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가미, 감옥 속의 이방인
제3동력실의 자욱한 증기 너머로 들이닥친 군화 소리는 무겁고 가차 없었다. 폭탄이 해체된 직후의 고요함을 깨부수며, 자치위원회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중장갑 경비대원 수십 명이 통로를 가득 메웠다. 그들의 레일건 총구가 일제히 이준과 마르쿠스를 향해 조준되었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자치위원회의 명령이다. 임시 항해사 신이준, 너를 기함 사보타주 및 반역 혐의로 체포한다!”
경비대장의 서슬 퍼런 외침이 고온의 증기 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준은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릿속에 개방된 ‘심안(心眼)’은 붉게 타오르는 경비대원들의 열원 잔상 너머, 천천히 걸어 나오는 거구의 실루엣을 포착하고 있었다.
비단 재질의 화려한 예복을 걸치고, 손가락마다 값비싼 보석 반지를 낀 사내. 아르카디아 난민 자치위원회의 수장, 고르돈 위원장이었다. 그의 뒤편에는 차석 항해사 서우진과 함께, 수석 전술 장교 한도윤이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위원장님!”
마르쿠스가 손상된 기계 의수를 웅웅거리며 앞으로 나서려 하자, 경비대원들이 총구를 더 바짝 들이밀었다.
“뒤로 물러서라, 마르쿠스 정비장.” 고르돈이 가증스러운 한숨을 쉬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이 눈먼 반역자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네. 대뇌 피질이 방사선에 절여져 광증에 빠진 애송이가 함대의 통제권을 찬탈하기 위해 벌인 추악한 자작극에 말이지.”
“자작극이라고요?” 마르쿠스가 기가 찬 듯 소리쳤다. “이준이가 아니었으면 이 고물 기함의 하이퍼드라이브 코어는 벌써 날아갔소! 저기 쓰러진 카엘 놈과 제국제 폭탄 잔해가 보이지도 않는 거요?”
고르돈은 바닥에 쓰러진 카엘을 힐끗 보더니, 이내 차가운 눈빛으로 이준을 내려다보았다.
“제국제 폭탄이라니? 저건 그저 고철 더미와 불법 개조된 에너지 셀에 불과하네. 한 장교의 보고에 따르면, 신이준이 자신의 ‘미래 예지’라는 광증을 증명하기 위해 정비고의 부품들을 빼돌려 직접 폭탄을 급조하고 동력실을 위협했다고 하더군.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해 함대 전체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벌인 게지.”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쪽 뺨의 안면 마비로 인해 입술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르돈의 뒤에서 은밀하게 미소 짓고 있는 한도윤의 푸른 잔상을 심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론 플레이를 이렇게 걸어오는군, 도윤아.’
한도윤은 영악했다. 이준이 폭탄을 해체할 것까지 계산에 넣지는 못했겠지만, 사보타주가 실패한 순간 즉각 자치위원장 고르돈을 움직여 이준에게 ‘자작극 테러범’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10만 난민의 눈과 귀를 쥐고 있는 자치위원회의 선전 선동력이라면, 아무런 공식 신분이 없는 맹인 항해사 하나를 매장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준은 마르쿠스에게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주파수를 통한 침묵의 신호였다. 지금 무력으로 저항하면 한도윤이 설계한 덫에 완전히 걸려들어 진짜 반역자가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10만 난민의 신뢰를 영구히 잃고, 24시간 뒤에 닥쳐올 제국의 진짜 기습을 막을 기회조차 사라진다.
“반역자 신이준을 포박하고, 그가 가진 불법 고대 유물을 즉각 압수하라!”
고르돈의 명령에 경비병 둘이 이준에게 다가와 그의 양팔을 거칠게 꺾어 올렸다. 쇠사슬이 이준의 손목을 파고들었다. 다른 경비병 하나가 이준의 군청색 제복 안주머니로 손을 뻗어, 푸른 광륜이 희미하게 흐르는 청동 나침반을 빼앗으려 했다.
“그 손 치워라.”
그때, 동력실 입구의 증기를 가르며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검은색 가죽 전술 슈트를 입고, 붉은 포니테일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 들어오는 여전사. 호위 대장 세라였다. 그녀의 직속 치안대원들이 고르돈의 사설 경비대원들을 밀쳐내며 이준의 주변을 감쌌다.
“세라 대장?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고르돈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보타주 및 기함 테러 사건은 군사 규정에 의거, 치안 호위대의 전적인 사법 관할입니다, 위원장님.” 세라가 플라즈마 블레이드 ‘발키리’의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 “민간 경비대가 군사 구역에서 용의자를 체포하고 증거물을 압수하는 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입니다.”
“이건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함대의 생존을 흔드는 비상 행정 사안이네!” 고르돈이 보석 반지가 낀 손가락으로 이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치위원회는 비상 행정 권한을 발동해 이 용의자의 신변 인도를 요구하겠네. 전원 합의로 의결된 사항일세!”
세라의 눈동자가 분노로 가늘어졌다. 자치위원회의 행정 권한은 전시 상황에서도 군사 지휘권을 일시적으로 제약할 수 있는 초법적인 올가미였다. 세라는 뒤편에서 상황을 관망하는 한도윤과 고르돈을 번갈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정면 충돌은 피해야 했다.
세라는 천천히 이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이준의 은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엄숙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연극을 시작했다.
“좋습니다, 위원장님. 신변 인도는 절차에 따르지요. 하지만 용의자가 소지한 저 위험물만큼은 치안대에서 정밀 감식 및 위해성 평가를 마친 뒤 인도하겠습니다. 제 지휘관 직권을 걸고 요구합니다.”
