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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관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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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소리가 지워진 적막 속에서, 이도진의 귓가에는 오직 날카로운 이명만이 삐 소리를 내며 고막을 찌르고 있었다.


양쪽 귀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목덜미를 적시며 차갑게 식어갔다. 성기사단장 서은하의 무의식 속에 걸려 있던 가혹한 세뇌 주술을 강제로 깨뜨린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머릿속이 깨질 듯이 울렸고, 전신은 솜솜이 물을 먹은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도진은 쓰러질 수 없었다. 무력이 전혀 없는 최하급 서기인 그가 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단 한 순간도 이성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도진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자신의 왼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은하가 평생의 충성을 맹세하며 끼워준 가문의 보물, ‘수호의 은빛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은하가 곁에 있기에 반지는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며 도진의 신체 주변에 투명한 신성 보호막을 상시 전개하고 있었다. 나약한 육체를 지닌 그에게 마침내 최소한의 물리적 방패가 생긴 셈이었다.


“주군…….”


도진의 눈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서은하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세상의 소리가 차단되었기에 도진은 오직 그녀의 입술 모양과 공기의 미세한 파동에 의지해 대화를 읽어내야 했다. 은하의 갈색 눈동자에는 자신을 위해 영혼을 깎아낸 주군을 향한 깊은 죄책감과 맹목적인 충성이 서려 있었다.


도진은 입가에 묻은 피를 대충 훔쳐내며 은하에게 괜찮다는 듯이 나직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은 명확한 형태를 그리며 속삭였다.


‘나는 괜찮습니다, 은하 씨.’


스스스스—


그 감동적인 주종의 서약도 잠시, 아지트 지하실 ‘안식처’의 서늘한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무겁고 축축한 한기가 바닥을 타고 기어왔다.


도진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려 반쯤 열린 철문 틈새를 바라보았다. 그늘진 문틈 너머, 칠흑의 어둠 속에서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서 있는 사내, 아니 여인이 있었다. 마왕군 사천왕 아샤였다.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기가 질투와 독점욕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은하가 도진에게 무릎을 꿇고 가문의 반지를 바치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아샤의 눈빛은 살기로 번뜩였다.


‘성마 반발(Holy-Demonic Repulsion)……!’


도진은 가슴팍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 은하가 뿜어내는 순수한 신성력과 아샤가 내뿜는 광포한 마기가 좁은 지하실 내부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두 상극의 에너지가 소울링크의 통로를 타고 도진의 약한 심장으로 유입되자, 심장 판막이 뒤틀리는 극통이 밀려왔다.


아샤의 입술이 비틀리며 잔혹한 호선을 그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모양은 도진의 뇌리에 직접적인 비수처럼 꽂혔.


“인간 서기 소년.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저 성당의 사냥개와 손을 잡은 것이냐? 네 심장은 내 마력으로 뛰고 있거늘, 감히 다른 계집의 반지를 끼고 맹세를 받아들여?”


아샤의 살기가 소울링크를 타고 역류하려 하자, ‘심장 동조 임계점’이 위험 수치까지 치솟았다. 도진은 황급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 박동 동기화 호흡법(Heartbeat Synchronization).’


그는 뇌의 통증을 일시 차단하는 ‘통각 차단’ 체질을 가동한 채, 자신의 맥박을 분당 60회로 강제 고정시켰다. 붉은 사슬의 서에서 터득한 조율 호흡법이 가동되자, 도진의 심장에서 잔잔한 붉은색 파동이 뿜어져 나와 아샤의 요동치는 마기를 미세하게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도진은 떨리는 손을 들어 벽면에 걸려 있는 ‘안연당 평화 유지 수칙’ 액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의 귀에서 흘러내린 피를 보여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쥐새끼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의 입모양을 읽은 아샤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었다. 은하 역시 검날을 세우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도진은 품속에서 은빛 나침반 모양의 고대 성물, ‘실버 컴파스’를 꺼내 들었다. 나침반의 유리에 도진의 피 한 방울이 닿자, 내부의 마법 회로가 활성화되며 은은한 은빛 에너지가 투영되었다.


나침반의 세밀한 바늘들이 미친 듯이 회전하더니, 이내 지하실 천장 너머, 대도서관 지하 수로 입구 방향을 가리키며 붉은 빛을 발했다.


