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도서관의 이방인
성도 아발론의 심장부에 위치한 성도 대도서관은 거대한 백색 대리석 요새와도 같았다. 수천 년 동안 쌓인 지식의 무게를 증명하듯, 높이 솟은 천장 아래로 사방을 가득 메운 서가들이 끝없는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오래된 양피지 냄새와 바스러진 먼지, 그리고 성당의 고위 신관들이 걸어둔 차가운 신성 결계의 마력 파동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사각, 사각.
도서관 구석, 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어두운 책상 앞에는 열여덟 살의 하급 서기, 이도진이 앉아 있었다. 그의 창백한 안색은 빛바랜 서기복과 기묘하게 어우러져 병약한 인상을 풍겼다. 도진은 가볍게 기침을 토해내며 잉크 묻은 깃펜을 고쳐 잡았다.
신성력도, 마력도 없는 평범한 인간. 그것이 성당이 규정한 이도진의 가치였다. 성당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서기란 그저 신의 위업을 기록하고 복사하는 살아있는 기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도진의 눈앞에 펼쳐진 두꺼운 마도서, ‘붉은 사슬의 서’.
이것은 일반적인 서기들이라면 펼치기는커녕 표지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오염되어 광증에 빠질 금서였다. 책장 곳곳에 음각된 붉은 룬 문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사슬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읽는 이의 이성을 갉아먹는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도진은 아무런 정신적 타격도 받지 않은 채, 그 기이한 문장들을 물 흐르듯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영혼의 결속은 천도를 거스르는 저주이자, 동시에 모든 존재를 하나로 묶는 구원의 사슬이다.’라.”
도진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신기하게도 이 복잡하고 난해한 고대 제국의 문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는 마치 모국어처럼 직관적으로 이해되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자신이 직접 이 문장들을 썼던 것 같은 기묘한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도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미세한 고동 소리가 울렸다. 평범한 인간의 것보다 훨씬 깊고 맑은, 상극의 힘을 조화시키는 ‘공명하는 심장’의 파동이었다.
“도진아, 또 밤을 새운 게냐?”
고요한 어둠을 깨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진은 황급히 붉은 사슬의 서 위에 다른 역사책을 덮어 가렸다. 돋보기를 목에 걸고 낡은 사제복을 입은 노사제, 조슈아 사제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조슈아는 도서관의 서적 관리를 책임지는 온건파 사제로, 고아원 시절부터 명석했던 도진을 아끼고 보호해 준 유일한 직장 상사였다.
“조슈아 사제님. 조금만 더 정리해 두고 쉬려 했습니다.”
“네 영리함은 나도 잘 안다만, 육체가 버티지 못하면 지식도 무용지물인 법이다. 네 안색이 평소보다 더 창백하구나. 어서 방으로 들어가 쉬거라. 상부의 까다로운 감시관들이 오기 전에 내가 대충 마무리해 두마.”
조슈아는 도진의 어깨를 따뜻하게 다독였다. 도진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성당 내부의 권력 암투 속에서도 자신을 순수하게 아껴주는 몇 안 되는 귀인이었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조슈아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도진은 다시 붉은 사슬의 서를 응시했다. 이 책을 완전히 해독한다면, 자신이 왜 이 세계에 태어났는지, 그리고 심장 속에서 맴도는 이 기이한 공명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쿠구구궁—!
갑작스럽게 도서관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대리석 바닥이 비명을 지르듯 갈라지고,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유리 샹들리에들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사방에서 고서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무슨 일이지?!”
도진은 책상을 짚으며 중심을 잡았다. 도서관 외곽을 감싸고 있던 고위 신성 결계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며 뿜어내는 마력 파동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외부의 침공이 아니었다. 이 결계를 안쪽에서부터 힘으로 깨부수고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성도 아발론 내부에서도 단 한 세력뿐이었다.
쿵, 쿵, 쿵.
무겁고 정제된 철갑옷의 군화 소리가 도서관 입구 대로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하얀색 에테르 갑옷을 입고 찬란한 빛의 검을 든 기사들—백색 성기사단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들의 선두에는, 대륙 최강의 여인 중 한 명이자 성기사단장인 서은하가 서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부신 황금빛 신성 투기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휘날렸다. 서은하의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한 치의 타협도 없는 엄격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성검 ‘천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빛은 어두운 도서관 내부를 대낮처럼 밝히며 침입자들을 압박했다.
“이단과 마족의 흔적이 이 도서관 지하로 흘러들었다.”
서은하의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도서관 전체에 공명했다.
