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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대장의 칼날, 신뢰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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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마라, 신이준.”


치익, 웅웅웅.


귓가를 찢는 고주파의 진동음과 함께 살을 태울 듯한 열기가 목덜미를 엄습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푸른빛의 열원만이 감각을 자극했다. 은빛 방사선 피막으로 뒤덮여 초점을 잃은 신이준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 ‘심안(心眼)’은 세라가 겨눈 플라즈마 블레이드 ‘발키리’의 검 끝 위치를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잔상으로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크게 쉬면 목줄기가 증발할 거리였다. 하지만 이준은 침착하게 호흡을 골랐다. 왼쪽 관자놀이에서 시작되어 뺨을 타고 내려오는 지독한 마비 증상 탓에 왼쪽 입꼬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감시를 따돌리고 여기까지 오는 데 꽤 고생했습니다, 세라 대장님.”


발음이 미세하게 샜다. 뇌세포 양자 마찰의 대가로 얻은 신체적 붕괴는 이준의 육체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서린 기묘한 차분함은 오히려 칼을 쥔 호위 대장 세라를 긴장시켰다.


세라는 붉은빛이 도는 포니테일 머리칼을 거칠게 흔들며 검을 쥔 손목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가 이준의 초점 없는 은빛 눈동자를 샅샅이 훑었다.


“함교에서 광증을 부리며 치안을 교란한 것도 모자라, 나를 감시하는 경비병들의 사각지대를 정확히 뚫고 치안유지대 심장부까지 잠입했다? 맹인 항해사라는 껍데기 뒤에 숨겨진 진짜 정체가 뭐지? 제국의 첩자냐, 아니면 자치위원회를 무너뜨리려는 선동가냐.”


“둘 다 아닙니다.”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검 끝이 그의 제복 깃을 살짝 그을렸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는 그저 22시간 뒤에 닥쳐올 인류의 멸망을 막으려는 항해사일 뿐입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국군 한스 중령의 정찰 편대는 이미 우리 함대의 도주 좌표를 확보했습니다. 첫 타격은 기함 우현 격벽과 알테어호가 될 겁니다. 지금 침로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모두 불타 사라집니다.”


“미친 소리.”


세라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르고 시스템의 레이더는 깨끗하다. 제국의 차폐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우리 함대 전체를 포위할 정도의 대함대가 접근한다면 미세한 중력파 왜곡이라도 감지되어야 해. 서우진 소위의 말이 맞았다. 네 뇌 신경망은 방사선 피폭으로 완전히 망가졌어. 환각을 현실이라 믿고 있는 거다.”


“공식 계기판의 수치는 기만당하고 있는 겁니다! 제국은 클로킹 어뢰와 고도화된 스텔스 차폐막을 쓰고 있습니다. 타격 1초 전까지 시스템은 경보를 울리지 않을 겁니다!”


이준은 답답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왼쪽 귀에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이명이 그의 사고를 방해했지만, 그는 이전 루프에서 암기한 기억을 필사적으로 쥐어짜냈다. 세라는 원칙을 목숨처럼 여기는 군인이지만, 동시에 부하들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 아끼는 여전사였다. 그녀를 움직이려면 말장난이 아닌, 눈앞에서 증명되는 물리적인 ‘사실’이 필요했다.


이준은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청동 나침반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제 예지가 광인의 망상인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미래인지 지금 당장 증명해 보이지요.”


“증명? 어떻게?”


세라의 검 끝이 의심으로 흔들렸다.


이준은 머릿속의 ‘미래 궤도 암기’ 데이터를 가동했다. 이전 루프에서 새벽호의 우현 격벽에 미세 우주 먼지 떼가 충돌하여 소규모 화재가 발생했던 시간. 그리고 그 현장에서 부상을 입었던 대원의 이름과 정확한 초 단위의 타이밍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분 뒤, 기함 아르카디아의 새벽호 우현 7구역 격벽에 고속 미세 우주 먼지 떼가 충돌할 겁니다. 그 구역의 장갑은 노후화되어 미세 먼지의 충돌만으로도 격벽이 찢어지고 고압 가스가 누출될 겁니다.”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준의 눈먼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준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세라의 검 끝을 향해 목을 들이밀었다. “그 구역에서 야간 순찰을 돌고 있는 당신의 직속 부하, 제1돌격대장 빅토르 상사가 고압 가스 폭발에 휘말려 오른쪽 다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게 됩니다. 정확히 3분 뒤의 일입니다.”


“빅토르가...?”


세라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빅토르는 현재 하부 데크의 보안 순찰을 돌고 있었다. 이준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지만, 우주 먼지 충돌과 부상 타이밍을 초 단위로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장난질을 치는 거라면 이 자리에서 네 목을 베겠다, 신이준.”


세라는 칼을 거두지 않은 채, 왼손으로 손목의 군용 무전기를 켰다.


“치안대장 세라다. 제1돌격대장 빅토르 상사, 즉각 응답하라.”


치익. 무거운 노이즈 끝에 우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예, 대장님. 현재 하부 데크 우현 7구역 순찰 중입니다.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이준은 나침반의 째깍거리는 진동을 손끝으로 느끼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머릿속의 타이밍은 정확히 1분 30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빅토르 상사에게 당장 그 구역에서 대피하라고 명령하십시오, 세라 대장님. 늦으면 그의 다리는 영구적으로 쓸 수 없게 됩니다.” 이준이 다급하게 외쳤.


세라는 이준의 흐릿한 눈동자 속에서 광기가 아닌, 기묘할 정도로 차가운 확신을 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무전기에 소리쳤다.


“빅토르! 즉시 우현 7구역에서 이탈해 격리 데크 뒤로 대피하라! 이건 명령이다!”


[예? 하지만 대장님, 이 구역은 아무런 위험 신호가…….]


“토 달지 말고 당장 뛰어! 60초 준다!”


무전기 너머로 빅토르의 둔중한 군화 소리가 다급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준은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10, 9, 8…….’


정적이 함교 치안유지대 집무실을 지배했다. 오직 세라의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내뿜는 미세한 진동음만이 공기를 흔들었다. 세라의 이마에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3, 2, 1. 충돌.’


콰아아앙!


그 순간, 기함의 하부 전체가 거대한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격렬하게 요동쳤다. 발밑의 철판이 비명을 질렀고, 집무실의 비상등이 일제히 붉은빛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함내 스피커를 통해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비상 경보. 우현 7구역 격벽 파손. 고압 냉각 가스 누출 발생. 해당 구역을 즉각 폐쇄합니다. 대원들은 대피하십시오.]


“이, 이럴 수가…….”


세라의 손에서 플라즈마 블레이드의 빛이 힘없이 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는 경악으로 가득 찼다.


치익. 무전기 너머로 격렬한 기침 소리와 함께 빅토르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콜록! 대장님! 빅토르입니다! 방금 우현 7구역 격벽이 찢어지며 고압 가스가 폭사했습니다! 제 바로 눈앞에서 배관이 날아갔습니다…… 대장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제 다리는 지금쯤 뼈째로 녹아내렸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세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무전기를 내려놓으며, 어둠 속에 정물처럼 서 있는 눈먼 항해사 신이준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은빛 눈동자. 안면 마비로 인해 굳어버린 차가운 표정. 그의 한 손에는 푸른 미동을 흘려보내는 낡은 청동 나침반이 쥐어져 있었다.


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어떻게 이걸 알고 있었지?”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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