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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벽을 향한 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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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우물 바닥에 내려놓은 구리 컴퍼스의 바늘이 기이한 맥동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침묵만이 감돌던 아샤족 야영지의 성역에 나침반 바늘이 회전하며 내는 미세한 금속성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대족장 타릭의 거친 손길에 멱살이 잡혀 허공에 떠 있던 한태오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 새겨진 채찍 상처가 다시금 찢어지며 남루한 양가죽 누더기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징했다.


“이 바늘의 움직임이 보이십니까, 대족장님.”


태오가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타릭은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려 했으나, 제 눈앞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다 특정 각도에서 딱 멈춰 서서 파르르 떨리는 컴퍼스의 바늘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동작을 멈추었다.


“이것은…… 무엇이냐.”


“대지의 전자기적 맥동이자, 지하 깊은 곳에 갇혀 흐르는 거대한 수류의 주파수입니다.”


태오는 땅을 딛지 못한 발끝을 까닥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비의 신 교단이 가동한 기상 마법진은 대기 중의 수분을 강제로 증발시켜 이 지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늘을 말릴 수는 있어도, 땅 아래 흘러가는 거대한 혈맥까지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지하 300미터 아래, 물이 통과하지 못하는 단단한 불투수성 점토층 사이에 수백만 톤의 깨끗한 청정수가 고압으로 갇혀 있습니다. 이 컴퍼스는 바로 그 대수층이 뿜어내는 응력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타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평생을 사막에서 살아온 전사로서, 그는 대지가 보내는 미세한 신호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약한 외지인 노예가 가져온 조잡한 구리 기계가 대지의 뼈를 꿰뚫어 보고 숨겨진 물의 위치를 정확한 수치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타릭, 손을 놓아라.”


뒤에서 백발을 늘어뜨린 대무녀 자밀라가 단호하게 지팡이를 내리쳤다.


“대지의 목소리를 듣는 자에게 무례를 범하지 말라. 저 청동 바늘의 떨림은 대지가 우리 부족에게 보내는 마지막 구원의 신호다.”


자밀라의 영험한 아우라가 야영지를 짓누르자, 타릭은 마침내 이빨을 갈며 태오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태오는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들이닥치는 극심한 통증에 어깨를 움켜쥐고 낮게 신음했다. 소금 먼지가 가득한 사막 바람이 허파를 자극하자 격렬한 만성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쿨럭! 하아…… 하아……”


사샤가 다급히 다가와 태오의 등을 부축했다. 태오는 기침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타릭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제게 사흘을 주십시오. 이 우물 바닥을 뚫고 지하 300미터 아래에 잠든 대수층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서쪽 폐광 구역의 아지트에 은닉해 둔 제 수동식 충격 시추기와 장비들을 이곳으로 은밀히 이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추기를 움직일 부족에서 가장 힘이 센 전사들을 제게 지원해 주십시오.”


타릭은 갈라진 우물 바닥과 태오의 손끝에 놓인 컴퍼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부족의 말들은 갈증으로 쓰러져가고 있었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이미 끊긴 지 오래였다. 그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좋다. 사흘이다.”


타릭이 지팡이를 움켜쥐며 차갑게 선언했다.


“사샤의 인도 아래 전사들을 보내 네놈의 장비들을 이곳으로 가져오마. 하지만 명심해라, 노예 제이드. 만약 사흘 뒤에 이 바닥에서 물이 터져 나오지 않는다면, 대무녀의 예언이 무엇이든 간에 네놈과 저 안전 가옥에 누워 있는 네 여동생 리나의 목을 베어 교단의 제단에 바쳐 부족의 평화를 구걸할 것이다.”


“공학자는 계산되지 않은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장비가 도착하는 대로 작업을 개시하겠습니다.”


태오는 차갑게 대꾸하며 정밀 지질 컴퍼스를 거두어 품에 넣었다. 부족의 생사여탈권을 쥔 대족장의 살벌한 협박 앞에서도 그의 이성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무자비한 사막 부족을 자신의 완벽한 군사적 방패막이로 삼기 위한 공학적 설계가 그의 머릿속에서 정밀하게 가동되고 있었다.


* * *


몇 시간 뒤, 깊은 밤의 어둠을 틈타 태오는 사샤의 호위 아래 서쪽 폐광 구역의 비밀 아지트로 일시 복귀했다.


아지트 내부는 서늘한 수기와 함께 참나무 활성탄의 신선한 나무 냄새가 유황 가스의 매운 향을 지워내고 있었다. 브론과 그의 딸 제나는 태오가 가져온 마석 결정들을 탁상 위에 늘어놓고 제련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장! 무사하셨군요!”


조수 한스가 다급히 달려와 태오의 상태를 살폈다. 태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브론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소금 결정 동굴에서 목숨을 걸고 채굴해 온 여덟 개의 마력 석영 결정이 들려 있었다.


