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와 마녀 사이
대도서관 2층 자료 정리실의 육중한 문이 닫히는 순간, 이도진은 가슴을 짓누르던 긴장을 천천히 토해냈다. 요나스는 완벽하게 축출되었다. 줄리안 부제 역시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날뛰던 사냥개를 제 손으로 처단해야 했으니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렸을 터였다.
하지만 도진은 승리의 아취에 취하지 않았다. 그의 목덜미를 조여오는 ‘소울링크 완화용 초커’의 미세한 침들이 차가운 경고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 자극으로 낙인은 완벽히 감추었으나, 무리하게 마력을 차단한 대가로 전신 경맥이 욱신거리는 미미한 통증이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줄리안의 의심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쥐새끼 한 마리를 치웠으니, 이제 대주교 세력은 자신들의 추악한 실험과 부정을 덮기 위해 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들 것이다.’
도진은 대도서관의 어두운 회랑을 빠져나와 성도 아발론의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의 컴파스가 가리키는 방향, 은밀한 지하실 ‘안식처’로 향하는 길은 고요했으나 성도의 대기에는 피 비린내 나는 폭풍의 전조가 감돌고 있었다.
대주교 말파스는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신의 이름조차 가장 완벽한 위선의 도구로 삼는 자였다. 그리고 그 위선의 가장 거대한 걸림돌이자, 말파스의 마물 소환 실험을 눈치채기 시작한 기사단장 서은하를 향해 곧 파멸의 덫이 격발될 것임을 도진은 직감하고 있었다.
‘은하의 부친인 서무현 가주가 갑자기 마기에 중독되어 침상에 누운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해. 가문의 권력을 노리는 숙부 서태건과 말파스 대주교 사이에 추악한 밀약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가문의 비호마저 차단된 지금, 은하는 고립무원의 처지다.’
도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이 억지로 묶어버린 생명의 사슬. 그 사슬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고결한 기사가 무너지면, 자신 역시 무사할 수 없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이 진흙탕 속에서 건져내야만 했다.
* * *
같은 시각, 백색 성기사단 총본부의 단장 집무실.
서릉, 서릉.
서은하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성검 천광(天光)을 비스듬히 세운 채, 창밖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백색 에테르 갑옷은 평소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나, 투구 아래 드러난 고운 얼굴은 납빛처럼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심장 고동 소리가 평소보다 무겁고 불규칙하게 울렸다. 목덜미에 새겨진 소울링크의 낙인은 초커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기에, 옷깃 사이로 미세한 붉은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검을 쥐어왔는가.’
은하는 평생을 신성 성당의 교리와 신념을 수호하는 방패로 살아왔다. 이단은 정화해야 하며, 마족은 멸절해야 할 대륙의 암 덩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신의 정의이자 기사의 명예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심장은 마왕군의 사천왕인 아샤, 그리고 보잘것없는 하급 서기 소년인 이도진과 하나로 얽혀 있었다. 그 소년이 손목을 그었을 때 전해졌던 지독한 극통과, 생명수 에센스를 마셨을 때 느껴졌던 기적적인 생명력의 온기가 아직도 그녀의 혈맥 속에 생생하게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더욱이, 그녀가 평생을 바쳐 충성해 온 대성당의 깊은 이면에서 흘러나오는 추악한 악취를 이제는 외면할 수 없었다. 부친 서무현이 마기에 오염되어 쓰러진 이후, 숙부 서태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고 자신을 성당의 가혹한 임무로 등 떠밀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항상 자애로운 미소를 짓던 말파스 대주교가 있었다.
“단장님.”
고요한 침묵을 깨고, 단단한 체구의 베테랑 부대장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은하의 신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젊은 견습 기사 레온이 잔뜩 긴장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펠릭스, 레온. 무슨 일이냐. 이 이른 새벽에 수선스럽군.”
은하가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펠릭스는 어깨에 걸친 기사단의 문장 망토를 꽉 쥐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성당 대회의실에서 급보가 내려왔습니다. 말파스 대주교가 직접 서명한 특별 성명이 온 성도에 공표되기 직전입니다. 단장님…… 단장님께서 마족의 사천왕과 결탁하여 성물 보관실을 습격하고, 신성 에센스를 탈취했다는 이단 혐의입니다.”
“……!”
은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막상 성당이 자신을 ‘이단’으로 공식 규정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영혼을 깊게 찔렀다.
“말도 안 되는 모함입니다!”
레온이 분통을 터뜨리며 검 자루를 꽉 쥐었다.
“단장님께서 평생을 이 성도를 위해 피를 흘리셨는데, 어찌 마족과 결탁했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운단 말입니까! 이는 분명 단장님의 자리를 노리는 강경파의 음모입니다!”
“조용히 해라, 레온.”
은하가 나직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레온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성검 천광의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말파스 대주교는 단순히 내 직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행해 온 비밀 실험의 흔적을 내가 눈치챘기에, 입을 막으려는 것이지. 그리고…….”
은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실제로 자신의 목덜미에는 마족의 사천왕 아샤와 연결된 붉은 사슬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강제된 계약일지라도, 성당의 교리 앞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역죄였다. 신념과 현실의 괴리가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쿠우우웅—!