도진은 바닥에 한쪽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귀는 들리지 않았지만, 손바닥을 통해 지상에서부터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쿵. 쿵. 쿵. 쿵.


철갑옷이 부딪치는 무겁고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 그리고 인간의 것이 아닌, 기괴하게 씩씩거리는 맹수들의 거친 호흡 진동.


‘이단 심문소(Inquisition)의 추적견 마수들이다.’


도진의 안색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대주교 말파스의 직속 집행 기구이자, 한 번 문 타겟은 영혼까지 쫓아간다는 사냥개 부대가 마침내 대도서관 지하 심연 구역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들의 선봉에 선 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단 심문소 부대장, 율리우스.


기괴한 가죽 마스크를 쓰고 핏빛 심문관 제복을 입은 채, 타겟의 고통을 추적하는 데 미쳐 있는 냉혹한 6성급 암살 전사. 그 뱀 같은 사내가 마수들을 이끌고 이 지하 수로 미로 속으로 진입한 것이 틀림없었다.


긁어억, 긁적.


안식처의 두꺼운 철문 바로 바깥쪽 석벽에서 기괴한 마찰음이 느껴졌다. 마수들이 도진이 세뇌 주술을 깨뜨릴 때 흘렸던 피 냄새를 감지하고 벽을 긁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은하가 성검 천광의 자루를 꽉 쥐며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 적들을 베어버릴 기세를 보였다.


도진은 황급히 은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상대는 이단 심문소의 정예 부대입니다. 여기서 전투를 벌여 마력과 성력이 대폭발하는 순간, 대성당 상부의 모든 감시 결계가 이곳을 조준할 겁니다. 우리는 이 안식처와 함께 생매장당할 겁니다.’


무력이 없는 도진의 머리는 극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내리며 탈출 경로를 연산하기 시작했다.


‘왜 이리 빨리 위치를 특정당했지? 지하 수로의 은밀한 지하실은 성당의 공식 지도에도 없는 곳인데.’


도진은 실버 컴파스의 유리를 응시했다. 나침반 내부의 마법 파동을 정밀 분석하던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침반 중심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력 선들 중 하나가, 아주 희미하지만 끊임없이 도진 자신의 몸을 가리키고 있었다. 외부에서 심어진 강제적인 마법 파동이었다.


‘내 몸에 추적 장치가 심겨 있다.’


도진은 서둘러 자신의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가죽 예복의 소맷자락, 안감, 바지 깃까지 샅샅이 뒤지던 그의 손길이 목덜미의 깃 부분에서 멈췄다.


그곳에 아주 미세하게, 손톱 크기만 한 투명한 마법 낙인이 음각되어 있었다. 신성력의 기운을 차갑게 뿜어내는 정밀한 추적 낙인.


‘이단 심문관의 추적 인장(Inquisitor's Tracking Sigil)이다.’


율리우스 부대장이 과거 도서관 내부를 순찰할 때, 혹은 요나스 서기를 체포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도진의 옷깃에 은밀히 묻혀둔 것이 틀림없었다. 대상자가 이동할 때마다 대기 중에 미세한 은빛 마력 궤적을 남겨 추격을 용이하게 만드는 잔인한 도구였다.


이 인장이 살아있는 한, 그들이 지하 수로 어디로 도망치든 율리우스의 마안(Magic Eye)을 피할 수 없었다.


철문 바깥의 진동이 점점 더 강해졌다. 율리우스의 발걸음이 아지트 바로 앞 통로까지 도달했음이 느껴졌다. 율리우스의 마안은 투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이 석벽 너머를 투시하는 순간,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도진은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그는 아샤를 향해 손을 뻗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외쳤.


‘아샤! 마정석 가루를!’


아샤는 도진의 눈빛에 서린 치밀한 지략을 읽어내고, 군말 없이 품속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주머니 속에는 마족들이 무기나 마법진을 활성화할 때 사용하는 극도의 어둠 에너지가 응축된 ‘정제된 마정석 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도진은 가죽 주머니를 열어 검은 가루를 한 움큼 쥐었다.


치이이익—!


“윽……!”


마정석 가루가 도진의 맨살에 닿는 순간, 살점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화상 통증이 몰려왔다. 인간의 육체가 정제된 마기의 응축물을 직접 만진 대가였다. 손가락 끝의 혈관들이 급격히 수축하며 검게 석화되기 시작했고, 손끝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도진은 이빨을 악물며 ‘통각 차단’ 능력을 극대화했다. 뇌 신경의 비명을 강제로 억누른 채, 그는 검게 변해가는 손가락으로 옷깃에 새겨진 추적 인장 위에 마정석 가루를 거칠게 비벼 뭉갰다.


