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된 함정
한스의 경고에 태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한쪽 눈 고글 너머로 서늘한 이성의 푸른 안광이 다시 한번 번쩍였다.
“저 쥐새끼가 가져간 건 그냥 종이쪽지가 아니야. 수용소 급수 통제과의 숨통을 끊어놓을 정밀한 자폭 장치지.”
태오는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찢어지는 듯한 채찍 상처의 통증을 억누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상처에서 배어 나온 붉은 피가 남루한 양가죽 누더기를 적셨지만, 그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징했다. 오른쪽 눈에 장착된 지반 투시 마력 안경의 프레임 균열이 지르르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으나, 태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형, 정말 저 도면대로 파면 무너지는 거야?”
한스가 침을 꿀컥 삼키며 물었다. 태오는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공동의 화강암 벽에 등을 기대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 250미터 지층에는 고압의 황산염 오염수 포켓이 갇혀 있어. 내가 준 도면은 그 포켓을 직격하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유체의 급격한 흐름을 제어할 압력 방출 밸브(Pressure Relief Valve)의 설계를 완전히 누락시켰지. 배관 끝단에 차단 밸브가 닫히는 순간 발생하는 압력 충격파—즉 수격 현상(Water Hammering)이 시추기 본체로 고스란히 역류하게 설계했어. 밸브 제어 장치가 없는 가짜 도면은 결국 수백 기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폭하게 된다.”
태오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수자원공학자로서의 차가운 인과율이 담겨 있었다.
* * *
그 시각, 게헤나 수용소 중앙 급수탑의 소장 집무실.
“소장님! 소장님! 찾아냈습니다!”
배신자 노예 잭이 숨을 헐떡이며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그의 품 안에는 제이드의 작업대에서 훔쳐낸,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양필지 도면이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집무실 안쪽에서 식수 배급 코인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수용소장 바르토와 감시조장 루퍼스가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엇을 말이냐,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바르토가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제이드 놈이 숨겨둔 진짜 지하 대수층 설계도입니다! 이 도면대로만 파면 사흘 안에 엄청난 지하수가 수용소 동쪽 구역에서 터져 나온다고 했습니다! 제이드 놈이 대원들과 크게 모의하는 것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잭이 의기양양하게 도면을 바치자, 루퍼스가 황급히 그것을 가로채 바르토의 책상 위에 펼쳤다. 도면에는 기하학적인 원형 기호들과 수치들, 그리고 동쪽 구역의 특정 좌표가 정밀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이건……!”
루퍼스의 눈에 탐욕스러운 안광이 서렸다. 만약 이 도면을 이용해 자신들이 먼저 지하수를 독점 개발한다면, 수용소 내부의 식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 중앙으로의 초고속 승진도 따놓은 당상이었다.
“소장님, 제이드 일행은 지금 서쪽 폐광 구역으로 도망쳐 헛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동쪽 구역을 시추해 지하수를 선점해야 합니다!”
바르토 소장 역시 책상을 탁 치며 일어났다. 그의 뚱뚱한 얼굴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좋다! 급수 통제과의 모든 가용 인력과 마법 압력 제어석을 동쪽 구역으로 이동시켜라. 제이드 놈이 만든 기적을 우리가 가로챈다!”
그들은 잭의 도면에 숨겨진 치명적인 물리적 함정을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탐욕의 구렁텅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 * *
몇 시간 뒤, 소금 광산 동쪽 구역 굴착지.
수용소 급수 통제과의 대형 증기 시추기가 요란한 굉음과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땅속 깊숙이 쇠파이프를 박아 넣고 있었다. 루퍼스는 시추기 바로 옆에서 아날로그 수압 측정기의 눈금을 감시하며 연신 채찍을 휘둘렀.
“더 빨리 파라! 압력이 올라오고 있다! 거의 다 왔다!”
지하 공동 폐광 구역의 비밀 아지트에 앉아 있던 태오는 미세하게 전해오는 지반의 진동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었다. 지반 투시 안경의 균열이 지르르 울리며 경고음을 냈지만, 태오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으로 역산 연산을 시작했다.