“서기들은 모두 제자리에 엎드려라. 단 한 명도 이 성스러운 전당을 빠져나갈 수 없다. 저항하는 자는 이단의 동조자로 간주해 즉결 처형하겠다.”
도진은 책상 아래로 몸을 숨기며 상황을 분석했다.
‘이단 심문관들이 움직인 게 아니라 성기사단장이 직접 나섰다고? 게다가 도서관 결계까지 깨부수며 들어왔어. 이건 단순한 수색이 아니다. 내부의 정적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거나, 진짜로 감당할 수 없는 마족의 흔적을 발견한 거다.’
서기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조슈아 사제가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부당함을 주장하려 했으나, 부단장 발터의 직속 기사들이 그를 거칠게 밀쳐냈다.
도진은 침착하게 퇴로를 연산했다. 일반적인 비상구 방향을 슬쩍 바라보았으나, 이미 발터의 기사들이 촘촘하게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나가는 순간 ‘검문’이라는 명목 하에 이단 심문소로 끌려가 영혼까지 탈탈 털릴 것이 분명했다. 품속에 숨긴 ‘붉은 사슬의 서’를 들키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화형이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각지대는…….’
도진은 도서관 도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수만 권의 고서를 복사하며 머릿속에 집어넣은 도서관의 구조가 빛을 발했다. 도서관 최하층에는 수천 년 전 고대 제국 시절에 쓰이던 폐기된 지하 배수로 환기구가 존재했다. 성당의 현대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오직 고서 속 기호로만 남아 있던 사각지대였다.
웅—!
성당의 마력 탐지 결계가 도서관 상층부에서부터 아래로 쓸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황금빛 격자무늬 장막이 지나는 곳마다 생명체의 미세한 마력 파동이 실시간으로 발각되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3분 안에 발각된다.
도진은 결단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는 품속에서 붉은 사슬의 서를 꺼내 빠르게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침입자의 존재를 숨겨주는 고대 조율어의 기초 은폐 기호가 적혀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도진은 깃펜 끝에 잉크를 듬뿍 묻혀 자신의 왼쪽 손목 위에 기호를 빠르게 그려 넣었다. 살갉 위에 검은 잉크가 닿는 순간, 기호가 붉은빛을 발하며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화끈거리는 열감과 함께 그의 약한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력도 없는 몸으로 고대 주술을 억지로 발동시킨 대가였다. 도진은 신음을 삼키며 손목을 옷소매로 가렸다.
스우우우—.
황금빛 탐지 장막이 도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탐지 결계는 도진을 그저 한 무더기의 오래된 종이 더미로 인식하고 그대로 통과했다. 결계의 주파수를 교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쪽이다! 지하로 통하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위층에서 기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서은하의 강력한 투기가 도서관 하층부를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도진은 어둠을 틈타 몸을 낮추고 바닥을 기어 지하 배수로 환기구가 있는 구석 석실로 향했다. 무릎을 꿇고 낡은 철제 격자판을 들어 올렸다. 아래는 칠흑 같은 어둠과 축축한 한기가 도사리는 고대 수로였다.
도진은 망설임 없이 격자판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앗……!”
착지하는 순간, 젖은 이끼에 발이 미끄러지며 발목이 꺾였다. 우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극심한 통증이 뇌리를 찔렀다. 선천적으로 약한 신체가 비명을 질렀다. 쿨럭, 하고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도진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 경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었지만,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통각 차단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어두운 수로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사방에서 시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기묘한 환각과 오한이 느껴졌다. 도서관의 지도조차 닿지 않는 영원한 금역, ‘심연 구역’의 초입이었다.
탁, 탁, 탁.
그때, 그가 내려온 환기구 위쪽에서 규칙적이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서은하였다. 그녀가 성검 천광을 들고 수로 계단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성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황금빛이 어두운 지하 수로의 벽면을 한 겹씩 벗겨내듯 밀고 들어왔다.
빛이 다가올수록 도진의 숨통이 조여왔다. 상극의 신성력이 그의 약한 심장을 물리적으로 압박했다. 도진은 절뚝거리며 막다른 석실 벽면까지 밀려났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도진의 피 묻은 오른손이 석실 중앙의 회색 벽면을 짚었다.
파지직—!
그의 피가 닿는 순간, 거대한 마력 반응과 함께 벽면에 음각되어 있던 고대 룬 문자들이 붉고 황금빛 어린 사슬 모양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천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석벽이 쩍쩍 갈라지며, 그 너머에 잠들어 있던 고대 조율자의 제단이 웅장한 기세를 뿜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