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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지 않는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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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안식처’의 공기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천장 벽면을 타고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이었다.


그 어두운 창고 구석에서, 대륙 최강의 검사라 불리던 성기사단장 서은하가 비에 젖은 새처럼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백색 에테르 갑옷은 군데군데 진흙과 정체 모를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고, 단정하게 땋아 내렸던 금발은 헝클어져 어깨 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평생을 바쳐 충성해 온 성당으로부터 ‘마녀’로 낙인찍혔다. 아군이었던 기사들에게 검을 겨누고 겨우 탈출해 이곳으로 숨어든 그녀의 영혼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내가…… 내가 이단이라니.”


은하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틈새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신의 이름으로 악을 베어왔거늘. 내가 지켜온 기사도와 정의는 전부 허상이었단 말인가…….”


자괴감과 절망이 그녀의 목소리를 짓눌렀다. 평생을 지탱해 온 신앙의 붕괴는 그녀의 자아마저 무너뜨리고 있었다. 은하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성검 천광(天光)을 바라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던 황금빛 신성력은 온데간데없고, 검날은 주인의 심상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 검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에게 버림받은 마녀에게 성검이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


은하의 눈동자에 지독한 자기혐오가 서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성검 천광의 검날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무릎 위에 대고 부러뜨리려 힘을 주기 시작했다. 대륙의 보물이라 불리는 성검이 주인의 자폭적인 살기에 미세하게 비명을 질렀다.


“은하 씨! 멈추세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도진이 허겁지겁 그녀에게 달려갔다. 도진은 무력이 전혀 없는 나약한 서기에 불과했지만, 지금 은하의 자해를 막지 못하면 소울링크로 연결된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무엇보다, 이 고결한 기사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모습을 눈앞에서 두고 볼 수 없었다.


도진은 주저 없이 은하의 차갑고 떨리는 양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기사의 단단한 손아귀 힘에 도진의 약한 뼈마디가 으스러질 듯 아파왔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이걸 놓아라, 서기 소년.”


은하가 핏발 선 눈으로 도진을 노려보았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나는 성당을 배신한 대역죄인이다. 가문에서도 파문당한 추악한 마녀다! 이런 나를 살려두어서 무엇 하겠느냐!”


“성당이 곧 신은 아닙니다!”


도진이 그녀의 뺨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외쳤다. 그의 창백한 안색 위로 타오르는 눈빛만큼은 얼음처럼 냉철하고도 확고했다.


“은하 씨,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부패한 대주교 말파스의 더러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진짜 신의 뜻입니까? 아니면, 그 음모에 맞서 무고한 생명들을 구하는 것이 진짜 신의 정의입니까?”


도진은 도서관 서기 시절 분석했던 교리의 허점을 파고들며 ‘성기사단 신념 조항 역행’의 논리를 펼쳤.


“성기사단의 제1조항은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수호한다’입니다. 대주교는 신의 이름을 팔아 무고한 이종족들을 생체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은하 씨가 지키려 한 것은 대주교의 권력입니까, 아니면 기사단의 진짜 신념입니까? 당신은 신을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신의 이름을 사칭하는 사악한 위선자들을 거부했을 뿐입니다!”


도진의 날카로운 웅변이 지하실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은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평생을 주입받아 온 성당의 교육과 도진이 제시한 진실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을 지배해 온 신앙의 장벽은 너무나도 견고했다. 은하는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시끄럽다! 머리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신이 나를 거부하셨는데, 내게 무슨 기사 자격이 있단 말이냐!”


은하의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소울링크의 통로를 타고 도진의 가슴으로 역류해 들어왔다. ‘심장 동조 임계점’이 위험 수치까지 치솟으며 도진의 심장이 마비를 일으키려 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극통에 도진의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울컥 배어 나왔다.


‘말로써는 이 견고한 신앙의 벽을 깨뜨릴 수 없다. 평생 동안 각인된 세뇌 주술이 그녀의 영혼을 묶고 있어.’


도진은 직감했다. 지금 은하의 무의식 속에 새겨진 성당의 강제 세뇌 주술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를 방치하면 그녀의 영혼은 붕괴하고, 자신 역시 공멸할 터였다.


‘그렇다면, 영혼으로 직접 부딪치는 수밖에.’


도진은 떨리는 은하의 이마 위로 자신의 오른손을 얹었다. 그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소울링크 완화용 초커 안쪽의 침들이 혈맥을 강하게 자극했다. 도진은 자신의 숨결을 가다듬으며, 소울링크의 정신적 통로를 개방했다.


“영혼의 위로(Soul Comfort).”


도진이 나직하게 읊조리는 순간, 그의 의식이 육체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은하의 심층 무의식 세계 속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 * *


눈을 뜨자, 사방이 끝없는 백색 대리석으로 가득 찬 거대하고 차가운 성당이 나타났다. 그곳은 은하의 마음속 심상 세계였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그 백색의 공간 중앙에, 조그만 어린아이의 형상이 웅크려 울고 있었다.


겨우 일곱 살 남짓해 보이는 어린 시절의 서은하였다.


아이는 온몸이 채찍 자국과 흉터로 피투성이가 된 채,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허공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직자들의 오만한 목소리가 회안처럼 울려 퍼졌다.


— 고통은 신이 네게 내린 축복이다. 피를 흘려라. 그래야만 무가 가문의 기사로서 자격을 증명할 수 있다.

— 조금이라도 나약함을 보인다면 너는 신의 버림을 받은 죄인이다. 울지 마라. 기도는 오직 검 끝으로만 바치는 것이다.