‘진동의 주파수로 보아…… 녀석들의 시추기가 깊이 240미터에 도달했다. 오염수 포켓 돌파까지 앞으로 10미터.’
태오는 아지트 구석에서 대기 중인 단테와 강철 삽날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단테, 밧줄을 쥐어라. 녀석들의 자폭 소음이 수용소 전체를 뒤흔드는 순간, 우리는 진짜 수맥을 향해 맹렬하게 시추를 개시한다.”
“알겠습니다, 대장!”
단테가 굵은 밧줄을 움켜잡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라울과 그레그 역시 숨을 죽인 채 대지의 맥동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콰르르르릉—!
동쪽 구역에서 지각이 뒤틀리는 듯한 둔탁한 폭음이 지하 공동을 타고 넘어왔다.
* * *
동쪽 굴착지 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시추기가 지하 250미터의 고압 황산염 오염수 포켓을 관통하는 순간, 설계 결함으로 압력 방출 밸브가 없던 배관 내부에서 수격 현상이 발생했다. 밸브가 급격히 잠기며 역류한 충격파는 배관의 인장 강도를 아득히 초과했다.
콰아아앙—!
수백 기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철제 시추기가 폭발하듯 찢어발겨졌다. 파이프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그 틈새로 노랗고 걸쭉한 황산염 오염수가 거대한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끄아아악! 내 눈! 내 눈이!”
시추기 바로 옆에 서 있던 루퍼스가 뿜어져 나온 강산성의 노란 오염수를 정면으로 뒤집어썼다. 그의 가죽 옷이 쉭쉭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고, 두 눈에 치명적인 유황 화상을 입은 루퍼스는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과 급수 통제과 인부들 역시 산성 오염수에 휩쓸려 살점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쓰러졌다.
바르토 소장은 저 멀리 뒤쪽으로 나가떨어져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마법 제어석은 어떻게 된 거냐!”
경비대원들이 가동하려던 마법 압력 제어석은 누적된 압력 주파수를 견디지 못하고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동쪽 구역의 토양은 뿜어져 나온 유황수로 인해 누렇게 오염되며 영구히 산성화되기 시작했다.
* * *
“지금이다! 단테, 내리쳐라!”
동쪽의 폭발음이 서쪽 폐광 구역까지 울려 퍼진 순간, 태오가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맹렬하게 소리쳤.
“흐아압—!”
단테가 초인적인 완력으로 밧줄을 당겼다 놓았다. 청동 도르래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회전했고, 150킬로그램의 흑철 해머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서쪽 지반을 내리쳤.
쿵—!
소음 방지용 점토 흡음벽이 단테의 굴착 소음을 완벽히 차단하는 가운데, 진짜 시추공이 화강암반을 빠른 속도로 뚫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20미터, 50미터, 100미터…….
태오는 안경의 균열이 더 벌어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미세 수기 감지 능력을 가동해 시추 각도를 북동쪽 18도로 유지하도록 지시했다. 적들이 동쪽의 수압 폭발 수습으로 정신이 없는 이 틈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다.
“더 빠르게! 단테, 리듬을 타라!”
쿵—! 쿵—! 쿵—!
해머가 바위를 부수는 둔탁한 진동이 태오의 발끝을 타고 전해졌다. 대수층 도달까지 앞으로 50미터.
그러나 승리의 예감이 아지트를 채우려던 바로 그 순간.
치이이익—!
불길한 고압의 증기 소리와 함께, 시추 파이프 끝단에서 시큼하고 매캐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이프 틈새로 걸쭉하고 노란 '황산염 오염수'가 울컥거리며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
태오의 한쪽 눈 고글 너머로 경악의 빛이 서렸다. 서쪽 구역의 암반 틈새로 동쪽의 황산 오염수 레이어가 미세 균열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란 독성 물줄기가 진짜 시추 파이프의 철제 결합부를 빠르게 부식시키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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