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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구원자, 마모되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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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타로스 크랙의 중력 균열 지대를 빠져나온 직후, 아르카디아의 새벽호 함교에는 기적과도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전면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칠흑 같은 공간의 비명과 붉은 중력파의 소용돌이가 서서히 멀어지고, 아스포델 성계 외곽의 황량하고 붉은 우주 먼지가 스크린 너머로 아스라이 비쳤다. 레이더가 복구되며 연두색 정상 신호가 하나둘 켜지자, 장교들 사이에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탈출…… 했습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함교는 순식간에 안도와 경탄의 열기로 뒤덮였다. 방금 전까지 눈먼 항해사의 무모한 기동에 비명을 지르던 이들이 이제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조종 콘솔을 바라보았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백발의 청년, 신이준을 향해.


하지만 정작 기적을 행한 주인공은 그 찬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으윽……!”


이준은 레오의 조종간을 겹쳐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내려 했으나,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수천 개의 달궈진 바늘로 헤집어지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비인가 양자 신경 접속을 감행해 새벽호의 메인 컴퓨터와 뇌 신경을 직접 연결했던 대가였다. 기함의 삐걱거리는 외벽 격벽의 진동과 미세한 균열의 통증이 그의 뇌세포 하나하나에 물리적인 충격으로 고스란히 피드백되고 있었다.


왼쪽 안면은 이미 감각이 완전히 죽어 굳어 있었고, 마비된 입술 틈새로 신음과 함께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은빛 방사선 피막이 덮인 그의 흐릿한 눈동자에서도 끈적한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카락 절반은 이미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새어버린 상태였다.


“스승님! 정신 차리십시오! 스승님!”


옆에서 소년 조종사 레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이준의 몸을 부축했다. 이준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품속에 넣은 진짜 청동 나침반의 서늘한 감각을 확인하려 제복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청동의 질감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이정표였다. 세라가 고르돈의 눈을 속여 진짜와 바꿔치기해 돌려준 유물. 나침반의 바늘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며 그의 심장박동과 동조하고 있었다.


“이준!”


세라가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거두며 다급히 다가왔다. 어깨 장갑판이 파손된 채 피로와 긴장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에 극도의 우려가 스쳤다. 그녀는 쓰러지려는 이준의 쇠약해진 몸을 단단히 안아 들었다.


“메디컬 팀! 당장 들것을 가져와라! 제4의료 구역으로 이송한다!”


이준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단순한 물리적 실명이 아니었다. 뇌 신경망 전체가 양자 마찰로 인해 타들어 가며 의식의 불씨 자체가 꺼져가는 어둠이었다. 스승 켄트가 남겨준 점자 일지 ‘스텔라 마리나’의 요철 감각도, 함교 대원들의 경탄 어린 웅성거림도, 그를 품에 안은 세라의 다급한 목소리도 점차 아득한 심연 너머로 사라져 갔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이준의 코끝을 찌른 것은 지독한 소독약 냄새와 방사선 차단 약제 특유의 비릿한 금속 향이었다.


귀를 울리는 것은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하트 모니터의 경고음뿐이었다. 이준은 눈을 뜨려 했으나, 눈꺼풀 위로 무거운 납덩이를 얹어놓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눈을 뜨더라도 그에게 허락된 것은 차가운 은빛 안개뿐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완전한 어둠. 심안을 가동하지 않는 한, 그에게 물리적 시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이준 씨. 아직 신경 안정제가 투여 중입니다.”


나직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발렌타인 박사의 수간호사이자, 이준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켜주던 한소윤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이준의 이마에 얹힌 차가운 수건을 갈아주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으로 그녀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소…… 윤 씨.”


이준이 입을 열자, 마비된 왼쪽 뺨 때문에 발음이 뭉개지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샜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듯 건조했다.


“함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르타로스 크랙을 완전히 빠져나왔어요. 지금은 아스포델 성계 외곽의 안전한 폐선 지대에 임시 정박 중이에요. 세라 대장님이 치안을 장악하고 함교를 통제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가장 심각한 건…… 이준 씨의 몸이에요.”


소윤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그녀는 이준이 매 루프마다 동료들의 죽음을 홀로 목격하고,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자신의 뇌세포를 불태우고 있다는 가혹한 진실을 공유하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때, 격실의 자동문이 열리며 무겁고 차가운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새벽호의 최고 의료 책임자, 닥터 발렌타인이었다. 그의 백발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눈빛에는 평소보다 더 무겁고 날카로운 이성이 번뜩이고 있었다.


