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사기극을 깨부수다
퍼어어엉—!
고압으로 압축되어 있던 대지의 기압이 단 한 번의 해방으로 폭출하며, 협곡 전체를 집어삼킬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화약은 없었다. 하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과 기압 차가 만들어낸 물리적 파괴력은 그 어떤 화염보다도 잔인했다. 도마뱀 가죽 수조에 15기압 이상으로 꾹꾹 눌려 담겨 있던 공기가 황동 밸브의 개방과 동시에 대기 중으로 무섭게 팽창했다. 그 폭발적인 팽창 에너지는 수조 위에 덮여 있던 고운 모래와 날카로운 규사 조각들을 초속 수백 미터의 속도로 쏘아 올렸다.
“크아아악! 내 눈! 눈이—!”
“말들이 광분한다! 대열을 이탈해!”
협곡 진입로를 가득 메웠던 도적들의 기마 대열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화약의 폭음 대신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공기의 파열음이 협곡을 흔들었고, 사방으로 비산한 모래 산탄은 도적들과 말들의 안면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실명한 말들이 고통에 겨워 날뛰며 서로를 들이받았고, 카심이 이끄는 정예 선봉대는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채 모래 장막 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신의 노여움이란 말이냐!”
도적 두목 카심이 모래 폭풍 속에서 비틀거리며 장검을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그의 눈가에서도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바위 위에서 균형을 잃고 낙하하던 사샤가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녀의 검붉은 사막 로브가 허공에서 우아한 궤적을 그렸고, 손에 쥔 사막 단검이 카심의 무방비한 목덜미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서걱!
“커흑……!”
카심의 거구가 단검의 충격과 함께 모래바닥 위로 무겁게 고꾸라졌다. 그의 손에서 장검이 힘없이 떨어져 모래 속에 박혔다. 두목이 쓰러지자 살아남은 도적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협곡 너머로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태오는 바위 그늘 뒤에서 레버를 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왼쪽 어깨의 채찍 상처가 완전히 벌어져 붉은 피가 양가죽 옷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오른쪽 안구에는 유리 조각으로 후벼 파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안경의 우측 렌즈 가장자리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이 지르르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태오는 비틀거리며 카심의 시체로 다가갔다. 그리고 굳어가는 그의 품속을 거칠게 수색했다. 손끝에 닿은 것은 묵직한 가죽 주머니였다.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서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두꺼운 장부와 청동으로 주조된 낯익은 문양이 흘러나왔.
“이건…… 사막 교단 비의 사도회의 문장?”
사샤가 피 묻은 단검을 거두며 태오의 곁으로 다가와 눈을 가늘게 떴다.
태오가 밀랍 봉인을 뜯고 장부를 넘기자, 그 안에는 바르토 수용소장의 친필 서명과 함께 비의 사도 베르기우스의 이름이 선명히 적힌 거래 내역이 적혀 있었다. 교단이 카심 도적단에게 거액의 골드를 지불하며 아샤족 야영지의 우물과 양수 설비를 파괴하라고 청탁한 구체적인 물증이었다.
“단순한 약탈이 아니었군.”
태오가 장부를 덮으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교단은 우리가 지하수를 파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물이 신의 은혜가 아니라 공학적 계산으로 얻을 수 있는 자원이라는 진실이 밝혀지면, 자신들의 종교적 지배 구조가 단숨에 무너질 테니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대족장 타릭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더러운 교단 놈들……! 우리 부족을 가뭄으로 말려 죽이면서 뒤로는 도적 놈들을 사주해 우리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으려 했다니!”
“대족장님,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태오가 태양광을 받아 에메랄드빛으로 맥동하는 양수 펌프를 가리켰.
“교단이 유지하는 저 인공 가뭄의 근원을 제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아무리 우물을 파내도 대수층은 결국 고갈될 겁니다. 대기 중의 수분을 강제로 증발시켜 사막화를 조장하는 진짜 심장부를 쳐야 합니다.”
