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수탑의 폭사, 대혼란
크로이츠의 검날이 태오의 목덜미를 향해 무섭게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사방을 메운 적색 모래바람 속에서, 은빛으로 번뜩이는 검날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선고처럼 보였다. 태오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왼쪽 어깨의 채찍 상처는 이미 터져 붉은 피가 가죽 누더기를 적시고 있었고, 마력 접지의 역류로 마비된 오른팔은 싸늘한 고기덩어리처럼 무력하게 늘어져 있었다. 신체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속도를 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챙—!
그 순간, 귀를 찢는 쇠붙이의 마찰음이 협곡의 정막을 깨부쐈다. 사샤였다. 그녀는 바람처럼 몸을 날려 검은 철갑옷의 심문관이 내리친 장검을 단검 두 자루로 비스듬히 받아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크로이츠의 차가운 안광을 비추었다.
“어서 가, 제이드! 여기는 우리가 막는다!”
사샤가 이빨을 악물며 소리쳤다.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 해도 교단 최고의 사냥개인 크로이츠의 묵직한 신성 투기를 정면으로 버텨내는 것은 몇 분이 한계일 터였다.
태오는 망설이지 않았다. 공학자에게 무모한 의리는 자살일 뿐이었다. 그는 마비된 오른팔을 움켜쥐고, 몸을 뒤로 굴려 협곡 바닥의 깊은 균열 틈새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스스스슥—!
모래가 흘러내리는 비탈길을 타고 굴러떨어진 곳은, 한낮의 열기가 닿지 않는 어둡고 축축한 지하 배수로였다. 과거 수용소의 지질을 스캔할 때 확인해 두었던, 게헤나 광산 지하 수로망의 가장자리 배출구였다.
“윽……!”
바닥에 처박히며 왼쪽 어깨의 상처가 찢어지는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태오는 흙먼지를 뱉어내며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지반 투시 안경의 우측 렌즈가 지르르 소리를 내며 붉은 경고음을 울려댔다. 균열율은 이미 42%를 넘어 시야의 절반이 노란 노이즈로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의 지질 데이터는 선명했다. 이 어두운 배수로를 따라 역방향으로 기어가면, 수용소 중앙 급수탑의 하부 수밀 격벽으로 연결된다.
어둠 속을 얼마나 기었을까. 저 멀리서 희미한 횃불 빛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이쪽입니다!”
반란군 대장 지몬이었다. 구리빛 피부에 굵은 힘줄이 돋아난 거구의 사내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태오를 부축했다. 그의 뒤에는 몽둥이와 녹슨 곡괭이를 든 제3노역동의 정예 노예들이 숨을 죽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지몬…… 준비는 되었습니까?”
태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예, 대장의 지시대로 크로이츠의 성기사단이 사구 지대로 유인된 사이, 수용소 내부의 경비병들은 대부분 그쪽으로 지원을 나갔습니다. 지금 급수탑 내부의 수비는 평소의 3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수용소 중앙 급수탑을 파괴해 무기고를 마비시키고 수용소 전체를 대혼란으로 몰아넣어야만, 대기 중인 120명의 노예 대열이 국경으로 탈출할 퇴로가 열립니다.”
태오는 지몬의 부축을 받으며 급수탑 하부의 수밀 격벽을 통과했다. 머리 위로 거대한 물 흐르는 소리가 육중한 석조 벽을 타고 웅장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 * *
게헤나 수용소 중앙 급수탑 3층, 메인 수문 제어실.
사방이 거대한 청동 기어들과 직경 1미터가 넘는 무쇠 배관들로 가득 찬 이곳은 수용소 전체의 식수를 통제하는 심장부였다. 천장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압력 게이지의 지침이 가쁘게 흔들리며 관로 내부의 내압을 실시간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철컥, 쾅!
지몬과 노예들이 제어실의 철문을 부수고 침입했다. 보초를 서던 몇 안 되는 경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지몬이 거대한 무쇠 곡괭이를 휘두르며 제어실 내부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대장, 제어판을 확보했습니다! 이제 이 밸브들을 다 부수면 됩니까?”
“안 됩니다!”
태오가 다급히 지몬의 손을 가로막았다.
“단순히 밸브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이 두꺼운 석조 타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물의 압력을 무기화해야 합니다. 수격 현상(Water Hammering)을 강제 유발시켜 배관 자체를 안에서부터 폭발시켜야 합니다.”
태오는 왼손으로 허리춤에서 ‘아날로그 수압 측정기’를 꺼내 메인 양수관의 토출구 밸브에 장착했다. 황동 지침이 18기압을 가리키며 팽팽하게 진동했다. 현재 수용소 상층부 barracks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대형 증기 펌프가 풀 가동 중인 상태였다. 배관 내부를 흐르는 유체의 질량과 속도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지금 흐르는 물의 양(Q)과 유속(V)은 엄청납니다. 이 상태에서 흐름을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태오의 한쪽 눈 고글 너머로 서늘한 이성의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유체의 운동 에너지가 갈 곳을 잃고 순간적인 초고압의 충격파로 변환됩니다. 그 파괴력은 강철 파이프를 종이처럼 찢어발기기에 충분하죠.”