발렌타인은 이준의 침대 곁으로 다가와 홀로그램 스크린을 허공에 전개했다. 웅웅거리는 연산음과 함께 이준의 뇌 스캔 이미지가 붉은색과 검은색의 기하학적 파형으로 나타났다.


“이걸 보게, 이준 군.”


발렌타인의 목소리는 냉정하리만치 차분했다.


“자네의 대뇌 피질 전체가 정체불명의 고농도 양자 방사선에 피폭되어 있네. 특히 시간 제어 장치와 동조할 때 발생하는 신경 마찰 열로 인해, 뇌세포의 괴사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어. 이미 자네 대뇌 피질의 20%가 영구적으로 사멸했네. 뇌세포 양자 마찰 법칙에 따른 신경 괴사지. 이건 일반적인 방사선 치료제로는 절대 복구할 수 없어.”


이준은 침묵했다. 이미 예견했던 대가였다. 루프를 돌고, 나침반의 동조율을 높일 때마다 관자놀이가 타들어 가던 그 지옥 같은 통증의 정체가 바로 뇌세포의 사멸이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경고하겠네.”


발렌타인이 이준의 스캔 장비를 가리키며 뼈아픈 조언을 건넸다.


“자네의 왼쪽 시각 신경은 이미 완전한 괴사 단계에 진입했어. 이제 왼쪽 눈은 물리적으로 빛을 감지하는 기능이 영구히 소실되었네. 오른쪽 눈 역시 시력의 90% 이상이 감퇴했지. 한 번만 더 그런 무모한 신경 접속이나 시간 간섭을 감행한다면, 자네의 자아 자체가 양자 안개 속으로 흩어져 소멸할 걸세. 즉, 영구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뜻이네.”


“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이준이 굳어버린 안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대답했다. 새어 나가는 발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제국군 한스 편대는…… 파괴되었지만, 에델가르트의 본대 대함대가…… 여전히 우리를 쫓고 있습니다. 제가 항로를 열지 않으면…… 10만 명의 난민들은 결국 몰살당할 겁니다.”


“그전에 자네가 먼저 죽네! 자네가 존재하지 않는데 누구를 구한단 말인가!”


발렌타인이 이례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평생 수많은 환자를 보아온 노의사였지만, 자신의 목숨을 등가교환으로 바쳐 타인을 구하려는 이 눈먼 청년의 무모함 앞에서는 이성적인 냉정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소윤이 눈물지으며 약물 카트리지를 준비했다. 그녀는 이준의 쇠약해진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이준의 손끝에서 미세한 푸른 양자 스파크가 튀는 것이 보였다. 나침반과의 동조율이 그의 신체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이준 씨, 제발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들으세요. 한 번만 더 발작이 오면, 정말 되돌릴 수 없어요.”


이준은 대답 대신 품속의 오르골을 떠올렸다. 실종된 여동생 이현이 남겨준 낡은 청동 오르골. 그 태엽의 멜로디만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때, 발렌타인이 침착하게 이준의 인지 능력을 검사하기 위해 단말기를 켰다.


“기억 마모 테스트를 진행하겠네. 내 질문에 즉각 대답하게. 자네의 여동생 이름이 무언가?”


“신…… 이현입니다.”


이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럼, 이현 양의 중간 이름은 무엇이지? 아르카디아 전통에 따라 아버지가 지어주신 세례명 말일세.”


순간, 이준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머릿속의 기억 저장고를 필사적으로 뒤적였지만, 그 자리에 존재해야 할 단어가 마치 하얗게 지워진 종이처럼 아무런 형태도 나타나지 않았다. 따뜻했던 동생의 목소리, 함께 웃었던 기억의 파편들은 존재하는데, 그 아이를 부르던 가장 소중한 이름의 일부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라져 있었다.


“이현…… 이현의 세례명은…….”


이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럼 다음 질문이네. 자네 가문이 대대로 살았던 아르카디아 행성의 최고 항해사 거리 이름은 무엇인가?”


“그건…… 바다가 보이고, 켄트 스승님의 집이 있던…….”