고르돈이 혀를 찼지만, 세라의 완강한 태도와 치안대원들의 무력 시위에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소. 단, 감식은 1시간 내로 끝내고 나침반은 자치위원회 보관소로 인계해야 하네.”
세라는 이준의 주머니에서 양자 크로논 나침반을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 그러나 이준의 심안은 보았다. 세라가 나침반을 가져가는 찰나, 그녀의 손가락 끝이 이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비밀 신호를 보내는 것을.
‘버텨라. 내가 돌려놓겠다.’
말 한마디 없는 촉각의 약속이었다. 이준은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미세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 * *
이준은 경비대원들에게 끌려 새벽호의 가장 깊고 어두운 하부 구역으로 내려갔다.
상부 구역의 깨끗하고 정돈된 복도와 달리, 하부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급격히 차갑고 탁해졌다. 노후화된 산소 정화 장치가 내뿜는 불쾌한 기계음과 눅눅한 습기, 그리고 고철과 먼지 냄새가 진동했다.
이곳은 ‘난민 거주 구역 델타’였다.
제국의 폭격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수만 명의 난민들이 벌집처럼 좁은 화물칸 격실에 다닥다닥 붙어 살고 있는 거대한 슬럼가. 이준이 경비병들의 손에 이끌려 쇠창살 복도를 지나갈 때, 격실 틈새로 비참한 몰골의 난민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은 담요 한 장에 의지해 추위에 떨며, 배급받은 합성 단백질 수프 그릇을 든 채 맹인 청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마른 기침 소리와 노인들의 신음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메아리쳤다.
이준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이들이었다. 비록 자신은 누명을 쓰고 차가운 바닥을 구르고 있었지만, 매 루프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치르며 지켜내야 할 진짜 가치가 바로 이 비참한 어둠 속에 있었다. 자치위원회의 정치가들이 권력 싸움에 미쳐있을 때, 이 무고한 10만 명의 영혼들은 우주의 가혹한 한파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들어가라, 반역자 놈.”
경비병이 철창문을 거칠게 열고 이준을 안으로 밀쳐냈다.
쿵! 콰르릉!
무거운 전자기 잠금장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완벽한 어둠이 이준을 덮쳤. 바닥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벽면에서는 녹슨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독방 지하 감옥. 외부와의 모든 통신과 빛이 차단된 완벽한 고립의 공간이었다.
이준은 차가운 바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시간 지연 능력을 가동한 여파로 전신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왼쪽 관자놀이는 여전히 불타는 것 같았고, 왼쪽 얼굴은 완전히 감각을 잃어 침이 흐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뇌리에 각인된 여동생 이현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안 돼…… 이현아…….’
이준은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 어린 신음을 삼켰다. 자아 상실의 공포가 어둠 속에서 괴물처럼 그의 목을 죄어왔다.
스스슥.
그때, 독방 철창 너머로 아주 미세한 발소리가 들렸다. 일반적인 경비병의 무거운 군화 소리가 아니었다. 고도로 훈련된 자의 소리 없는 발걸음.
철창의 관측창이 스르륵 열리더니, 어둠 속에서 익숙한 열원 잔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위 대장 세라였다. 그녀는 야간 순찰 대원의 헬멧을 깊게 눌러쓴 채, 주변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독방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준아.”
세라의 낮고 떨리는 목소리가 철창 틈새로 스며들었다.
“대장님…….” 이준이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시간이 없다. 고르돈과 한도윤이 자치위원회 위원들을 매수해 자네를 즉각 처형하거나 영구 격리하려 하고 있어. 함교의 로버트 함장님도 위원회의 비상 권한 앞에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다.”
세라는 철창 틈새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가죽 장갑 안쪽에서 차갑고 묵직한 금속 물체가 만져졌다.
푸른 미동이 잔잔하게 흐르는 청동 나침반.
“압수품 수색 조를 제자치 치안대로 구성해 가짜 모조품과 바꿔치기했다. 고르돈 일당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어. 네 목숨과도 같은 물건이지? 받아라.”
이준은 떨리는 손으로 나침반을 건네받아 품속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나침반이 그의 살결에 닿는 순간, 관자놀이의 극심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완화되며 뇌파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동생 이현의 흐릿해지던 얼굴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세라 대장님…….” 이준이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나침반의 침은 항상 북쪽을 가리킨다.” 세라가 이준이 가르쳐 주었던 비밀 암호를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눈빛에 단단한 신뢰가 서려 있었다. “매 루프마다 자네가 나를 구했다면, 이번에는 내가 자네의 방패가 되겠어.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아볼 테니 버텨라.”
세라의 잔상이 어둠 속으로 신속하게 사라졌다.
다시 찾아온 완벽한 침묵.
이준은 품속의 청동 나침반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비록 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심안은 나침반 내부의 정교한 태엽 기어들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투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 회귀의 기점이 작동하지 않는 이 평온한 감옥 안에서, 나침반의 미세한 바늘이 기이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바늘은 우주의 북쪽도, 이준의 심장박동도 아닌, 완벽하게 수직으로 꺾여 감옥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바늘의 회전 속도가 빨라지며, 나침반 내부의 청동 크로논 입자가 푸른 광선이 되어 바닥의 강철 판넬을 투시하듯 뻗어 나갔다.
이준은 바닥에 엎드려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강철판을 더듬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 그것은 이 비참한 지하 슬럼가 감옥의 바로 아래, 새벽호의 공식 설계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극비 격리 구역의 입구였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옥의 심연 속에서, 나침반의 푸른 빛이 가리키는 방향은 기함 새벽호 하부의 영구 봉인된 미지의 격리 구역을 향해 소리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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