신성력 기반의 추적 인장과 마족의 순수한 마정석 가루가 만나자, 상극의 에너지가 부딪치며 미세한 불꽃이 튀었다.


지지직, 파스스스!


추적 인장의 마법 회로가 마기에 오염되며 주파수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실버 컴파스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주파수의 교란을 증명했다.


도진은 은하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은하 씨, 가죽 예복의 안감을 뜯어 문틈에 채우세요! 마기 차단용 가죽 예복(Magi-Blocking Leather Robe)의 방마 성분으로 율리우스의 마안 투시를 굴절시켜야 합니다!’


은하는 도진의 의도를 즉각 간파하고, 자신의 성검 천광의 검날을 아주 미세하게 조절해 도진의 예복 안감을 순식간에 잘라냈다. 그리고 그 방마 가죽 조각들을 철문 틈새와 석벽의 갈라진 틈에 꼼꼼히 밀어 넣었다. 율리우스의 마안이 발사하는 투시 마법의 궤적을 굴절시켜 내부의 열상을 가리기 위한 완벽한 차단막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도진은 인장이 묻은 옷깃의 깃 부분을 가차 없이 찢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아지트 천장 구석에 연결된, 도서관 외곽 숲속으로 이어지는 작은 공기 환기구 파이프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아샤를 향해 찢어진 깃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샤, 바람의 마력으로 이걸 환기구 너머 외곽 숲 깊은 곳으로 날려 보내세요. 지금 당장!’


아샤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손가락 끝에 미세한 바람의 마기를 실어, 찢어진 옷깃 조각을 환기구 파이프 깊숙한 곳으로 쏘아 보냈다. 정제된 마정석 가루와 뒤엉킨 추적 인장은 엄청난 마력 반응을 뿜어내며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도서관 외곽 숲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그 순간이었다.


쿵.


철문 바로 바깥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멈췄다.


지하실의 공기가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문틈으로 밀어 넣은 가죽 안감 너머로, 기괴한 보랏빛 마안의 광채가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율리우스가 마안을 가동해 석벽 내부를 투시하려 하는 것이었다.


도진은 숨을 죽인 채, 은빛 반지가 끼워진 손으로 은하와 아샤의 손을 꼭 쥐었다. 세 사람의 심장 박동이 소울링크를 통해 고요하게 동조되었다. 은빛 반지의 보호막이 그들의 생체 마력 파동마저 미세하게 감싸 안아 숨겨주었다.


벽 너머에서 스며들던 보랏빛 광채가 가죽 안감의 방마 성분에 부딪쳐 기묘하게 굴절되며 흩어졌다. 율리우스의 시야에는 그저 흙더미로 가득 찬 붕괴된 공동만이 보였을 터였다.


율리우스가 의심스러운 듯 철문 손잡이에 손을 얹으려던 바로 그 찰나.


파지직—!


율리우스의 품속에서 이단 심문소의 통신용 마법 석판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석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급한 붉은색 마력 신호가 문틈을 통해 도진의 눈에 들어왔.


[부대장님! 도서관 외곽 숲속에서 타겟의 마력 반응이 대폭발했습니다! 엄청난 마기 파동입니다! 마왕군의 정찰대로 추정됩니다!]


철문 손잡이에 닿아 있던 율리우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기괴한 가죽 마스크 너머로 차가운 숨을 내쉬며, 철문 앞 석벽을 마지막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마안이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외곽 숲에서 감지된 거대한 신호는 심문소의 최우선 타겟이었다.


터벅, 터벅.


마침내 율리우스가 발걸음을 돌려 지하 수로의 출구 방향으로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추격견 마수들의 씩씩거리는 진동 역시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아…….”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 적막 속에서, 도진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의 검게 석화된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극심한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지만, 아지트의 파멸을 막아냈다는 안도감이 그를 감쌌.


은하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도진의 검게 변한 손을 자신의 성스러운 온기로 감싸 안았고, 아샤 역시 복잡한 눈빛으로 도진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위기는 넘겼으나, 추격대가 도서관 외곽 숲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으니 성도를 탈출해야 할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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