태오가 메인 양수관의 청동 차단 레버를 잡으려는 순간, 제어실 뒤편의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묵직한 가죽 채찍 소리가 허공을 갈랐.
파아앙—!
“이 더러운 노예 쥐새끼들이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거냐!”
게헤나 수용소 부소장, 킬리언이었다. 날카로운 턱선에 가죽 갑옷을 입은 그는 정예 경비병들을 이끌고 제어실 내부로 들이닥쳤다. 그의 손에 쥔 마력 채찍이 청색 불꽃을 뿜으며 요동쳤다.
“킬리언 부소장……!”
지몬이 이빨을 갈며 앞장서 섰다. 노예들이 곡괭이와 몽둥이를 치켜들고 경비병들의 철제 방패 대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앙! 챙! 서걱!
“크아악!”
정면 백병전이 시작되자마자 비명이 제어실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기세를 올린 노예들이라 해도, 제식 무장과 투기 훈련을 받은 경비병들의 방패 대열을 뚫는 것은 무리였다. 킬리언의 마력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노예들의 살점이 튀고 쓰러졌다. 지몬이 몸을 날려 킬리언의 장검을 막아섰으나,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으며 뒤로 밀려났다. 붉은 피가 그의 구리빛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대장!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장치를 가동하십시오!”
지몬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 그는 부상당한 어깨를 움켜쥔 채, 다시 한번 경비병들의 방패를 몸으로 막아서며 결사적인 지연전을 펼쳤.
태오는 안경의 3D 격자망을 가동했다. 렌즈의 균열을 통해 경고음이 귓전을 때렸지만, 배관 내부의 압력 수치와 물의 흐름이 실시간 렌더링 화면에 투사되었다.
[현재 메인 관로 내압 22기압. 유속 4.5m/s. 수격 유발 임계치 도달.]
“지몬, 대원들을 이끌고 당장 바닥에 엎드리십시오!”
태오가 소리치며, 왼손으로 메인 양수관의 청동 차단 레버를 급격히 아래로 젖혔.
철컥—!
배관을 흐르던 거대한 수류가 단 0.1초 만에 완벽히 차단되었다.
그 순간, 제어실 내부의 공기가 기이하게 얼어붙는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1초 뒤.
구구구구구구구구—!
대지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괴수가 울부짖는 듯한 웅장한 지동(地動)이 급수탑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흐름을 멈춘 수만 톤의 물줄기가 가진 운동 에너지가 순간적인 압력 상승으로 변환되며 배관 내벽을 사정없이 때려댔다.
깡! 깡! 깡!
무쇠 파이프들이 마치 거대한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한 기괴한 금속 파쇄음을 내며 요동쳤다. 이음새마다 채워져 있던 가죽 패킹들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가며 고압의 수증기가 뿜어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멈춰라, 이단자 놈!”
킬리언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그는 지몬을 걷어차고 장검을 치켜든 채 태오를 향해 돌진해왔다. 그의 칼날이 태오의 미간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일촉즉발의 순간.
태오는 차분하게 아날로그 측정기의 지침을 응시했다. 바늘이 붉은색 파열 한계선인 45기압을 돌파하는 순간.
“공학의 힘을 똑똑히 보십시오.”
태오가 마지막 비상 우회 밸브를 급격히 차단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제어실 전체를 날려버릴 듯한 대폭발이 일어났다.
화약의 폭발이 아니었다. 인장 강도를 초과한 고압의 배관이 물리적으로 찢어발겨지며 일어난 수압의 대폭발이었다. 직경 1미터의 무쇠 배관이 두 동강 나며, 그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기압의 물줄기가 포탄처럼 사방으로 분사되었다.
“크아아아악!”
돌진하던 킬리언과 그의 정예 경비병들은 고압 수류의 무시무시한 충격량(Impulse)에 직격당해 석조 벽면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철제 방패는 수압의 전단력 앞에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급수탑의 두꺼운 석조 외벽은 안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물줄기의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거대한 균열을 그리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콰콰콰—!
급수탑의 벽면을 뚫고 나온 엄청난 양의 지하수가 수용소 지상을 향해 거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무기고와 지하 감옥, 경비대 제어실이 순식간에 차가운 물줄기 속에 잠기며 마비되었다. 경비병들의 비명 소리와 마수들의 울부짖음이 대혼란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태오는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지몬을 부축해 일으켰다.
급수탑이 굉음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키며 수용소 전체가 물바다가 되고 무기고가 마비되자, 지몬은 무너지는 석조 잔해를 딛고 서서 어둠 속에 숨어 대기하던 120명의 노예 대열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달려라! 지금이다! 국경을 향해 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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