“브론, 제나. 여기 마석들을 가져왔습니다. 이것들을 이용해 제 안경의 렌즈를 교체하고, 난공불락의 화강암반을 관통할 초경 드릴 비트를 완성해야 합니다.”


브론은 푸른 안광을 내뿜는 결정을 집어 들고는 장인 특유의 집요한 눈빛으로 그것을 관찰했다.


“정말 순도가 높은 마석이로군. 이 정도라면 광산 최하층의 단단한 화강암반인 ‘통곡의 벽’을 파쇄할 드릴 비트를 주조하기에 충분하다. 제나, 가마의 온도를 올려라!”


“예, 아버지!”


제나가 풀무질을 시작하자 비밀 가마에서 백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브론은 광산 깊은 곳에서 소량 채굴해 둔 극도로 단단한 회색의 ‘화강암 파쇄용 초경 텅스텐 광석’을 도가니에 넣고 마석 결정과 함께 녹여내기 시작했다.


태오는 작업대 구석에 앉아 자신의 지반 투시 마력 안경을 벗어 들었다. 우측 렌즈와 구리 프레임 연결부에 발생한 미세한 균열이 지르르하는 노이즈 음을 내며 가쁘게 떨리고 있었다. 지난 가스 제어와 수압 실측 과정에서 가해진 과부하의 흔적이었다.


“태오 형, 안경이 정말 괜찮을까요? 무리해서 다시 가동했다간 렌즈가 완전히 깨져버릴지도 몰라요.”


한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오는 균열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 한스. 아샤족 야영지의 대수층은 수용소 지하보다 훨씬 깊고 단단한 암반층 아래에 잠겨 있어. 안경의 투시 범위가 최소 300미터 이상 확보되지 않으면, 굴착 지점의 미세한 균열을 찾지 못하고 드릴이 현무암반에 막혀 부러질 거다. 내 시력이 조금 손상되더라도, 렌즈를 교체해 출력을 극대화해야 해.”


태오는 제나가 정밀하게 깎아낸 새로운 마력 석영 렌즈를 안경의 우측 프레임에 끼워 넣었다. 구리 와이어를 조율하자, 지르르하던 노이즈 음이 맑은 고주파 음으로 변하며 안경이 새로운 맥동을 시작했다. 안경의 균열은 여전했지만, 시야에 렌더링되는 청색 격자망의 정밀도는 이전보다 훨씬 깊고 선명해졌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장비를 이송합니다.”


사샤가 이끄는 아샤족 전사들이 아지트 내부로 조용히 진입했다. 그들은 괴력을 지닌 단테와 그레그의 지휘 아래, 무거운 수동식 충격 시추기의 목재 삼각대와 흑철 해머, 그리고 이중관 케이싱 배관들을 해체하여 가죽 포대에 담아 마차로 옮기기 시작했다. 수용소 경비대가 동쪽 구역의 대폭발 수색에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이 장비를 대규모로 이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 * *


다음 날 새벽, 아샤족 야영지 중앙의 말라붙은 우물 성역.


사막의 붉은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며 지독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할 무렵, 야영지 한가운데에 거대한 목제 삼각대가 우뚝 섰다. 강철 삽날대장 그레그는 대원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시추기의 수평을 맞추고 지지목을 단단히 고정했다.


“수평계 확인 완료! 대장, 시추기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레그가 외치자, 태오는 시추기 끝단에 새로 주조된 ‘초경 텅스텐 드릴 비트’를 장착했다. 푸른 석영 성분이 섞여 들어가 어두운 은빛으로 빛나는 드릴 날은 현무암조차 찢어발길 듯한 압도적인 경도를 풍기고 있었다.


대족장 타릭과 부족 전사들이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 조잡한 목제 삼각대와 밧줄 장치가 대지의 신이 내린 가뭄을 해결하겠다는 무모한 발악으로 보일 뿐이었다.


“단테, 준비해라.”


태오의 지시에 시추 조장 단테가 민머리에 굵은 힘줄을 돋우며 거대한 흑철 해머의 밧줄을 움켜쥐었다. 그의 울퉁불퉁한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시작합니다! 내리쳐라!”


“흡!”


단테가 기합 소리와 함께 밧줄을 잡아당겼다 놓았다. 삼각대 상부의 도르래가 요란하게 회전하며, 무거운 흑철 해머가 드릴 비트의 머리를 수직으로 강타했다.


깡—!


협곡 전체를 뒤흔드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드릴 비트 끝이 우물 바닥의 단단한 화강암반에 부딪히며 거대한 불꽃을 뿜어냈다. 하지만 화강암반은 미세한 긁힘 자국만 남겼을 뿐, 집채만 한 바위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깡! 깡! 깡!


단테가 온 힘을 다해 해머를 연속으로 내리쳤다. 엄청난 물리적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시추기 프레임이 요동치며 축이 흔들렸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마찰열로 인해 드릴 비트 끝단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쩍—!