“아니야…… 너무 아파…… 무서워……”


어린 은하가 조그만 손으로 귀를 막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가혹한 아동 학대에 가까운 훈련과 종교적 주입이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거대한 트라우마의 대성당을 지어놓은 것이었다.


도진은 천천히 걸어가 울고 있는 어린 은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은하 씨.”


“……누구세요? 나를 벌하러 온 신의 사자인가요?”


어린 은하가 공포에 질린 갈색 눈동자로 도진을 올려다보았다. 도진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나직하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아파하는 것은 나약한 것이 아니고, 우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사랑받고 싶었던 평범한 아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검을 멈추면 모두가 나를 쓸모없다고 버리는걸요. 신도 나를 미워하실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가혹한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 신의 천도라면…….”


도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그 천도를 거부하겠습니다.”


그 순간, 은하의 무의식 세계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백색 대성당의 천장이 갈라지며, 거대한 황금빛 신의 우상이 도진을 향해 무자비한 신성 압박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말파스 대주교와 성당의 고위 주술사들이 은하의 영혼에 걸어두었던 ‘정신 세뇌 주술’의 방어 장벽이 작동한 것이었다.


— 필멸자의 영혼이 감히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 드는가! 사라져라, 오류의 그릇이여!


거대한 황금빛 손이 도진의 영혼을 짓눌러 지워버리려 했다.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극통에 도진의 심상이 흔들렸다. 육체로 치면 심장마비에 걸려 즉사할 수준의 영적 압박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천 년 전 대륙을 조율했던 고대 조율자의 의지, 그리고 신들의 억압에 대항하려는 본능적인 저항력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천도 거부의 맹아(Bud of Heavenly Refusal).’


도진의 전신에서 투명하면서도 굳건한 장막이 일어나 거대한 황금빛 손을 정면으로 튕겨냈다. 신들이 정해둔 가혹한 운명의 법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초월적인 거부의 힘이었다.


콰아아앙—!


도진의 면역 장벽과 세뇌 주술의 힘이 심상 세계 한가운데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주술의 봉인 장벽이 쩍쩍 갈라지며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커흑……!”


현실 세계의 지하실에서, 도진의 육체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세뇌 주술을 강제로 깨뜨린 영적 반동으로 인해 도진의 양쪽 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셨다. 머릿속이 깨질 듯한 이명과 함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완벽하게 지워졌다. 일시적인 청력 상실의 페널티가 그를 덮친 것이다.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 침묵 속에서도, 도진은 심상 세계 속에서 어린 은하를 더욱 꽉 안아주었다.


“은하 씨. 성당의 기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당신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위대한 기사입니다. 이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당신 자신을 위해 검을 쥐세요.”


그 따뜻한 온기가 어린 은하의 피 묻은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백색의 차가운 대성당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은은한 햇살이 내리쬐는 고요한 평원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주술의 사슬이 풀린 은하의 영혼이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이었다.


* * *


허억—!


서은하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지하실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그녀의 뺨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머리를 짓누르던 광기 어린 두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을 여전히 꼭 쥔 채, 양쪽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이도진의 모습이 보였다. 도진의 안색은 종이처럼 창백했고, 은빛으로 물들었던 귀밑머리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지, 도진은 초점 없는 눈으로 은하를 보며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은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소년은 무력도 마력도 없는 나약한 서기였다. 그런 그가 자신을 절망 속에서 건져 올리기 위해, 성당의 가혹한 세뇌 주술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자신의 영혼을 깨뜨린 것이다.


평생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지독한 부채감, 그리고 한 남자를 향한 맹목적인 신뢰와 감정의 격동이 그녀의 전신을 관통했다. 은하의 가슴속 소울링크 사슬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스릉.


은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도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평생 동안 신의 제단에만 바쳤던 성검 천광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도진의 발밑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기사가 주군에게 바치는 평생의 서약이자 복종의 의식이었다.


도진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은하의 입술 모양을 통해 그녀가 바치는 맹세를 명확히 읽을 수 있었다.


“나, 서은하는 이 시간부로 성당의 기사가 아님을 선언합니다.”


은하가 도진의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눈물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검은 더 이상 위선적인 신을 위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도진…… 오직 내 영혼을 구원한 당신만을 위해, 나의 평생을 바쳐 당신의 무너지지 않는 방패가 되겠습니다.”


은하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가문의 보물이자 단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호의 은빛 반지’를 빼냈다. 그리고 도진의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정성스럽게 끼워주었다. 반지가 끼워지는 순간, 도진의 신체 주변에 보이지 않는 은빛 신성 보호막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그의 약한 육체를 감쌌다.


동시에 도진의 품속에 있던 실버 컴파스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도진이 컴파스를 꺼내 들자, 은하를 가리키는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더니, 이내 찬란한 황금빛 애정 수치에 딱 멈춰 서서 고정되었다. 소울링크의 결속이 한층 더 깊어지고 단단해졌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대륙 최강의 성기사를 자신의 완벽한 아군이자 평생의 방패로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스스스스—


바로 그 순간,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이 지하실의 눅눅한 그림자 속에서 기이한 한기가 흘러나왔다.


아지트 구석의 어두운 철문 틈새로 검붉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늘진 문틈 너머로, 붉게 타오르는 마안을 번뜩이며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왕군 사천왕 아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칠흑의 불꽃이 질투와 독점욕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 고요함 속에서, 도진은 아샤가 자신을 향해 품기 시작한 광기 어린 소유욕의 집착을 피부로 느끼며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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