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생명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지하 환기구를 흘러나가는 순간, 도서관 복도를 걷던 요나스 서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어두컴컴한 도서관 2층 회랑. 등불을 들고 야간 순찰을 돌던 요나스는 코를 킁킁거렸다. 매캐한 고서의 먼지 냄새 사이로 섞여 드는 비릿한 철분 향. 그것은 분명 방금 흘려진 신선한 피의 냄새였다.
“지하 수로 방향인가……?”
요나스의 비열한 눈동자가 번뜩였다. 최근 들어 밤마다 은밀하게 지하를 드나들던 이도진의 수상쩍은 행동이 머릿속을 스쳤다. 출세욕에 눈이 먼 요나스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천천히 수로 입구를 향해 등불을 비추며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아이고, 요나스 서기님! 이 야밤에 여기서 무얼 하시는 게요?”
어둠 속에서 메리 할멈이 낡은 빗자루와 걸레 양동이를 든 채 툭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요나스가 등불을 치켜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메리 할멈? 이 밤중에 지하 수로 입구 근처에서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라니요. 낮에 신도들이 수로 청소 구역에 쏟아놓은 오물을 치우고 있었지요. 늙은이가 손이 느려 이제야 정리가 끝났구먼요. 오물 썩은 비린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나 봅니다.”
메리 할멈은 태연하게 걸레를 양동이에 짜며 비릿한 냄새의 원인을 오물로 돌려버렸다. 요나스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할멈과 수로 입구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썩은 배수구 냄새와 뒤섞인 피 냄새에 더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혀를 찼다.
“쯧, 더러운 냄새군. 청소가 끝났으면 어서 꺼지라고.”
요나스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지하 안식처 창고 안에서 환기구 너머로 그 대화를 숨죽여 듣고 있던 이도진은 그제야 길게 가두었던 숨을 내쉬었다.
“하아…….”
손목을 그어댔던 왼쪽 팔에는 메리 할멈이 감아준 거친 삼베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자해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서로를 죽이려 안달이 나 있던 성기사단장 서은하와 마왕군 사천왕 아샤는 이제 안식처 탁자 양끝에 억지로 마주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도진이 다치면 자신들도 대미지의 25%를 고스란히 공유하며, 도진이 죽으면 즉사한다는 잔혹한 규칙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의 대가는 가혹했다.
쿵, 쿵, 쿵.
도진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쳤다. 소울링크가 격발된 이후, 성력과 마력이라는 상극의 에너지가 그의 약한 심장을 매개로 매 순간 충돌하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전 감행한 자해로 인해 생명력의 마모가 극에 달해 있었다. 가슴뼈 안쪽이 달궈진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뜨겁고 저려왔다.
‘이대로는 사흘도 버티지 못한다.’
도진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품속의 ‘붉은 사슬의 서’를 움켜쥐었다. 무력이 없는 최하급 서기인 자신이 이 가혹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무너져가는 육체부터 지탱해야 했다. 그의 머릿속에 도서관 금서 구역에서 해독했던 성당의 극비 기록이 떠올랐다.
성도 대성당 지하 깊은 성소에서만 극소량 정제되는 기적의 영약, ‘생명수 에센스’.
그것만이 소울링크의 마찰로 마모되는 도진의 생명력을 즉각 보충하고 터지기 직전인 심장을 붙잡아줄 유일한 산소호흡기였다. 하지만 그곳은 엄격한 신성 결계와 성기사들이 24시간 철통같이 감시하는 성당 최고 금역 중 하나였다. 평범한 서기의 신분으로는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도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미 낮에 성당 내부의 온건파 영수이자 자신의 영리함을 아끼던 요한 추기경과 은밀한 접촉을 마친 상태였다. 대주교 말파스의 폭정에 맞서 성당의 정화를 꿈꾸던 추기경 온건파는, 말파스의 부패 증거를 캐내 줄 영리한 도진을 은밀히 비호하고 있었다.
당시 요한 추기경은 도진에게 작은 양피지 봉투를 건네며 나직하게 경고했었다.
“이것은 우리 파벌의 성녀 후보가 대대로 물려받는 ‘성녀의 비밀 열쇠’라네. 보관소의 신성 결계를 일시적으로 속여 아무런 경보 없이 문을 열 수 있는 성물이지. 하지만 열쇠에 새겨진 마법 문양은 단 3회만 작동하네. 그 안에 자네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야 하네, 도진 군.”
도진은 품속에서 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정교한 열쇠를 꺼내 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마법 문양은 단 세 개. 이번 침투로 하나를 소모하면 남은 기회는 단 두 번뿐이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야간 순찰병들의 근무 교대 시간인 새벽 세 시.
도진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안식처의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탁자에 앉아 있던 서은하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 밤중에 어디를 가려는 거지, 이도진? 네 몸은 지금 한 걸음을 걷는 것조차 위태로운 상태다. 네가 쓰러지면 나와 저 마족 년의 목숨도 위험해진다는 걸 잊었나?”