그때, 백색 성기사단 총본부의 거대한 철문이 거칠게 개방되는 소리가 대리석 회랑을 타고 울려 퍼졌다. 갑옷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발걸음이 단장 집무실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펠릭스가 황급히 은하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쾅!
집무실의 문이 난폭하게 열리며, 탄탄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청년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은하의 단장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강경파의 유망주, 발터였다.
그의 등 뒤에는 이단 심문소 소속의 핏빛 코트를 입은 집행관들과, 말파스 대주교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를 든 기사들이 촘촘하게 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은하 단장.”
발터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밀랍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양피지 서류가 들려 있었다.
“대주교님의 친필 서명이 담긴 체포 영장이다. 너를 마족과의 내통, 그리고 성물 보관실 침입 및 도난 혐의로 즉시 구속한다.”
“발터! 감히 단장님께 무례하다!”
레온이 검을 완전히 뽑아 들며 소리쳤다.
“이단 심문소의 영장이라 할지라도 기사단장을 체포하려면 온건파 추기경회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교단 법률을 어길 셈이냐!”
“법률?”
발터가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교황령 제11조에 의거, 대륙의 안전을 위협하는 1급 이단 혐의자에 한해서는 대주교의 즉결 처형 및 체포 권한이 최우선으로 작동한다. 이미 대회의실에서 대주교님께서 그녀의 죄상을 공표하셨다. 여기 증거도 있지.”
발터가 양피지 서류와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마기가 서린 가죽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아샤의 군단 문양이 기괴하게 조작되어 새겨진, 조잡하지만 성당의 법정에서는 완벽한 효력을 발휘할 위조 문서였다.
“이 사악한 계약서에 서은하, 너의 신성 지문이 찍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더 이상 구차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은하는 그 위조 문서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말파스는 치밀했다. 부친 서무현이 가문의 철혈강기를 잃고 누워 있어 가문의 비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이 시점을 정확히 노려, 법적 사각지대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숙청하려 드는 것이다.
“서태건 숙부와 결탁한 것이냐, 발터.”
은하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발터는 움찔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기세를 높였다.
“가문의 실권자이신 서태건 대인께서도 이미 너의 이단 혐의를 인정하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너를 파문하겠다고 서명하셨다. 너는 이제 기사단장도, 서씨 무가의 영애도 아니다. 그저 추악한 마녀의 앞잡이일 뿐이지.”
“……마녀의 앞잡이라.”
은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을 위해 피를 흘렸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 추악한 배신과 음모란 말인가.
“동작 그만! 무장을 해제하라!”
발터가 소리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신성 결계 방패를 치켜들며 은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빛의 장벽이 집무실 내부를 가득 채우며, 은하가 뿜어내던 신성력의 흐름을 억제하려 들었다.
“단장님! 물러서십시오! 저희가 길을 열겠습니다!”
펠릭스와 레온이 은하의 좌우를 호위하며 기사단의 방어 진형을 취했다. 온건파 기사들과 강경파 기사들 사이에 팽팽한 대치 구도가 형성되었다. 일촉즉발의 살기가 집무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서은하, 끝까지 반역을 저지를 셈이냐!”
발터가 소리치며 마력 차단 방패 ‘스펠 브레이커’를 치켜들었다. 결계의 압박이 은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오직 차가운 분노와 신념의 파편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내 명예는…… 너희 같은 위선자들의 종이 쪼가리로 더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하가 성검 천광의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찬란한 황금빛 투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서씨 무가의 비전 검술이자, 오직 대륙 최강의 검사만이 펼칠 수 있는 ‘천무극검(天武極劍)’의 기세였다.
콰아아아앙—!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오직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압도적인 기세만으로도 집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발터의 신성 결계 장막에 쩍쩍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대리석 바닥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고, 포위망을 좁히던 강경파 기사들이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눌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 괴물 같은 년이……!”
발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5성 최상급 기사인 그조차도, 8성 검성급에 달하는 은하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단장님, 어서 탈출하십시오! 성도 내부에 요한 추기경님의 온건파 세력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하시면 안 됩니다!”
펠릭스가 은하의 귓가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은하는 찢어질 듯한 내적 갈등 속에서 눈을 감았다. 이 검을 휘둘러 아군을 베어야 하는가? 평생을 수호해 온 동료 기사들의 목을 쳐야 하는 비극의 예감이 그녀의 영혼을 옥죄었다.
하지만 가슴속 소울링크의 사슬이 미세하게 떨리며, 머나먼 아지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 영리하고 병약한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이 위선의 실체를 밝혀내야 해.’
은하가 성검 천광의 자루를 움켜쥐고, 평생 처음으로 신성한 제단을 등진 채 발터를 향해 검끝을 겨누었다.
“발터. 내 검을 거두고 싶다면, 너희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할 것이다.”
발터가 대주교의 친필 체포 영장을 높이 치켜들며 은하의 검을 압수하려 한 바로 그 순간, 은하의 눈동자는 평생 처음으로 신을 향한 깊은 불신과 절망으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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