이준은 숨을 들이켰다. 거리에 깔려 있던 붉은 벽돌의 감각, 짭조름한 바다 내음은 생생한데, 그 거리를 가리키던 고유한 명칭이 완전히 마모되어 있었다. 뇌세포 괴사가 그의 가장 소중한 사적인 기억 영역부터 차례로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준의 목소리에 난생처음으로 극도의 공포가 실렸다. 적의 어뢰가 들이칠 때도, 공간이 찢어지는 크랙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영혼이 자아의 마모라는 원초적인 공포 앞에 격렬하게 흔들렸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면, 시간 회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발렌타인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뇌세포 양자 마찰의 결과네. 자네의 뇌가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가장 오래되고 소중한 기억의 고리부터 끊어내고 있는 거지. 이미 어린 시절 기억의 30%가 영구 소실되었네.”


노의사는 깊은 한숨을 쉬며, 잠금장치가 걸린 특수 보관함에서 푸른빛을 내뿜는 소형 약물 앰플을 꺼냈다. 새벽호 내부에 극소량밖에 남지 않은, 발렌타인이 직접 수제 조제한 특수 신경 보호 약물이었다.


“이것이 내 처방이네. ‘아난 헬릭스 신경 안정제’. 자네의 뇌세포 괴사를 일시적으로 늦춰주고 신경 마찰 열을 강제로 식혀줄 유일한 약물이지. 하지만 명심하게. 이건 치료제가 아니야. 그저 파멸을 조금 늦춰주는 임시방편일 뿐이네.”


발렌타인이 나노 메디컬 주입기를 이준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치익—!


차가운 액체가 경동맥을 타고 뇌 신경망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불타는 듯 뜨겁던 관자놀이의 고열이 순식간에 극저온의 냉기로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극심하던 두통과 안면 마비의 경련이 조금씩 진정되며, 이준의 흐려지던 정신이 다시금 냉철한 이성을 되찾았다. 뇌 신경망이 일시적으로 복구되고 안정화되는 기적적인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준의 머리카락 끝에 남아있던 검은 빛깔이 완전히 지워지며 머리카락 절반이 차가운 백발로 완벽히 고정되었다. 그것은 그가 지불한 생명의 대가가 신체에 새겨놓은 가혹한 낙인이었다.


그때, 제4의료 구역의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 어두운 복도에서 기묘한 전자기적 요동이 감지되었다.


이준은 즉각 ‘심안’을 개방했다. 안개 같은 시야 너머로, 병실 외부 유리에 밀착해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푸른 양자 잔상의 실루엣이 투시되었다. 단정한 셔츠에 명품 시계를 차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


자원부의 엘리트 관리자이자 고르돈 위원장의 충직한 하수인, 백훈 실장이었다.


백훈은 소리 없이 홀로그램 태블릿을 조작하며, 병실 내부의 전산망을 해킹해 이준의 실시간 뇌 손상 진단 데이터와 백발화 상태를 조용히 다운로드하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가는 잔상이 이준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백훈은 데이터를 확보하자마자 흔적을 지우며 어둠 속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고르돈 위원장의 지시를 받고 이준의 신체적 불능 상태를 증명할 정치적 약점을 수집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백훈 실장…… 자치위원회가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이준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는 진정되었지만, 발음은 여전히 마비의 흔적으로 미세하게 어눌했다.


“그들이 자네의 건강 상태를 빌미로 다시 권력을 독점하려 들 걸세.” 발렌타인이 주입기를 정리하며 씁쓸하게 말했다.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고르돈은 자네의 명성을 시기하고 있네. 자네가 쓰러진 틈을 타 함대의 통제권을 완전히 되찾으려 하겠지.”


“상관없습니다.”


이준은 무릎을 세우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소윤이 걱정스레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이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든, 제국의 봉쇄망이 우리 목을 죄어오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다음 루프를 돌기 전에…… 반드시 함내의 배신자 세력과 제국의 포위망을 완전히 걷어내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준은 병실 구석에 놓인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울 표면을 보이지 않는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며, 그는 자신의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을 천천히 만졌다. 차갑고 거친 머리카락의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 순간, 가슴을 짓누르는 지독한 공포가 다시 한번 그의 영혼을 조여왔다.


여동생 이현의 앳된 얼굴, 그 아이가 웃을 때 생기던 눈가 의 작은 주름, 함께 태엽을 감으며 들었던 오르골의 따뜻한 풍경들이 마치 안개 낀 홀로그램처럼 흐릿하게 뭉개지며 지워져 가고 있었다. 동생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지는 원초적인 공포.


이준은 주머니 속 청동 나침반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늘의 촉감이 그의 희미해지는 기억을 억지로 붙잡는 유일한 닻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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