태오는 손가락을 들어 사막 중앙에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산을 가리켰다. 그 꼭대기에는 하늘을 향해 붉은 마력의 아지랑이를 뿜어내고 있는 ‘비의 신 교단 변경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제단 지하에 흐르는 기상 조작 장치의 마력 루프를 끊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 사막에서 영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타릭은 태오의 안경 너머 푸른 안광을 응시했다. 기도가 아닌 계산을 믿는 이 외지인 노예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좋다, 물 인도자여. 사샤와 부족의 정예 전사들을 네게 붙여주마. 저 가짜 신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대지의 숨통을 열어라.”
* * *
사막의 밤은 차가웠지만, 중앙 바위산으로 향하는 길목은 기이할 정도로 건조하고 뜨거운 열풍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태오는 사샤와 아샤족 전사들과 함께 바위산의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랐다. 어깨의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신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태오는 이빨을 악물며 버텼다. 조수 한스는 태오의 뒤를 따르며 구리 와이어 타래와 젖은 점토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마침내 도달한 바위산 정상.
하얀 대리석으로 건설된 거대한 제단이 밤하늘 아래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단 중앙에는 거대한 청동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직경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염 마석(火炎 魔石)이 붉은 불꽃을 내뿜으며 맥동하고 있었다.
“저것이 대기 중의 수분을 증발시키는 마법진의 핵이군.”
태오가 지반 투시 마력 안경을 켜고 제단 전체의 에너지 흐름을 관측했다. 그의 시야에 붉은색과 청색의 열역학적 흐름이 실시간 3D 그래픽처럼 매핑되기 시작했다.
[분석 완료: 대기 건조 마법진의 열역학적 효율 84%. 주변 대기 중 수분 포획 및 증발량 초당 450리터. 시스템 과열 방지용 지하 냉각수 유입량 초당 80리터.]
“미신이 아니야. 이건 철저한 열역학적 열펌프(Heat Pump) 시스템이다.”
태오가 경탄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교단이 신도들 앞에서 보여주던 ‘비의 기적’과 ‘가뭄의 징벌’은, 사실 고대 제국의 지하 수로망과 마석의 열 에너지를 오용한 거대한 기술적 사기극에 불과했던 것이다. 마석이 방출하는 초고열로 구름을 인위적으로 흩뜨리고, 그 수분을 자신들의 사설 저수조로 모으는 파이프라인이 제단 지하에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다.
제단 중앙에서는 교단의 기상 마법사 에밀(Emil)이 푸른색 마법 로브를 걸친 채 적동석 지팡이를 쥐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의 마력이 화염 마석과 공명할 때마다, 제단 상공의 붉은 건조 장막이 더욱 팽팽하게 긴장하며 열풍을 뿜어냈다.
“사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합니다. 제단 주변에 전개된 신성 결계는 물리적인 타격이나 일반적인 화살로는 뚫을 수 없습니다.”
태오가 속삭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 괴물 같은 장치를 멈춘단 말인가?”
사샤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 장치라도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저 엄청난 열기를 방출하기 위해서는 장치 하부에 끊임없이 차가운 냉각수가 순환해야 합니다. 냉각 계통을 차단해 장치 스스로 열폭주를 일으키게 만들 겁니다.”
태오는 한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은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제단 측면의 지하 배수로 환기구를 통해 제어탑 하부 공동으로 은밀히 잠입했다.
지하 공동 내부에는 제단 지상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청동 배관들이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었다. 배관 내부를 흐르는 차가운 지하수의 진동이 벽면을 타고 전해졌다. 제단 정상의 열기 때문에 지하 공동 내부의 온도는 이미 섭씨 4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태오는 ‘절연 가죽 장갑’을 양손에 끼고 냉각수 흐름을 제어하는 주 청동 밸브 앞으로 전진했다. 밸브 표면에는 고농도의 마력 누전 전류가 푸른 스파크를 일으키며 지르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일반인이 맨손으로 만졌다간 즉시 신경계가 타버릴 치명적인 전압이었다.
“한스, 구리선을 준비해라.”