“걱정 마라, 서은하 단장. 네 잘난 성당의 눈을 피해 내 목숨줄을 이어 붙이러 가는 기막힌 여정이니까.”
도진은 대답 대신 가볍게 실소를 흘리며 지하 수로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성도 대성당 지하의 성물 보관실 외곽.
도진은 대도서관의 기록을 바탕으로 완벽히 연산해 둔 경비 기사들의 순찰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성당 지하의 경비는 빛의 굴절 각도와 기사들의 야간 기도 시간에 맞춰 정확히 새벽 3시 12분부터 15분까지, 단 3분간의 공백이 발생한다.
스윽.
도진은 마력 차단용 가죽 예복의 깃을 세우고, 고양이처럼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차가운 대리석 벽면을 따라 이동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이 찢어질 듯 아파왔지만, 통각 차단 능력을 한계까지 발동해 뇌가 느끼는 고통을 억지로 마비시켰다. 이성을 잃는 순간이 바로 죽음이었다.
마침내 거대한 백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성물 보관소의 철문 앞에 도달했다. 문 전면에는 침입자의 생명력을 감지해 즉시 태워버리는 강력한 푸른빛의 신성 정화 결계가 장막처럼 흐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은신 주술이나 물리적인 도구로 진입하려 했다간 결계에 걸려 마력이 역류해 그 자리에서 즉사할 터였다.
도진은 심호흡을 하며 품속에서 ‘성녀의 비밀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결계의 중심부에 열쇠를 가져다 대었다.
지이이잉—!
순간 결계의 표면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붉은색 지문 인식 마법 회로가 작동했다. 성녀의 파동이 아닌 침입자의 마력을 감지하고 경보를 울리려는 찰나였다.
도진은 당황하지 않고 붉은 사슬의 서에서 배운 고대 조율어 해독 공식을 머릿속으로 연산했다. 그의 공명하는 심장이 미세하게 박동하며, 열쇠를 통해 흘러드는 신성력의 주파수를 교묘하게 비틀었다.
‘조율자의 공식 제1조. 상극의 흐름을 동화시킨다.’
화르륵.
성녀의 비밀 열쇠에 새겨진 세 개의 마법 문양 중 하나가 찬란하게 빛나다 이내 검게 타들어 가며 소실되었다. 동시에 보관실 문을 가로막고 있던 푸른 신성 장막이 거짓말처럼 소리 없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결계가 도진을 성당의 고위 성직자로 오인한 것이었다.
달칵.
철문이 열리고, 도진은 신속하게 안으로 몸을 던졌다.
보관실 내부는 대낮처럼 밝았다. 공기 중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순수한 신성 에테르의 향기가 가득했다. 사방의 유리 진열장 안에는 성당의 온갖 고귀한 성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도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가장 안쪽, 황금 분수대 모형의 안착대 위에 놓인 조그만 은빛 유리병.
그 안에서 영롱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소용돌이치는 액체, 그것이 바로 ‘생명수 에센스’였다.
도진은 서둘러 안착대로 다가가 은빛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병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손끝의 상처가 아물 것 같은 강력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병의 마개를 뽑고, 영롱한 푸른 액체를 자신의 입안으로 들이켰.
꿀컥.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
매일 밤 그의 심장을 불태우고 옥죄던 극심한 흉통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다. 뒤틀려 터지기 일보 직전이던 전신 경맥의 마찰열이 차가운 얼음물을 맞은 듯 급격히 진정되었고, 왼쪽 손목에 감겨 있던 붕대 틈새로 새어 나오던 피가 멎으며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지고, 백발로 변해가던 머리칼 끝에 다시 검은 윤기가 돌았다.
생명수 에센스의 가공할 치유력이 소울링크로 마모되었던 그의 수명과 생명력을 순식간에 복구해 낸 것이었다. 도진은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살았다. 이제 최소한 몇 주 동안은 소울링크의 반동으로 기절하거나 죽을 염려는 없었다.
도진은 침입 흔적을 지우기 위해 빈 유리병을 원래 놓여 있던 안착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은밀 침투였다. 요한 추기경의 도움과 자신의 지략이 빚어낸 무혈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가 몸을 돌려 퇴로로 향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틱.
고요한 보관실 내부를 찢는 미세한 금속성 기계음이 바닥에서 울렸다.
도진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았다. 대리석 바닥 타일의 미세한 틈새, 그가 빈 병을 내려놓으며 밟았던 안착대 바로 아래의 음각 회로에서 붉은색 마법 불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성당의 결계가 아니었다. 이단 심문소의 부대장, 냉혹한 사냥개 율리우스가 침입자를 영구적으로 추적하기 위해 바닥에 은밀히 심어둔 극비의 덫.
‘이단 심문관의 추적 인장’이었다.
삐————!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마법 경보음이 보관실 사방의 백색 대리석 벽면을 타고 광기 어린 비명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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