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매달 복용해야 하는 만성 독약 제어제, 정심단(淨心丹)의 약효가 다해 가고 있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듯한 오한과 함께 검붉은 기운이 그의 목줄기까지 타고 올라왔다.
“으윽……!”
청언이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짚자, 조정필은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며 비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도자기 병을 꺼내어 바닥에 굴렸다.
데굴데굴.
“사냥개에게 주는 먹이다. 받아먹어라.”
청언은 굴욕을 삼키며 병을 집어 들었다. 병을 열어 정심단 한 알을 입안에 털어 넣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전신을 감돌며 폭주하던 마기를 억누르고 뒤틀린 경맥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황실이 채운 보이지 않는 사슬이 그의 영혼을 더욱 단단히 옭아매는 느낌이 전해졌다.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지독한 예속의 독약이었다.
조정필은 청언이 안정을 되찾자, 품속에서 붉은 비단으로 꼼꼼하게 감싸인 두꺼운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올려놓았다. 동창 제독 위충현(魏忠賢)의 직인이 찍힌 비밀 밀지(密旨)였다.
“제독님의 친필 지령이다. 한 달 내로 강남의 정파 문파인 청송파(靑松派)를 흔적도 없이 멸문시켜라. 남녀노소를 막불하고 전원 참수하여 그 시신을 양주성 광장에 걸어두고, 현장에는 마교의 역천마조(逆天魔爪) 흔적을 명확히 남겨라.”
청송파를 멸문시키라는 가혹한 학살 지령. 청송파는 그가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둔 여협 유설아의 사문이자, 강남에서 가장 의롭고 정직한 명문대파였다. 황실은 마교와 정파의 전면 유혈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자신을 도구로 삼아 무고한 백성들과 의인들의 피를 흘리려 하고 있었다.
청언의 내면에서 율법을 수호하던 포교로서의 정의감과 무림의 협(俠)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 명령을 수행한다면 그는 진짜 악마가 될 것이요, 거부한다면 북경에 인질로 잡힌 동생 아란이의 목이 날아갈 터였다.
청언은 차가운 침묵 속에서 두뇌를 극한으로 회전시켰다. 정면으로 거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략으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지금 즉시 청송파를 치는 것은 불가능하오.”
청언의 단호한 말에 조정필의 눈빛이 순식간에 뱀처럼 날카로워졌다. 그의 손이 허리에 찬 음독 비수로 향했다.
“배신하겠다는 것이냐, 심청언? 네 여동생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내 말을 끝까지 들으시오, 감시관.”
청언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조정필의 눈을 똑바로 들이받았다. 그의 안광에는 마교의 소교주로서 단련된 위압적인 기세가 서려 있었다.
“마교 내부의 권력 구도를 전혀 모르는 소리요. 전임 교주가 실종된 이후, 실권자 백장로(白長老)는 내가 다리를 쓰지 못하는 병약한 허수아비인 줄 알고 매일같이 독살과 탄핵을 시도하고 있소. 교단 내부의 사병들 태반이 백장로의 손아귀에 있단 말이오.”
청언은 탁자 위의 지도를 가리키며 조목조목 설명을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리하게 교단의 정예를 움직여 청송파를 공격하려 든다면, 백장로는 즉각 내가 정파와 내통했다거나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구실을 잡아 나를 탄핵하고 무경전을 장악할 것이오. 내 신분이 노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요. 내가 쓰러지면 동창이 마교를 통제하고 정사 대전을 유도하려던 제독님의 대계는 그 즉시 수포로 돌아가오. 감시관, 당신 역시 임무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제독님의 노여움을 피하지 못할 터인데, 감당할 수 있겠소?”
조정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청언의 논리 정연한 반박과 마교 내부의 권력 암투 분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만약 사냥개인 심청언이 마교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해 개죽음을 당한다면, 조정필 본인의 출세 길 역시 완전히 막혀버릴 터였다.
“……그렇다면 어찌하겠다는 말이냐.”
“먼저 백장로의 감시망을 무력화하고, 교단 내부의 파벌을 완벽히 숙청하여 내 입지를 다져야 하오. 교단의 무력을 온전히 내 손아귀에 쥐어야만, 제독님의 지령을 흔적 없이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소. 내게 시간을 주시오.”
조정필은 침을 삼키며 청언을 노려보았다. 사냥개인 줄 알았던 첩자가 어느새 자신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언이 제시한 마교 내부의 위험성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좋다. 제독님께는 마교 내부의 세력 개편을 위해 기한을 조정한다고 보고하겠다. 단, 딱 한 달이다. 한 달 내로 백장로를 제압하고 청송파의 피로 강남을 물들이지 못한다면…… 그때는 네 여동생의 잘린 머리가 무경전 앞마당에 배달될 것이다.”
조정필은 나비 모양 옥비녀를 낚아채 품속에 넣고는, 음산한 살기를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지하 밀실.
심청언은 탁자 위에 놓인 붉은 비단 밀지를 천천히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동틀 정도로 움켜쥔 비단 자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황실의 비정함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와,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얼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사냥개의 사슬을 쥔 자들이 누구인지, 그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자신이 어떤 피를 흘려야 하는지 그는 이제 명확히 알고 있었다.
‘조정필, 그리고 위충현…… 네놈들이 채운 이 사슬이 결국 네놈들의 목을 죄는 교살의 끈이 되게 해주마.’
심청언은 붉은 밀지를 품속 깊은 곳에 밀어 넣으며, 어둠이 짙게 깔린 만복 약방의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밤안개 속으로 녹아드는 그의 등 뒤로, 차가운 살기가 소리 없이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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