태오는 한스가 건넨 고순도 구리선 끝을 밸브 프레임에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 다른 쪽 끝을 지하 공동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축축한 젖은 점토층 깊숙이 박아 넣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전기공학의 기초이자, 마력의 치명적인 전하를 대지로 흘려보내는 안전 수칙, ‘마력 절연 접지 법칙(Grounding)’이었다.
치이이이익—!
구리선이 점토층에 박히는 순간, 밸브 표면에서 날뛰던 푸른 마력 스파크들이 구리선을 타고 지하 점토층으로 흡수되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지 자체가 거대한 전하 흡수 장치가 되어 누전 마력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지금이다!”
태오는 절연 장갑을 낀 손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청동 밸브 레버를 잡았다. 고압의 수밀 압력 때문에 레버는 바위처럼 굳건히 버텼다. 태오는 왼쪽 어깨의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무시하고 온 체중을 실어 레버를 아래로 젖혔.
끼이이이이익—!
쇠붙이가 긁히는 비명 소리와 함께 밸브가 완전히 잠겼다. 청동 파이프 내부를 흐르던 냉각수 소리가 단숨에 멎었다.
그 순간, 제단 지상의 화염 마석이 기이한 고주파 진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냉각 계통이 차단되자 마석 내부의 온도가 임계점 이상으로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냐! 냉각 마력의 흐름이 끊겼다!”
지상에서 주문을 외우던 기상 마법사 에밀이 비명을 지르며 제단 바닥을 지팡이로 내리쳤다. 하지만 이미 열역학적 열폭주(Thermal Runaway)는 시작된 뒤였다. 화염 마석의 붉은 빛이 점차 백색으로 변하며 제단 대리석 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마력 루프가 폭주한다! 대지로 강제 방출시켜 기폭제를 터뜨려야 해!”
태오는 남은 구리선을 제어탑의 메인 마력 전도체인 적동 파이프에 연결했다. 그리고 마지막 접지선을 젖은 점토층에 박으려는 순간, 마력 루프의 초고압 전류가 역류하여 구리선을 타고 태오의 오른팔로 번개처럼 관통했다.
“크아아아악—!”
태오는 전신이 찢겨 나가는 듯한 감전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오른팔 근육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며 손가락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한스 역시 밸브 파열 시 뿜어져 나온 고온의 증기에 뺨을 쓸려 비명을 질렀다.
“태오 형! 탈출해야 합니다! 여기가 무너집니다!”
한스가 마비된 태오의 몸을 부축해 환기구 밖으로 필사적으로 기어 나갔다. 사샤와 전사들이 그들의 뒤를 엄호하며 절벽 아래로 신속히 도주했다.
그리고 그들이 제단 외곽의 안전거리까지 벗어난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바위산 정상이 눈이 멀 정도의 백색 광포와 함께 대폭발을 일으켰다. 시스템의 열 한계를 초과한 화염 마석이 산산조각 나며 제단의 대리석 기둥들을 물리적으로 찢어발겼다. 거대한 충격파가 사막의 모래 언덕들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렸고, 대기를 가두고 있던 붉은 건조 장막이 유리창이 깨지듯 파르르 떨리며 공중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고요가 찾아왔다.
태오는 모래바닥에 쓰러진 채 마비된 오른팔을 움켜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구름 한 점 없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게헤나의 하늘 위로, 수천 년 동안 억눌려 있던 차가운 대기 흐름이 소용돌이치며 먹구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번개 소리와 함께, 사막의 대지에 어울리지 않는 차갑고 습한 흙냄새가 대기를 가득 채웠다.
뚝. 뚝.
태오의 뺨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내, 붉은 소금 사막 전체를 적시는 거대하고 굵은 장대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용소 역사상 최초로 내리는 진짜 비였다. 노예들과 부족민들이 빗속에서 광분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오의 안경 너머 푸른 안광은 저 멀리 국경선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또 다른 거대한 마력의 파동을 포착하고 있었다. 기적의 사기극이 깨진 것에 격노한 교단 본당이 보낸 사냥개, 이단 심문관 크로이츠의 차가운 살기가 장대비 속에서도 태오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죄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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