갑자기 기괴한 파열음이 들렸다.


“으악!”


단테가 비명을 지르며 밧줄을 놓치고 뒤로 나자빠졌다. 드릴 비트 끝부분이 화강암의 압도적인 경도를 이기지 못하고 무참하게 깨져 나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단테의 거친 양손바닥 가죽이 shock의 반동으로 찢어지며 붉은 피가 모래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하하! 고작 저딴 쇠붙이로 대지의 심장을 뚫겠다고 설쳐댄 것이냐!”


지켜보던 부족 전사들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타릭 역시 지팡이를 짚으며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애송이 노예 놈의 잔재주가 한계에 달했군. 대지는 인간의 무모한 힘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레그와 삽날대원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첫 타격부터 드릴 비트가 박살 나 자재 손실을 입었으니, 그들의 사기는 단숨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3일이라는 가혹한 유예 시간 중 이미 반나절이 허무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태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찢어진 어깨의 통증을 억누르며 깨진 드릴 비트 단면을 차분히 조사했다.


‘단순한 물리적 완력으로 화강암반의 중앙을 정면 돌파하려 한 것은 내 계산 실수다. 이세계의 화강암은 마력 결정이 불규칙하게 박혀 있어 내부 응력 분포가 극도로 불균형해. 힘을 무작정 가하면 에너지가 사방으로 분산되어 비트가 먼저 자폭할 수밖에 없어.’


태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지반 투시 마력 안경’ 측면 다이얼을 돌렸다.


지이이잉—.


안경 우측 렌즈가 파란 잔광을 내뿜으며 가동되기 시작했다. 렌즈와 프레임 연결부의 균열이 미세한 진동 주파수를 내며 지르르 떨렸고, 그의 오른쪽 안구에 타는 듯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태오는 피눈물이 흐르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우물 바닥 아래를 종단 투시했다.


그의 시야에 3차원 격자망이 펼쳐졌다. 단단한 화강암반 내부의 결정 정렬 상태와, 오랜 세월 동안 대수층의 고압 수압이 가해져 형성된 미세한 응력 집중점(Stress Concentration)들이 붉은색과 청색의 선으로 선명하게 렌더링되기 시작했다.


‘보인다…….’


화강암반 내부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세 개의 미세한 단층 균열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균열선들이 교차하는 중심점이야말로, 이 거대한 바위 요새의 유일한 역학적 약점이자 붕괴의 도화선이었다.


“그레그! 예비 구리 쐐기를 가져와라! 단테, 손을 치료하고 다시 시추기를 잡아라!”


태오의 단호한 명령에 대원들이 다시 일어섰다. 태오는 바닥으로 내려가, 안경이 가리키는 정확한 세 지점에 길고 두꺼운 구리 쐐기를 직접 대고 작은 망치로 때려 박았다.


“응력 집중 암반 파쇄법(Stress Concentration Rock Fracturing)을 시전한다. 단테, 무작정 세게 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파이프를 두드려 보내는 신호 주파수에 맞춰, 저 세 개의 쐐기 머리를 정확하고 일정한 템포로 타격해라. 타격의 파동이 바위 내부에서 공명해야 해.”


단테는 찢어진 손바닥에 급히 천을 감은 채 밧줄을 다시 쥐었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낙천적인 유머가 없었다. 오직 태오의 공학적 지시만을 따르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태오가 시추 파이프를 구리 송곳 끝으로 툭, 툭, 두드렸다. 일정한 비트의 소리가 정막한 우물가에 울렸다.


“치십시오!”


깡—!


단테가 태오의 수신호 주파수에 맞춰 첫 번째 구리 쐐기를 내리쳤다. 이전의 요란한 소리와 달리, 이번에는 둔탁하고 깊은 공명음이 화강암반 내부로 흡수되듯 낮게 깔렸다.


툭, 툭, 툭.


“두 번째!”


깡—!


쐐기 머리가 바위 속으로 미끄러지듯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태오의 안경 화면에 렌더링된 붉은색 응력선들이 급격히 요동치며 임계치를 돌파했다는 경고 신호가 깜빡였다. 세 지점의 구리 쐐기를 통해 가해진 물리적 충격 파동이 화강암 내부의 결정 정렬을 스스로 붕괴시키고 있었다.


“마지막입니다! 전속력으로 내리치십시오!”


단테가 포효하며 마지막 쐐기의 머리를 향해 흑철 해머를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거대한 굉음이 지하 공동과 아샤족 야영지 전체를 지동(地動)처럼 흔들었다.


수백 년 동안 노예들이 단 1인치도 뚫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화강암 장벽, ‘통곡의 벽’의 정중앙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구리 쐐기가 박힌 교차점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미세 균열이 바위 표면을 따라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갔다.


그 균열의 틈새로, 지하 300미터 아래에 고압으로 봉인되어 있던 거대 대수층의 차갑고 청량한 주파수가 태오의 안경에 강렬한 청색 안광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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